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8
시 37:1-7,19-26
새해에는 의인답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노년에 이르러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비탄시로써 아마도 과거 다윗 자신이 수많은 핍박과 억울한 일들, 사울의 추격과 저주와 욕을 당한 일(삼하 16:5) 등을 배경으로 쓴 지혜시입니다. 다윗은 본 시를 통하여 의인이 고통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는 듯한 모순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의 섭리는 계속되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지킨 의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떤 때에는 손해를 볼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정말 억울하게 느낄 정도 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때때로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악인들이 오히려 더 잘 되고 득세하고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세금을 포탈하고 불법적으로 떼돈을 벌고, 호화롭게 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오히려 더 잘 될 때에 믿음으로 온전히 주일을 성수하며 순전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은 결코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은 말라기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말 3:14-17에서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투쟁하고 애써 보았자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들이 오히려 더 복이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입술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시대에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의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새해에는 의인답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하시는 “의인”이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점이 없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3:10에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9에서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은혜를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의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의인”이라는 말을 히브리말로 “카도쉬” 또는 “하시드”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데, [카도쉬]라는 말은 [구별된 자 곧 성도]라는 뜻이고, [하시드]라는 말은 “죄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자”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시 31:23),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시 30:4),“성도”,“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을 통하여 이러한 의인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이들을 보존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마땅히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의인답게 사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해 아무리 어렵고 어려워도 성도다움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의인답게 살지 못하면 형식적인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현재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면은 [에세네인]처럼 말씀을 왜곡시키고 경건을 가장하여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에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도면 다 성도입니까? 성도답게 살아야 성도입니다.”아무리 세상에 악인이 득세하고 악이 광풍처럼 물려온다고 할지라도 성도다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의인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이며, 의인답게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1-2절,7-8절)
1절 말씀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행악자]란 '행악자'란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 불법적인 일을 계획하고 계속 저지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불평이란 “격심하게 화를 내는 것”을 말하고, [투기]란 “질투하다 혹은 부러워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는 것은 행악자들의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무슨 해를 당할지라도 화를 내어 그들을 대항하지 말고, 불의한 자들이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일들을 행한다고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신본주의 인생관을 소유한 자들은 결코 인본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좇는 자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이 불의한 자의 일시적인 형통함을 보고 불평한다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릇된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악을 행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모습에 말려들지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세속화되고 완악하고 교만하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할지라도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참된 신자들을 남겨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것을 모르고 실망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귀에 의인 7000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악한 자들에 득세하는 세상으로 변한다고 할지라도 은혜와 믿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삶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행악자와 불의를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고, 투기한다면 극서은 공의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현실만 바라보았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것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완악한 말은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입술로 기도하고, 우리의 입술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잠 18:21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말 3:16에서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39:4에서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다 들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다 들으실 뿐 아니라 그대로 준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낙심과 어려움과 환란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입술로 범죄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고백대로 축복하시고 큰 역사 이루실줄 믿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환난을 당했지만 결코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던 것처럼(욥 1:22)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시도하지도 않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사는 성도라면 결코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불평합니까? 자기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기준,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불평,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일에 대한 이해 부족을 가진 자는 불평을 합니다. 예를 들면 탕자의 형은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인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요, 자기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행동이었습니다. 출애굽 시의 이스라엘의 불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면 결코 불평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든 일에 자기중심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즉시 반응하면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하였습니다.(출 16:7-9)
잠 19:3에서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원망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불평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방법은 빛이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평을 몰아내는 방법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매일마다 물밀듯이 몰려오는 불평을 매일매일 감사의 생활로 물리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욥은 "불평은 어리석음이요 범죄"라고 하였습니다.(욥 1:22) 그러므로 모진 풍랑이 몰아쳐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였기에 놀라운 축복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 생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빌 4:8)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을 능력자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원죄와 자범죄로 영 죽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① 악인의 형통함은 순간적이기 때문입니다.(2절) 아무리 악인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악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해지고 말 것입니다(2절) 다윗은 악인들을 가리켜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풀이란 잠시 있다 베임을 당하고, 또한 푸른 채소 역시 그 푸르름이 며칠을 못 넘기지 않습니까? 마치 아침 안개와 같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일시적인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고 사모하며, 이런 악인들의 행실을 좋아서야 되겠습니까?
② 악인의 계획은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숨어 의인을 치러 하지만 그 계획은 허망하여지고 맙니다.(12-13절)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길지라도 그 칼과 활은 결국 자신의 심장을 겨누게 됩니다(14-15절)
③ 악인은 잠시 잠깐 후면 반드시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대에 앞에서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결코 불평, 불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2. 선을 행해야 합니다.(3절 상)
본문 3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을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행하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면 결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의뢰하다”라는 말은 “...에게 매달리다”(cling to)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말은 “선을 행하되 여호와께 매어달린 상태로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본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 중에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그것을 미룬다면 그것은 은혜 받은 자의 행동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 4:17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땅히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일을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성도가 선을 행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보상에 있고, 선을 행하는 능력은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선을 행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갈 6:10)
3. 성실로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3절 하)
본문 3절 하반 절에서 "...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성실을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의 “성실”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안전, 보호”를 뜻하지만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사 그에 따른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실로 식물로 삼으라”는 말씀은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성실된 보상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라고 말씀입니다. 진리로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에 대하여 성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라면 마땅히 우리 자신도 성실해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려면 성실이 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라면 힘들다고, 어렵다고, 기분 나쁘다고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여 감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그 기쁨을 하나님께 대한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성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번에는 내가 성실해져야지”라고 결심해 보지만 성실함이 습성화되어 있지 아니하면 곧 실패로 돌아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늘 부족한 것이 성실입니다. 시31:23절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자를 보호하십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꿈을 지닌 소년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의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서 모함을 받아 옥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고 끝까지 낙심과 불평을 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성실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자리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하나님께 성실한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성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불평하지 말고 모든 일에 인내와 성실을 그 음식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조급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엽송 같은 나무는 10-15년 생만 되어도 잘라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잣나무 같은 나무는 30-40년 더 키웁니다. 그런데 만일 잣나무가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잘 몰라서 생기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잣나무는 더 좋은 재목으로 쓰려고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엽송은 당장 급하게 사용하게 될 재목이 필요해서 잘라 쓰는 것 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의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는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십니다.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얻어라”는 교훈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만남이 기쁘고, 하나님과의 사귐 자체가 즐거워는 사람들은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 발 앞에서 말씀 듣고 그분과 진정한 사귐을 갖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꼈던 마리아의 심정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의 최상의 방법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신령한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래서 시 100:2에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시 66:10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때때로 눈물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시 126:5-6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절에서도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되기 원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①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읽는 중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항상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의 대화니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③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④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⑤ 영적인 해산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전도해야 합니다. 삼상 2:7절에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높아지는 비결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신앙이 귀한 신앙입니다.
본문 5-6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기의 “너의 길”이란 “인생 전체의 여정 뿐만 아니라 삶의 계획, 목표, 방법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맡기라”는 것은 “돌을 굴려버리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은 인생의 계획을 자신이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큰 돌을 산에서 지고 내려가지 않고 굴려서 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것처럼 그러면 반드시 어렵게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피할 길을 예비 받으면서 갈 길을 지도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결을 깨달은 솔로몬은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나약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이 제시하시는 삶의 인도를 순종하여 좇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그분께 여러분의 앞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그만큼 고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때 누구의 뜻에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리인생을 우연에 맡기려고 하지 마세요. 점쟁이나 사주팔자에 맡기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16:3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 사도도 벧전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서 하십니다.(잠29:26)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고 나의 소원을 맡기면 그분께서 책임지십니다. 맡긴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이요, 신뢰는 곧 신앙입니다.
야곱이 인생 전반부는 자기 뜻대로 행할 때의 실패요, 하나님께 맡긴 후반부의 인생은 성공이었습니다.
인생을 창조하신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주 공간을 지금도 경영하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리하기면 하면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악 간에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밝혀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승리하고 복을 받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그것은 정오의 빛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혹시 악인들 앞에서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도가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할 때에 주님은 그것을 해결하여 주십니다.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악한 자들의 횡포에도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잠하고”라는 말씀은 침묵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 하거나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강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의의 보응을 믿는 가운데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김으로 심령의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기다리라”라는 말은 “시선을 집중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바라보고자 자신의 내면의 생각을 한 곳에 집중 시키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역경이 휘몰아쳐 와도 동요하지 말고 참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견디면 마침내 승리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욥은 필승의 때를 알고 참아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 중첩하고,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12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연기처럼 없어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악인이 득세 하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괴롭힘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어떤 복을 주십니까?
19절에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근 때에도 풍족한 복을 받습니다. 의인은 환난이나 기근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상실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눈을 향하고 계십니다. 성도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성도를 넘어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환난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합니다.
여기 '의인'은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죄로부터의 구원을 입은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의인들이 기근 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은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이삭은 심한 기근의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랄 땅에 거하면서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창26:12-13). 이것은 이삭이 농사 기술이 탁월해서 얻은 소득이 아닙니다. 큰 흉년을 만났지만 의인에게 베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백배의 축복을 얻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축복이 성도 여러분들 가정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별한 축복이 있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는 있는 곳이 광야든, 흉년의 장소든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자 하는 성도를 어떤 환경이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합 왕 시대에 비가 오지 않는 하나님의 재앙의 날에도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어김없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제공하셨습니다(왕상17:6).
하나님은 까마귀를 동원시켜서라도 하나님의 일군을 먹이시는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한끼의 양식만 남겨 둔 체 이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사르밧 과부의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사르밧 과부에게 흉년이 지나기까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왕상17:10-16).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의인들에게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게 하셨습니다. 경제 기근 속에서도 이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갈 길을 미리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함으로 그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실 때 반드시 평탄한 길만을 제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릴 때에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 등극하기까지는 오랜 피난 생활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고, 실족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평탄하고 형통한 길만을 열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평탄하든, 그 길이 좁고 협착하든 그 길이 하나님이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하신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영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데 성도는 그 길을 가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에 때로는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자기의 길을 계속 가게 됩니다. 여기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땅에 몸이 닿을 정도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24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길을 정하셨든지 그 길을 감사함으로 걷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은 자손까지 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여정 속에 하나님이 의인을 어떻게 다루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 구절로 보아 이 시편은 다윗의 인생이 황혼을 맞은 때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나이가 들은 이 시점에서도 의인은 결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의인이 받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손은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 10장 3절에도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의인들의 후손이 복을 받는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출20:6, 신5:10).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왜 의인의 자손이 복을 받습니까? 그 이유는 26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역시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이 기근 때에도 풍족하게 하심으로 움켜쥐는 자가 아니라 베푸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만을 위해서 물질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나보다 못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펴야 합니다. 역시 이런 성도들의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하나님께 심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자식을 위한 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근 때에도 풍족한 복을 받는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길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고 오늘도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은 완전 넘어짐이 없습니다. 성도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이 나를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장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교회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가는 성도와 그의 자손이 망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의 백화점 왕인 ?죤 와너 메이커?는 가난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헌금하는 교인이 되게 하소서!"라고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의인답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셨는데,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는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새해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① 불평하지 맙시다.
② 선을 행해야 합니다.
③ 성실로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
④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깁시다.
⑥ 끝까지 참고 기다립시다. 그리하면 새해에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는데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시는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