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일곱 집사들의 행복 (행6:3-6)
지난 주일 하나님과 사도들을 슬프게 했던 아나니아 부부에 대한 불행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과 사도들을 기쁘게 했던 일곱 집사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과 사도들을 기쁘게 하는 행복한 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복한 신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감동적인 사람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태권도 경기이든, 바이올린 연주이든, 축구 경기이든,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의 일이든,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 일이든, 자기에게 맡겨진 소명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사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감동적인 모습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자기에게 맡겨진 소명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서 충성스럽게 살다가 충성스럽게 죽은 일곱 집사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나 장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여 받은 소명과 사명에 따라서 충성스럽게 살다가 충성스럽게 죽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일곱 집사들의 행복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하려고 합니다.
첫째, 일곱 집사들은 구제와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시작부터 구제와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나눠주고"(행2:45). 그런데 일곱 집사들이 바로 그 일을 맡아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6:3).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사람들을 택하여 세우고 “이 일을” 저희에게 맡겼다고 했습니다.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3). “이 일”이란 구제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행6:1). 구제하는 일을 저희에게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구제’라는 말로 번역된 희랍어 원어는 ‘디아코니아’ 라는 단어였는데, ‘디아코니아’ 라는 단어는 ‘구제’라는 의미와 함께 ‘봉사’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은 ‘디아코니아’ 라는 말을 ‘구제’라고 번역한 다음 그 아래 ‘봉사’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설명을 붙였습니다. 일곱 사람들이 맡은 일은 ‘구제’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이었습니다. ‘디아코니아’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사람들을 가리켜 처음으로 ‘디콘’ 즉 ‘집사’라고 불렀습니다. 집사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구제하는 사람’ 또는 ‘봉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집사는 무엇보다 먼저 구제와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슨 이유로, 구제와 봉사의 일을 맡은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구제와 봉사의 일은 귀찮은 일인데 시간과 돈이 소요되는 일인데, 어째서 구제와 봉사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구제와 봉사의 일이었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구제와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0:45을 읽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여기 ‘도리어 섬기려’ 라는 말이 바로 ‘도리어 디아코니아’ 라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리어 구제하려 도리어 봉사하려’ 오셨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일 즉 봉사와 구제의 일을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 박사는 막10:45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는 말씀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들도 섬기는 일 즉 구제와 봉사의 일을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구제와 봉사의 일을 맡은 일곱 집사들이 가장 행복한 이유는 저들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저들도 이어 받아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제의 일과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보람과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고 천국과 연결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조그만 구제와 봉사의 일을 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데 그 일이 얼마나 보람되고 만족하고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일을 계속하면서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도르가의 삶이 바로 구제와 봉사의 삶이었고, 고넬료의 삶이 바로 구제와 봉사의 삶이었고, 가이오의 삶이 바로 구제와 봉사의 삶이었고, 이기풍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삶이 바로 구제와 봉사의 삶이었고, 최일도 목사님의 삶이 바로 구제와 봉사의 삶입니다. 그런데 일곱 집사들이 구제와 봉사의 일을 전문적으로 시작한 원조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집사들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일곱 집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시작부터 복음을 전하는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너희가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행2:14,23). 그런데 스데반과 빌립 집사가 구제와 봉사하는 일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전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행7:2).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긴 전도 설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긴 전도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듣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2,53). 마치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날의 전도 설교와 비슷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날 전도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 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스데반 집사는 사도의 수준과 맞먹는 높은 수준의 강렬한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전도 설교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행6:10).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행7:54,55). 스데반은 전도하다가 그의 생을 마감한 철저한 전도자였습니다.
빌립 집사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 사역에 한 평생을 쏟아 바친 철저한 전도자였습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의 네 딸들도 모두 전도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빌립 집사의 전도와 선교 사역이 사도행전 8장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행8:5,6).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 다음으로 사마리아 복음화의 선구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빌립은 또한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므로 에디오피아 선교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빌립과 내시가 물에 내려가 빌립에게 세례를 주고”(행8:35-38).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푼 다음 성령에게 이끌리어 아소도와 가이사랴에 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빌립은 네 딸들과 함께 가이사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고 누가는 전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행21:8,9). 여기 예언하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를 가리킵니다. 빌립과 그의 네 딸들은 한 평생 전도자들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빌립을 가리켜 전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슨 이유로, 전도와 선교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전도와 선교의 일은 어렵고 힘든 일인데 때로는 반대와 박해를 받는 일인데, 어째서 전도와 선교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었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전도의 일과 선교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38 이하를 읽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1:38,39). 예수님은 전도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선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전도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하고 선교는 먼데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서 땅에 오셨기 때문에 가장 먼데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즉 선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와 선교를 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이어 받아서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와 선교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사람들이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삶의 보람과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값지고 더 보람된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많이 하고 선교를 많이 한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들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의 일을 하다가 세상을 마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일곱 집사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전도한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 일곱 집사들은 제물 되는 삶 즉 순교적 삶을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한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고난과 핍박을 받으며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순교적 삶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 4,24).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21:18,19).
일곱 집사들이 모두 어떠한 죽음을 죽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은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순교의 죽음을 죽은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는 수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서기 64년 네로 황제 때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서 동물에게 찢겨서 죽기도 했고 불에 태워서 죽기도 했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는 긴 설교를 한 후 하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서 순교한 초대교회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행7:56-58).
그런데 어째서, 무슨 이유로, 돌에 맞아서 순교의 죽음을 죽은 스데반 집사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순교의 죽음을 죽는 일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인데 어째서 순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가장 고통스러운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분인데, 순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은 그 분의 죽음을 본 받아서 죽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은 주님의 고통에 가장 가깝게 참여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순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은 또한 교회와 사회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의 대속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순교자들의 죽음은 그 당시에 교회와 사회를 정화시키고 성결하게 하는 제물의 역할을 합니다. 순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은 또한 교회를 부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의 피 흘려 교회를 사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순교자들의 죽음은 그 당시에 교회를 부흥시키고 발전시키는 제물의 역할을 합니다. 순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순교자들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스데반의 순교적 죽음으로 복음이 사마리아와 가이사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전파되고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까지 확장된 것을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저하는데”(행11:19). 순교의 죽음을 죽는 사람은 또한 그 당시 교회와 사회 안에 화해와 통일을 가져옵니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으로 로마 세계 안에 화해와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순교자들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팔을 벌리고 순교하는 스데반을 환영하며 천국으로 영접했습니다. 저는 너무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다면 저도 스데반의 뒤를 이어 십자가의 복음을 북한 동포들에게 전하다가 나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화해와 통일의 제물로 바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맡겨진 소명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서 충성한 일곱 집사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소명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서 충성하는 행복한 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제와 봉사의 일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일에 그리고 몸을 제물로 드리는 순교적 삶과 죽음을 죽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충성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 가지 일의 관계를 말씀 드리면 구제와 봉사는 전도의 기초가 되고 순교는 전도의 완성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제와 봉사의 일에 전도하는 일에 순교적 죽음을 죽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읽으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