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7
행복을 회복시키라. (창세기 25:27-34)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지위에 있는 것도 물론 아니며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행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불행하다는 것이고,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둘로 나누어보면.
하나는 상대적 행복이 있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 행복이 있습니다.
상대적 행복이란 나와 가정과 사회라는 삼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가정의 가치관이 바르고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배울 것이 많고, 사회가 바르고 내 자신이 바를 때 누리게 되는 행복이 상대적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행복이란.
가정이나 상회가 아무리 일그러졌어도 그 일그러짐에 영향을 받지 않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저자의 기도 내용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6-18)
이것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돈, 지위, 명에,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내적 행복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가져야 할 행복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축복의 유언을 하는 모습이 신명기 3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아셀 지파에게 이런 축복을 하십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맏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여수론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속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는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신33:24-29)
무슨 말씀입니까?
있고, 없고, 가졌고 못 가졌고, 누리고 누리지 못하는 외부로부터 오는 만족을 행복의 기준으로 하지 않는 축복에서 아셀지파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행복의 목표를 두는 것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먼저 에서를 상대적 행복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야곱은 절대적 행복을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의 배경은 살펴보면 어느 날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오니 야곱이 팥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동생 야곱에게 ‘내게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30절)고 조릅니다. 그러자 야곱이 약삭빠른 짓을 합니다.
31절에 보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합니다. 에서는 대답하길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는 그 소중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룻에 팔아 버렸습니다.
에서는 훗날 깨닫고 보니 소중한 것을 알았지만 이미 빼앗긴 후였고, 잃어버린 다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12:16절에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에서를 성경은 망령된 자 어리석은 자로 평가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상대적인 행복 때문에 절대적인 행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장자의 명분이란 말이 4번이나 나왔습니다. 대단히 장자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장자권이 중요합니까?
첫째는 제사의 권한이 장자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에게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특권이 장자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둘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게되는 권한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기업을 이을 자는 장자입니다.
셋째는 메시야의 계보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이 계승 되는 혈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마1:2) 야곱 대신에 에서가 들어가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 귀한 축복을 생존 문제라는 배고픔 때문에 경홀히 여겼습니다. 더욱더 장자권의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축복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축복하여야 소득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을 한다해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유명한 주석가이자 목사인 매튜핸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도와주심과 성공케 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설교도 할 수 없고, 강연도 할 수 없고 축도도 할 수 없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복의 근원이 되어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포기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에서가 실수했으니 에서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먹고사는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34절 끝 부분에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이 여김이었더라. 이 말씀 속에서 에서의 사람됨, 그 본질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에서는 영적인 신령한 권리와 신령한 축복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신앙,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장자의 명분을 소홀하게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로마서 8;18절을 수없이 반복하며 외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보이지 않는 것, 신령한 것, 영원한 것에 대한 큰 가치를 두고 소중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자꾸 되새기고 최면을 거는 것입니까? 너무 자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려운 일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처럼 육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말씀에 묶어두고 자신을 치는 행동을 계속해야 썩어질 것들에게 메이지 않는 것입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창세기 28장:6-8을 보면 이방 가나안 여인인 마할랏과 결혼을 합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보다 육체적인 욕심에 더 집착합니다.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팥죽을 달랄 때도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좀 더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온 식구와 함께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내 놓으라고 합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죽게 되었습니까? 배고픈 것으로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더 있다가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한 사건을 과장하는 것, 스스로 위기를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로 신자들 중에는 약간의 문제만 생기면 못살겠다느니, 끝이라느니, 죽어버리겠다느니 하며에서 스타일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너무 눈에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에 매여 정말 중요한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무신론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신자들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나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짓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아니함이로다.”(고후5:1-7)
이렇게 신령한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신자가 되십시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육체를 위한 것을 위해 죽기살기로 매달리지 마시고 영적인 것에 매달리십시오. 눈 앞에 당장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미래를 보십시오.
고사성어에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하여 집에서 많이 키웠는데 날이 갈수록 숫자가 많아져 먹이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열매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데모를 합니다. 적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말을 바꾸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하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도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것만 생각을 하지 미래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의 스타일입니다.
이제 본문34절의 유감스러운 장면을 생각하며 마치겠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배가 고플 때 헛소리 했다손 치더라도 팥죽 먹고 정신 차린 다음에야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느니 하고 말 한 미디쯤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먹고 마시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잘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에서는 그 한마디를 못해서 평생 은혜없는, 복 없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라도 야곱아 미안하다하며 반성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창세기27:36-41절을 보면 야곱이 간사하고 나쁘다며 증오하며 죽이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에서는 야곱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현세적인 것, 눈 앞에 당장 벌어지는 사건에 매여 신령한 것. 영원한 것, 은혜로운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방법에서야 물론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만 신령한 복, 절대적인 복을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마침내 장자의 기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홀히 여긴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느냐?
신령한 것에 목숨을 거느냐?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느냐?
상대적 행복이냐? 절대적 행복이냐?
야곱이냐? 에서냐?
여러분, 스스로 가야 될 목표를 정하십시오, 그러나 어리석다거나 망령되었다는 평가를 듣지 않도록 올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사십시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지위에 있는 것도 물론 아니며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행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불행하다는 것이고,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둘로 나누어보면.
하나는 상대적 행복이 있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 행복이 있습니다.
상대적 행복이란 나와 가정과 사회라는 삼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가정의 가치관이 바르고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배울 것이 많고, 사회가 바르고 내 자신이 바를 때 누리게 되는 행복이 상대적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행복이란.
가정이나 상회가 아무리 일그러졌어도 그 일그러짐에 영향을 받지 않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저자의 기도 내용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6-18)
이것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돈, 지위, 명에,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내적 행복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가져야 할 행복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축복의 유언을 하는 모습이 신명기 3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아셀 지파에게 이런 축복을 하십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맏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여수론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속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는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신33:24-29)
무슨 말씀입니까?
있고, 없고, 가졌고 못 가졌고, 누리고 누리지 못하는 외부로부터 오는 만족을 행복의 기준으로 하지 않는 축복에서 아셀지파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행복의 목표를 두는 것을 절대적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등장을 합니다.
먼저 에서를 상대적 행복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야곱은 절대적 행복을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의 배경은 살펴보면 어느 날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오니 야곱이 팥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동생 야곱에게 ‘내게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30절)고 조릅니다. 그러자 야곱이 약삭빠른 짓을 합니다.
31절에 보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고 합니다. 에서는 대답하길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는 그 소중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룻에 팔아 버렸습니다.
에서는 훗날 깨닫고 보니 소중한 것을 알았지만 이미 빼앗긴 후였고, 잃어버린 다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12:16절에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에서를 성경은 망령된 자 어리석은 자로 평가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상대적인 행복 때문에 절대적인 행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장자의 명분이란 말이 4번이나 나왔습니다. 대단히 장자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장자권이 중요합니까?
첫째는 제사의 권한이 장자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에게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특권이 장자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둘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게되는 권한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기업을 이을 자는 장자입니다.
셋째는 메시야의 계보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이 계승 되는 혈통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마1:2) 야곱 대신에 에서가 들어가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 귀한 축복을 생존 문제라는 배고픔 때문에 경홀히 여겼습니다. 더욱더 장자권의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축복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축복하여야 소득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을 한다해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유명한 주석가이자 목사인 매튜핸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도와주심과 성공케 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설교도 할 수 없고, 강연도 할 수 없고 축도도 할 수 없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복의 근원이 되어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포기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에서가 실수했으니 에서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먹고사는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34절 끝 부분에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이 여김이었더라. 이 말씀 속에서 에서의 사람됨, 그 본질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에서는 영적인 신령한 권리와 신령한 축복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신앙,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장자의 명분을 소홀하게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로마서 8;18절을 수없이 반복하며 외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보이지 않는 것, 신령한 것, 영원한 것에 대한 큰 가치를 두고 소중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자꾸 되새기고 최면을 거는 것입니까? 너무 자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려운 일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처럼 육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말씀에 묶어두고 자신을 치는 행동을 계속해야 썩어질 것들에게 메이지 않는 것입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창세기 28장:6-8을 보면 이방 가나안 여인인 마할랏과 결혼을 합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보다 육체적인 욕심에 더 집착합니다.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팥죽을 달랄 때도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좀 더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온 식구와 함께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내 놓으라고 합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죽게 되었습니까? 배고픈 것으로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더 있다가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한 사건을 과장하는 것, 스스로 위기를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로 신자들 중에는 약간의 문제만 생기면 못살겠다느니, 끝이라느니, 죽어버리겠다느니 하며에서 스타일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너무 눈에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에 매여 정말 중요한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무신론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신자들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나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짓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아니함이로다.”(고후5:1-7)
이렇게 신령한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신자가 되십시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육체를 위한 것을 위해 죽기살기로 매달리지 마시고 영적인 것에 매달리십시오. 눈 앞에 당장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미래를 보십시오.
고사성어에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를 좋아하여 집에서 많이 키웠는데 날이 갈수록 숫자가 많아져 먹이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열매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데모를 합니다. 적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말을 바꾸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하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도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것만 생각을 하지 미래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의 스타일입니다.
이제 본문34절의 유감스러운 장면을 생각하며 마치겠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배가 고플 때 헛소리 했다손 치더라도 팥죽 먹고 정신 차린 다음에야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느니 하고 말 한 미디쯤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먹고 마시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잘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에서는 그 한마디를 못해서 평생 은혜없는, 복 없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라도 야곱아 미안하다하며 반성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창세기27:36-41절을 보면 야곱이 간사하고 나쁘다며 증오하며 죽이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에서는 야곱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현세적인 것, 눈 앞에 당장 벌어지는 사건에 매여 신령한 것. 영원한 것, 은혜로운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방법에서야 물론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만 신령한 복, 절대적인 복을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마침내 장자의 기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홀히 여긴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느냐?
신령한 것에 목숨을 거느냐?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느냐?
상대적 행복이냐? 절대적 행복이냐?
야곱이냐? 에서냐?
여러분, 스스로 가야 될 목표를 정하십시오, 그러나 어리석다거나 망령되었다는 평가를 듣지 않도록 올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사십시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