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1
하나님의 눈길 (사무엘하 11:1~5)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가로 53Cm, 세로 77Cm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매력 때문에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을 멈추게 된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인물 모나리자가 많은 사람들을 끄는 매력은 그 그림을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정면으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오른쪽에서 보든지 왼쪽에서 보든지 정면으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위치에서 보든지 모나리자의 시선이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마치 살아 있는 여인의 눈길이 자기를 따라다니며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할 정도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계속해서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여인의 시선에 사람들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어떤 미술 전문가들은 모나리자야말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신앙 고백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시체를 열 번 이상이나 해부했다고 합니다. 그는 얼굴의 피하 조직을 특히 세밀하게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67세로 죽을 때에도 그 그림을 자기 옆에 두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자신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그림 속의 여인의 다정한 시선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것 같으면 과연 그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죄와 벌』과 같은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청년 시절에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술과 노름 같은 세상 쾌락에 빠져서 정신적인 방황을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방탕한 삶을 살면서도 그가 고집스럽게 버리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자기의 하숙집을 항상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가 보이는 곳에 얻는 것이었고, 또한 신약성경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그의 행동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께 눈을 맞추고 그 주님의 위로를 얻고 또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주님을 잊지 못하고 마침내 어두운 삶을 청산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자신의 삶을 집중시키고 참으로 주옥 같은 작품들을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깊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가 집중하게 될 것 같으면 쓰라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주님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와 같은 삶에는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자리를 꿰뚫어 보고 계시는 주님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할 것 같으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려온 소설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1983년에 쓴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종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50년 전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많은 사람이 러시아에 불어닥친 대재앙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다. 이것이 우리가 이런 재앙을 당하는 이유다.’ 그 이후 나는 러시아의 혁명의 역사를 50년 이상 연구했습니다. 수백 권의 책을 읽었고 수백 권의 개인적인 체험담과 전기를 읽었습니다. 더욱이 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손수 써서 이 문제를 파헤쳐 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천만 명이나 삼켜 버린 무시무시한 혁명의 주요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야기해 보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전에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보다 더 정확히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런 재앙을 당한 이유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솔제니친의 이러한 분석과 고백은 러시아 혁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전 이스라엘의 초기 왕정에서도 이미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서 가장 거룩하고 또 흠이 없는 인물로 알려진 한 인물에 의해서 말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또 부끄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무엘서는 주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즉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인간의 힘과 여호와 하나님의 힘이 바로 그 힘입니다. 얼른 볼 때 역사는 보이는 정치, 경제, 사회의 집단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역사의 주요 인물들이 세워지고 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 간섭, 그리고 활동이 바로 사무엘서의 주된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밧세바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우리도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 다윗은 이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취할 수도 있었고, 막을 수도 있었으며, 또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 군사, 정보, 심지어 개인의 사생활까지 통제할 수 있는 절대 군주였습니다. 그의 눈은 서서히 권력과 야망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절대 군주의 눈을 통해서 백성을 통제하고 자신의 왕국을 좀 더 안전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수단과 방법에 그의 시선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의 눈길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다윗은 밧세바라는 여인에게 시선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여인으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서 임신한 그 여인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라는 매우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술책도 부렸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절대 군주의 시선을 통해서 부정과 불의, 거짓과 살인이라는 어두운 길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늘 자신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길도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그는 하나님의 눈길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욕망에 자신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절대 군주의 위치에서 기만과 독선으로 부정한 사건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설계하고 완성시키려고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이 없는 그런 통치자의 모습을 추구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눈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역사를 더 잘 보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역사를 명확하게 보고 계시는 관찰자이십니다. 이 관찰자의 눈길을 의식하고 또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의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길은 도저히 피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더럽고 추한 욕망은 다윗의 시선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눈길은 여전히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백주 대낮에 행한 부정한 사건과 그에 따른 살인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습니다. 그는 그가 목동일 때부터 자신의 삶을 항상 따라다녔던 하나님의 눈길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자리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자리를 깊이 인식하는 눈길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눈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영원히 우리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의 자리에도 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실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눈길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변화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하늘의 은혜와 평강을 지금 여기서부터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복된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