글 수 14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3대 전제 (시편 81편 8-16절)
<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본 천국 환상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어느 날,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됩니다. 그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파란색 벽옥과 붉은색 홍보석 같았고, 보좌 주위에는 초록색 녹보석 모양의 무지개가 둘려 있었습니다(3절).
무지개 뒤로는 24보좌가 있고 그 위에는 흰 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쓴 24장로들이 앉아 있었습니다(4절). 그 24장로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가장 수고한 교회의 대표들’로 여겨지는데, 며칠 전 성경의 그 부분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24장로들이 교회의 대표라면 누구일까? 한번 대표가 정해지면 영원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한번 24명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12제자는 다 들어갔고, 사도 바울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제 11자리가 남습니다. 에녹,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스데반, 성 프랜시스, 본회퍼 등등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할 것 같습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캘빈이나 웨슬레나 무디나 심슨 목사님은 그 자리에 있을까? 현재까지 있었던 265명의 교황 중에 몇 사람이나 그 자리에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런 분들도 그 자리에 포함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 24자리가 이미 꽉 찼는데, 그 다음에 위대한 헌신자가 나온다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분 중에 24위로 헌신한 분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더 헌신한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할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점점 더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환상은 영혼에 힘을 주지만 잘못된 환상이나 엉뚱한 상상은 오히려 영혼을 망칩니다. 한 시간쯤 그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자리 생각은 항상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빼앗아간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자리 생각을 항상 멀리하라.” 그 음성을 듣고 “그래! 자리 생각은 항상 버리며 살자!”고 새롭게 다짐하자 곧 마음속에 신비한 평화가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지난주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난주일에 구정이라고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오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 동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 새벽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나는 십자가를 지는 가장 중요하고 외로운 순간에 제자들이 다 도망가서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 수치가 있었기에 구원의 문이 열렸다. 너도 이런 과정들을 믿음으로 잘 통과해야 한다!”
그 음성을 통해 마음이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주일말씀을 준비하는 열의가 떨어졌지만 이틀 전에 임준호 선교사님의 이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 목사님! 선교사가 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훈련받고 내 신앙과 사역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은 한 영혼의 가치는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영적 시각과 믿음입니다.” 그 짧은 메일이 저에게는 큰 힘과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3대 전제 >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경과 강단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사람과 환경을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음성을 주십니다. 그 음성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마음에 평안과 놀라운 통찰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먼저 알아야 할 몇 가지 전제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죄는 하나님의 음성을 막습니다.
본문 8-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찌어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들으라!”고 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심과 죄를 버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마음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그 창조 목적을 버리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살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죄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God centered life)’을 버리고 ‘자기중심적인 삶(self centered life)’을 사는 것이고, 회개란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새 보면 결혼은 싫고 데이트만 원하는 문화가 강해지는데 신앙적으로도 자기를 드려 주님의 신부가 되기보다는 자기의 축복과 즐거움을 위해 주님과 데이트만 하려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도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욕심을 따라 기도하면 기도 응답도 없고, 마음의 평강도 없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한 인색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꼭 벌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좋은 꾀가 생각나서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물질을 드립니다. 지금 제가 돈주머니를 하늘로 던질 테니까 하나님께서 필요한 만큼만 챙기시고 제게 주실 것은 땅으로 떨어뜨려주세요.”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하늘로 돈주머니를 탁 던졌습니다. 곧 돈주머니가 그대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부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모두 저 쓰라고요?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고 자기 혼자 잘 썼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중심적인 축복 신앙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기도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기도는 욕심을 버리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욕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막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면 사단의 음성만 크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회개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살아야 하고, 자신의 왜곡된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항상 그 일을 하게 할 사람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노아에게 말씀하셨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하려고 기드온에게 말씀하셨고,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겠다는 선한 목표를 가지고 교회 건축 비전을 세우고 다른 비전을 세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한 것보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름다운 것 ‘미(美)’보다 선한 것 ‘선(善)’이 더 중요하고, 선한 것보다 바른 것 ‘진(眞)’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것의 순서를 매길 때 ‘진선미(眞善美)’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보다 ‘선한 사람’을 더 기뻐하시고, 무엇보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을 최고로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을 최고로 기뻐하십니다. 자신의 계획으로 나가면 자신도 해롭게 만들고 교회도 해롭게 만듭니다. 반면에 조금 늦게 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가면 그것이 나중에 보면 더 빨리 가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꿈이 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을 많이 하겠다는 욕구 때문에 자기 계획으로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빨리 좋은 결과를 보기 원합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더 나빠지고 영혼이 더 힘들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맞추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이 필요하고, 먼저 그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기도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무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해서 우리를 그곳에 보내셨고, 우리를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시키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저는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족함만 보는 것은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해도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해보겠습니다. 잘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소서!” 우리는 무력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가면 결코 무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자기는 부족해서 못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멋지게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음을 잘 아시지만 그래도 우리를 통해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혼자 계획을 짜며 방법(method) 중심적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관계(relationship) 중심적으로 일하면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가 살던 때, 당시 영국 성도들이 너무 의기소침해 있었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진짜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조지 뮬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영국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볼 수 있게 해주소서!”
어느 날, 그는 간절히 기도하다가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고아사역을 위한 필요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 기적적으로 그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셨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8백만 불 이상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노동자 일당이 1불 정도니까 8백만 불은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약 8천억 원입니다. 그 돈으로 그는 수많은 선한 일을 하고 죽을 때는 전 재산으로 8백 불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는 무력한 존재였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가장 능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인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항상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저의 갈 길을 인도해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과 의로움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인내로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일 때는 반드시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정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우리는 결코 무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저희 원수를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우리를 결박한 원수의 손에서 풀리고, 즉시 역전이 되어서 오히려 원수를 결박할 수 있고, 문제도 해결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바른 뜻을 세우면 엄청난 능력이 생깁니다. 기독교는 운명론적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단하면 우리의 미래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심지어 우리의 선한 결단은 하나님의 뜻도 바꿀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나? 모든 게 하나님의 마음이지.” 그러나 겸손도 지나치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와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설정하신 수많은 어려운 훈련 코스들은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얼마든지 면제받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은 결코 무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섬기는 것에 진노하셔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겠다.” 아주 결정적인 말씀처럼 들립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듣고 “다 틀렸다!”고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그 틀린 상태를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뜻을 돌이켜 달라고 간절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출애굽기 3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그처럼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조차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무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3.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한하는 자는 저에게 복종하는 체 할찌라도 저희 시대는 영원히 계속하리라.” 이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만 보면 마치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는 복종하는 척만 해도 하나님께서 영원히 복 주신다!”는 뜻 같지만 완전히 반대의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즉 이 말씀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겉으로 복종하는 척 해도 저희의 심판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하나님은 용서가 없는 분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다시 넘치는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또 밀의 아름다운 것으로 저희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시지만 언제나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실패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확신하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서기만 하면 언제나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아무리 우리의 허물이 커도 하나님이 “너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큰 허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허물까지 선한 역사를 이루는데 충분히 전용하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소망을 주시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멋진 생각들과 계획들을 금방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면 언제나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새롭게 일으켜주십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모습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추구하며 새롭게 출발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 월요일, 이제 한달쯤 후에 프랑스로 선교를 떠나는 여승훈 선교사 부부와 대둔산과 사랑 빛 축제를 한 전주로 일일 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이제 프랑스로 가면 한국 산하가 그리울 텐데 한국 산하를 마지막으로 잘 느끼고 즐기라는 의미에서 간 여행이었습니다. 그때 케이블카도 타고, 논산 양촌면에서 겨울딸기 체험도 하고, 사랑 빛 축제에서는 서커스도 봤습니다. 그날 작지 않은 개인 돈을 지출했지만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옛날 목회 초창기를 돌아보았습니다. 옛날에도 가끔 여행을 다녔지만 산이나 국립공원에 가면 거의 그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1-2천 원의 입장료를 절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아내와 서로 이런 말을 하며 위로했습니다. “굳이 안에 들어가 볼 필요가 있나. 여기까지 왔으면 다 본 거지.” 그러면서 돌아섰지만 아내에게 참 미안했습니다. 돈이 많이 드는 케이블카를 타는 일 같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돈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떠나는 젊은 선교사 부부를 위해서라면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습니다. 이번에 이주비용을 지원하려는 것도 처음 선교지로 떠나는 젊은 선교사 부부에게는 그런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저의 목회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고비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는 풍성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풍성하신 하나님과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 >
미국에 남북전쟁 후 노예에서 해방된 샘(Sam)이라는 한 늙은 노예가 있었습니다. 샘은 자유를 찾았지만 나이든 주인이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하자 주인을 사랑했기에 주인이 죽을 때까지 함께 있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얼마 후, 주인이 죽었습니다. 샘은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지만 사는 것은 더 힘들어졌습니다. 그는 판잣집에 살며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했지만 점점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일하기 힘들게 되고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옛 주인의 친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샘! 자네는 이렇게 살 필요가 없네! 자네 주인이 자네 이름으로 은행에 5천 불을 저축해 놓고 힘들 때 말해주라고 내게 부탁했네. 이제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 필요한 것을 사게.”
당시에 하루 일당이 1불이 되지 않던 때인데, 5천 불(지금 돈으로 5억 원)이 자기 이름으로 있다고 하니까 샘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주인의 친구가 계속 샘을 설득하자 소심한 그는 은행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드디어 은행에 도착했습니다. 샘은 은행 창구 앞에서 손에 있는 모자를 초조하게 돌리며 창구 직원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돈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은행원은 그렇다고 말하면서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 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때 샘은 말했습니다. “은행원님! 제가 식료품을 좀 사려는데 조금만 돈을 줄 수 있나요?”
그때 은행원은 5천 달러까지 그가 원하는 만큼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샘은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은행원에게 50센트만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은행원의 말대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 옆에 인출싸인을 하고, 드디어 그는 반짝이는 50센트짜리 새 동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식료품을 사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은행에 4999달러 50센트를 남겨둔 채 누더기를 입고 판잣집에서 살았습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의 가능성을 외면하고 너무 믿음이 없고 소심해서 마땅히 구할 것도 구하지 않고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샘처럼 살지 마시고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런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예배 중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축복의 잔고가 많이 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선한 계획이 있습니다. 때로 시련을 만나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저희가 시작한 사랑칼럼 사역과 미션퍼블릭 사역도 다 교회가 어려운 때 시작해서 많은 열매를 주셨습니다. 작년에 재정위원장이 교회에 큰 재정사고를 내고 떠났을 때도 하나님께서 신비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며칠 전에는 첫딸 은혜의 졸업식이 끝나고 피곤한 상태에서 오후에 아내가 이마트에 갔다가 소매치기를 당했습니다. 아내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날따라 명절 준비로 현찰이 많아서 지갑이 상당히 뚱뚱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속상했을 것입니다. 그 전화를 받고 제가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여보! 선교할 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재정도 하는데 잊어버립시다. 그리고 가족들 건강이 소매치기 당하지 않았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합시다.”
아내의 마음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지난 선교모임 때 강사로 오신 목사님과 식사 약속을 예정대로 갔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명절 선물 대신 식사를 사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목사님이 식사를 사주셨고, 식사 후 그 목사님 댁에 가서 즐겁게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그 목사님이 봉투 하나까지 주셔서 하나님께서 소매치기 당한 것 이상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결국 소매치기 당하고도 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던 하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감당할만한 시련을 주시고, 시련 중에도 피할 길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고전 10:13).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려고 계속 우리들에게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항상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담대하게 세상을 극복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