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예수님처럼 행복하기 (마5: 1-12)
성경 안에는 설교자로서 설교하기가 두려운 말씀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말씀을 피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설교를 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본문은 소위 산상보훈 혹은 산상수훈이라는 별명을 가진 말씀입니다. 주님이 산에서 특별히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산상수훈에 관한 내용은 제가 설교하기에 퍽 부담스럽고 두려워지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같은 내용을 설교하려고 하면 '내가 과연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사람이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핍박을 한 번도 받아 보지 않았기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정말 나는 온유한가?'고 자문할 때 금방 대답이 안 나옵니다.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에 과연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종종 산상보훈의 말씀을 읽지만 그 때마다 이 말씀은 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듯한 충격을 주고 자신감을 꺾어 놓습니다. 너무나 수준이 높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목사가 부담스러운 말씀을 교인들에게 어떻게 마음놓고 전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다 보니 20년이 넘도록 산상수훈 가운데서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몇 번 설교를 하긴 했지만 전체를 놓고 강해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1년 전쯤에 어느 형제가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저에게 나누고 싶어서 보낸 편지였는데, 편지를 말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언젠가 산상수훈을 강해해 주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상하게 그 편지를 읽고 난 다음 저의 마음에는 늘 따라다니는 음성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가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산상수훈을 설교해야 된다.'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사실 목사라는 위치는 주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맡기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야 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부담이 없는 말씀만 설교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설교자가 지키지 못하는 어려운 말씀이라 할지라도 꼭 전해야 될 엄숙한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제는 산상수훈을 본격적으로 묵상하면서 설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없고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성도들과 함께 산상수훈의 성찬을 먹고 마시는 은혜를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매주마다 산상수훈을 놓고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동산으로 여러분과 함께 올라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구름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바로 앞에 있는 4장 25절에 보면 갈릴리에서도 오고, 데가볼리에서도 오고,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서도 오고,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서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몰려온 그들의 신분이 대충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물론 지체 높고 잘 사는 사람들도 조금은 끼어 있었겠지만 4장 24절로 보아 대부분은 병든 자들이요, 귀신들린 사람들이요, 어떤 면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이며 죄인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실패자들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이끌고 갈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장 1절에 보면 예수님 앞에는 마치 제자들만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표현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래서 그런지 어떤 성경학자들은 산상보훈은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주신 말씀이지 무리들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간 편협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무리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산상수훈의 내용은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도 없고 소화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제자들에게나 통하는 너무나 차원 높은 진리요, 신비스러운 진리이기 때문에 일반 무리들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액면 그대로 이해를 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의 깊이를 전부 다 들여다 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무리들은 따돌려 놓고 제자들만 상대하여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 무리들도 언젠가는 예수를 믿게 될 것이고,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고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하게 나타날 미래의 제자들을 눈앞에 그리면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5장 1절에는 재미있는 말 한 마디가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는 표현입니다. 산에 올라갔기 때문에 앉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간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말씀은 너무 평범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의미에는 상당히 무게가 실려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것은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유대 나라 랍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가르칠 때 앉아서 했습니다. 가르치는 선생의 권위를 앉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수한 대학에 가면 명강의를 하는 학자로 소문난 교수들은 앉아서 강의를 합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교황도 교서를 내리거나 무엇을 읽을 때는 꼭 의자에 앉아서 합니다. 교황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산에 가서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가르치심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는지, 얼마나 박력이 있었는지, 얼마나 무게가 있었는지 듣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봅시다. 7장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왜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7장 29절입니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다.' 감히 얼굴을 들고 볼 수가 없을 만큼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저희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직업적으로 가르치면 아무래도 감동이 적고 또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말은 권위가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직업적으로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 사람들의 귀에 들렸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놀랜 것입니다. 앉아서 가르치신 주님의 그 태도에는 이와 같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의 이 권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이 예수님이 비록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앉으셨지만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와 계십니다. 2,000년 전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가르치시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 지금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위 앞에 우리는 압도되어야 하고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교만한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고개를 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산상수훈은 이상론일 뿐이라는 생각이나 그대로 순종하면서 살 사람이 이 세상에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은 앉아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들은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고 현실에 맞게 적당하게 각색을 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 양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설교하는 목사를 비판하고 싶다거나 한 마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한 태도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그 마음을 빨리 꺾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담아 들으면 마음이 아무리 캄캄한 사람이라도 하늘에서 빛이 비치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서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없다 할지라도 그 권위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그 말씀이 깊이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자리잡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막연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먹듯이 마음 속 깊이 담았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말씀이 내 기쁨이 되었나이다.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예레미야 15장 16절에 고백한 그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팔복의 내용을 한데 묶어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팔복이 무엇인가? 여덟 가지 복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여덟 가지 복입니다. 본문을 보면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여덟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팔복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한번 더 그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주로 일반적으로 구복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팔복이라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꼭 명심해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이 팔복의 말씀은 예수님의 자신의 성품이요,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성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본성과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도 있고, 눈물이 많은 사람도 있고,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도 있고, 의분이 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생물학적인 특징을 여기에서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성품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성품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팔복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만이 닮아갈 수 있는 주님의 성품이요, 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따라서 이 여덟 가지를 개별적으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특별히 마음이 온유하다거나 또 다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한 가지씩 소유하는 성격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온전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이 여덟 가지는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 내 것으로 받아 들여졌을 때 내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성품이요, 거룩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팔복이 예수님 자신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예수님의 초상화라고 이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8복을 가만히 읽으면서 그 내용을 음미해 보면 마치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여덟 가지의 칼라를 가진 수천 개의 작은 돌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모자이크 초상화 같습니다. 모자이크 그림이라든지 모자이크 작품을 감상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돌들이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얼굴을 모자이크에 가까이 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돌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자이크로부터 몇 걸음 뒷걸음질해서 전체를 보면 이 작은 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을 보여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팔복도 이와 똑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모든 말씀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각에도 그 나름대로 풍성한 은혜가 있지만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팔복 전체를 보면서 마음에 담고 생각하면 어느새 예수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에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습니다. 애통함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얼굴에는 화평이 있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말씀을 권위 있게 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이러하니, 너희도 이러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두 나처럼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말처럼 진정한 구원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막연히 천당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자요, 예수님을 닮는 자요, 결국에는 예수님과 똑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팔복의 내용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를 배우고 따르고 닮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 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고 계시지만 예배를 마치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다 잊어버리고 또 일주일을 살아갈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러지 맙시다. 집에 돌아가서 팔복의 말씀을 앞에 놓고 매일 매일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며 묵상하십시오. 주님을 닮아가는 내가 이 말씀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있고, 과연 이 말씀대로 내 자신이 주님처럼 빚어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검토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그분을 더욱 닮게 됩니다.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 사람은 그분의 사진을 벽에다 걸어 놓고 하루에 한 두 번씩 쳐다보면서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하고 그분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닮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듣고는 손 씻듯이 다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살면 주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매일 묵상하시면 그 말씀이 나의 성품을 심는 씨앗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 가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님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팔복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너희도 행복해야 된다.'는 주님의 그 따뜻한 마음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투는 감탄사입니다. 우리말 번역인 '복이 있나니'에도 감탄의 뉘앙스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원래 이 말은 완전히 감탄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여! 온유한 자의 행복이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행복이여!'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가? 화평케 하는 생활을 하면 얼마나 행복해 지는지 아는가?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감탄과 감격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이 있나니'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makarios)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마카리오스'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행복을 가리켜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도 속에는 '내가 누리는 행복을 너희도 항상 체험하면서 살기를 바란다.'는 주님의 심정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도 나처럼 심령이 가난하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속삭임이 이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도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나처럼 행복할 수 있느니라.' 하는 주님의 마음이 말씀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을 살았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분이 없었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핍박 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만큼 고통을 체험한 사람이 없었지만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심령의 행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그 행복을 누가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면서 애통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큰 소리를 쳐야 이깁니다. 온유하면 손해 봅니다. 그런데 온유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못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는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줄 수가 없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행복인 것입니다. 이 행복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것처럼 누구나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우리는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불행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한 사람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좋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뜁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면 앞뒤 가리지 아니하고 매달립니다. 마치 인생의 목표가 행복을 얻는데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틀렸습니다. 행복을 찾아가는 길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아그네스 레플리어'라는 분이 의미 있는 말 한 마디를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곳, 즉 내 밖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밖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자기 밖에 있는 무엇을 통해서 행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행복을 실제로 손에 넣은 자가 이 세상에서 몇이나 됩니까?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섹스도 사람들이 그렇게 탐닉하고 빠져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 줄 알고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가져다 줄 줄 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좇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솔로몬까지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에서 사는 팔자 좋은 사람들은 벌써 무릉도원에서의 인생을 구가하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아스피린이나 진통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 행복을 주지만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죄에 끌려가면 일시적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섹스를 추구하든지, 돈을 추구하든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죄는 우리를 잠깐 동안은 행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거짓입니다. 쾌락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재물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전도서가 선언한 것처럼 '헛되다'로 귀착된다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중주의 헛됨으로 다 귀착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의 길이 어디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내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애쓰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리시는 그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행복의 순도는 더 높아지고 그 농도는 더 진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행복의 원천이 된다고 하십니다. 그 행복의 원천 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믿습니까?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권세 있게 말씀합니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 아니다. 행복은 나에게 있다. 그러므로 내가 다스리는 너희 마음에서 행복을 찾으라.' 행복을 찾는 길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하셨던 것처럼 나도 심령이 가난해 지면 예수님의 행복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성격이 예수님의 성품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들은 행복을 잘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에 영향을 주는 첫째 요인으로 성격을 꼽습니다. 과거 심리학자들은 일상에서 얻은 기쁨이 모여 행복을 이룬다는 소위 상향이론을 많이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격처럼 타고난 심리적 특징이 개인의 행복을 결정짓는다는 하향이론 쪽으로 기울고 있는 추세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격 따라 행복해 하기도 하고 불행해 하기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갈수록 행복 체감지수가 올라갈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뒷받침해 주는 학문적 견해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그를 닮으십시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행복은 소유에 만족하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심령이 가난한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웃고 즐기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애통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강한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한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무정하고 차가운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긍휼이 여기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더러운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다투고 갈등하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화평케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불의와 타협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심령에 왕으로 모시십시오. 그러면 그 분이 우리 모두의 행복의 원천이 되실 것입니다. 마우리스 마에터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쓴 'Blue Bird', 소위 파랑새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본래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쓰레기와 같고 걸레조각과 같은 천한 인간입니다. 여러 귀신이 들어서 인격이 완전히 깨져 버리고 파산한 사람입니다. 또 신분상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미루어 보아 창녀 출신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행복을 이야기합니까? 이런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행복에 겨워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내가 전에 알지 못한 행복을 가져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모든 자들은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행복이라는 주제를 놓고 그림을 그린다면 여러분은 어떤 그림들을 그리고 싶습니까? 이 드라마를 쓴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행복은 이런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잠을 푹 자고 눈을 살짝 떴는데 자기를 쳐다보고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너무나 행복해서 씩 웃습니다. 최고의 행복을 표현하는 그림 같은 장면입니다.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복은 어떤 것입니까?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행복을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갑자기 신분이 높아 진 것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분을 마음에 모셨기 때문에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 아이가 느끼는 그 행복을 자기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므로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성품이 나의 성품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울면서도 행복해 질 수 있고, 가난하면서도 행복해 질 수 있고, 실패자가 되어서도 행복해 질 수 있고, 또 성공하고 부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헛된 것을 놓고 시간을 낭비하거나 정력을 소모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처럼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분의 성격을 하나하나 나의 성격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산상보훈을 설교하지 못했지만, 제가 이 설교를 하면서 동시에 저도 예수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리던 그 행복을 제가 소유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조건을 보면 행복해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세상이 모르는 행복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앗아가지 못하는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행복의 원천 되시는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을 알고 그분을 배울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집에 가셔서 팔복의 말씀을 날마다 한번씩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면 나도 이렇게 해야겠다. 예수님의 성품이 이랬다면 나도 그렇게 해 보아야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여덟 가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품성이 나 자신의 품성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 집니다. 악을 쓰는 세상에서 내가 온유함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악착같이 모아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틈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전혀 부러울 것이 없는 만족이 내 안에 있다면 세상에 이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 보다 앞서 달려가는 사람들이 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록 나는 뒤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심정 때문에 내 마음에 신비스러운 행복이 자리를 잡는다면 세상에 이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