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0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욥기 8:1-7)
누구든지 지금보다야 나중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희망이야말로 사람이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현재의 난관은 꿈이 있으므로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하십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는 모른채 기다리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이 지금보다 낫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이 주시는 원리대로 살아야 됩니다.
미약한 것이 어떻게 심히 창대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을 잘 살피면 그 해답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은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한 말입니다. 욥이 죄가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니 죄를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아울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빌닷의 말은 욥이나 자녀들의 득죄에 대한 말은 진리가 아니더라도 후에 전한 말은 진리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지금보다 나중이 창대하게 될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입니까?
1. 창대케 되는 원리는?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입니다.
(5절) 전반 절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라고 합니다. 뒤에 '빌고'라는 말을 다시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이 말은 단순히 기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가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주께 돌아오고 주께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더 깊게 말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욥5:8)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또,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흔드는 것을 말합니다. (욥11: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주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 속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은 항상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구하여 알고 행하는 자는 지금은 미약할지라도 장차 창대해질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축복의 말씀을 듣고 읽는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마음에 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큰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지런히 구하며"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낯(얼굴)을 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만납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만납니다.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주님을 만나는 자요 복 받을 자입니다. 모세는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대부분의 제자들은 고기 잡다가 바닷가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또한 열심이 없으면 못 만납니다. 이스라엘에 소경이 바디매오뿐입니까? 다 고침 받은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뜬 사람은 열심을 가지고 외친 바디매오입니다. 여러분도 부지런히 말씀 속에 거하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창대케 되는 원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5절) 후반 절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라고 합니다. 빈다는 것은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또한 나중을 기대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였어도 기도를 소홀히 하면 죽은 나무의 진액이 마름같이 성령은 소멸되며 신앙생활에 생명력과 활기가 없어지면서 형식과 의식만이 남게 됩니다.
기도의 단을 쌓은 자들이 훗날 축복의 단도 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하고 (막9:28)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묻자, (막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을 역설한 대목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함으로 장래를 보장하는 도구가 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를 계속 가지고 간다면 장래는 별로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내일로 가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사람이 장차 창대한 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눅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셨는데 기도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고전적인 말씀입니다. (마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주십니다.
3. 창대케 되는 원리는? 나(우리)의 삶이 청결하고 정직하여야 합니다.
(6절)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깨끗한 삶이 장래를 보장한다는 말씀입니다.
(약4:8)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가까이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깨끗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니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겁니다.
(시15:1-2)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라고 합니다. 정직하고 공의롭다는 말은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깨끗한 자만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 (6절)은 앞의 (5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장래를 보장받고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기도하고 주님을 구하는 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깨끗해야 합니다.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아무리 주님을 간절하게 구해도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은 만나 주시지도 않고, 기도를 들어 주시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아무나 돌아보시고 형통케 하시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피로 깨끗케 된 자를 그리하십니다. 깨끗합시다. 그래서 축복을 받읍시다. 혹 지금은 아직 아니라도 나중에라도 창대해지는 축복을 받읍시다.
"네 의로운 집"에서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웨'는 좁게는 '양 우리'를 뜻하고, 넓게는 목자들의 거주지를 지칭하기도 하며, 여기서 '양 우리'란 특별히 하나님의 보호 하에 있는 안락한 거주지를(잠 3:33)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의로운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형통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작게는 가정이, 나아가서 학교와 교회, 넓게는 나라와 세계가 의로운 곳이 되도록 노력하는 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4. 우리가 나중에 심히 창대케 되는 원리를 위에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지요?
첫째,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나(우리)의 삶이 청결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위의 세가지를 지키는 자에게 어떠한 축복이 오게 될까요?
그것은 7절 말씀에 나옵니다.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은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이나,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 가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이 구절 하나를 새겨서 액자로 걸어두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한 구절로는 그 뜻을 잘 모릅니다.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구한 사람,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 죄를 용서받고 깨끗함을 유지해 온 사람에게 장래를 보장해 주십니다.
혹 잘못 생각하여 그럼, 그렇게만 하면 다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축복을 주느냐 안 주느냐는 것은 주님의 절대권에 속한 겁니다. 다만,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케 된다고 하시는 말씀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창대케 됨을 받은 성도 여러분!
지금의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주님의 축복을 받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려면 오늘 주신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장래를 기대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