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8
마태복음 8:18-22
비엔나 의과대학에 이러한 재미있 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유명한 외과 의사이면서 교수가 되는 분이 의과대학을 지망 해서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을 앞에 놓고 첫 번째 강의를 하게 됐습니 다. 첫 번 강의에 들어 온 이 학생 들은 저으기 긴장한 가운데 교수님 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교 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은 이 제부터 책임 있는 훌륭한 외과 의사 가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 다.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려면 적 어도 중요한 두 가지 자질이 갖추어 져야 됩니다."
모두가 심각한 얼굴 로 교수를 쳐다보며 경청했습니다.
"첫째는 역겨운 냄새와 더러운 분비 물과 썩은 고름 같은 것에 익숙해져 야 합니다."
참 끔찍하지만은 외과 의사는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학생 들 전부가 인정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야 합 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교 수는 더러운, 냄새 나는, 고름이 담 긴 그릇에 자기 손가락을 푹 담갔다 가 꺼내서 입으로 핥았습니다. 그 리고 나와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앞 으로 나오라고. 역겹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은 여기다가 운명을 걸었기 에 그러해야 될 거라고 생각해서 학 생들은 하나씩하나씩 나와서 그 더 러운 곳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핥게 됩니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 교수 님께서 평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첫째 자질에 대해서는 아주 우수하 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째 자질에 대해서는 형편이 없습니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교수 님은 말하기를
"나는 이 더러운 곳 에 넣었던 손가락은 말고 다른 손가 락을 빤 겁니다. 당신들은 그걸 못 보았습니다."
여러분 제자란 무엇 입니까? 제자란 전적으로 선생님께 헌신하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깊 은 관찰력이 함께 가야됩니다. 물 리적으로 행할 수는 있습니다, 형식 적으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같이 한 평생 따라다닐 수도 있습니다, 같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뜻, 스승의 마음, 스승의 그 깊은 의 지를 잘 읽어야 됩니다. 그의 하시 는 일을 깊이 관찰해야 됩니다. 그 리고 저 분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를 알고 그 뜻, 그 깊은 의미에 동 참해야지요. 이에 함께 할 때 비로 소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줄렁줄렁 따라다닌다고 제자입니까? 그의 뜻 을 알고 깨달아야지요. 그래서 예 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첫째 별명이 제자입니다. 복음서에 보는 대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다녔습니 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 님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 없고 심지 어는 열두제자마저도 그 당시에는 이 복음서에서 보는 대로 그렇게 깊 이 이해하지 못하고 따랐다는데 문 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한 별명이 성도 라고 하는 말입니다. 거룩한 무리, 이것은 선택받은 자의 무리를 의미 하는데 대단히 신학적인 깊은 의미 가 있습니다 만은 일단 예수를 믿 고, 이 속된 세상에서 떠나서 그리 스도를 왕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모 시면서 구별된, 선택된 공동체의 여 기에 일원이 될 때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이름을 합니다. 지극히 교회 론적 의미가 있는 그런 별명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 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크리스치아누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중요한 말 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만 따르고,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 스도를 위하여 죽기로 맹세한 사람 들입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들, 이래서 초대교회 에서는
"새 술에 취한 자다"
그랬습 니다. 새 술에 취했다. 이 초 이성 적이에요.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가 어려울 정도로 전적으로 주님께 위탁한 생을 사는 그런 사람들을 크 리스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의 영에 이끌린 사람들입니다. 그 래서 로마서 8장 9절에 사도바울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 니다."
이건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 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어 서, 그 영이 내 영을 지배하고, 내 이성을 지배하고, 내 몸을 지배하고, 내 감성을 지배하고, 그리고 그리스 도의 생명력에 이끌리어 사는 그 사 람, 그 사람을 크리스챤,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그리스도인 에 몇 가지 유형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오 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마 음을 읽으셨던 거 같아요. 딱 보자 마자 이 사람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다 알고 읽 으시고 그리고 적당하게, 그에 합당 하게 말씀을 하셨던 것같이 느껴집 니다. 마태복음 9장 9절에 보면요, 세관에 앉은 세리 마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이 마태복음의 저 자입니다. 이 사람은 세관에 앉은 세리입니다. 어떤 인연이든 간에 상관없습니다. 지금 현재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고 있습니다. 그 세관 앞을 지나가시면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딱 보고, 보는 순간 눈과 눈 이 마주쳤겠지요. 눈과 눈이 마주 치는 순간 그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가 지금 얼마나 고민하고 있으며, 그가 얼마나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 리고 있는가, 그가 얼마나 신앙적으 로 주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딱 한마디
"너는 나를 쫓으 라."
그 한마디에
"네"
하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그날 당장 자기 집을 열어서 많은 세리들을 데려다 놓고,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초대하게 됩니다. 그 후 로 한 평생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어떻습니까? 긴 얘기가 필요합니 까? 예수님은 그 깊은 마음을 읽었 어요. 그리고
"나를 좇으라"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조금 얘기 가 다릅니다. 서기관이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주여 어디로 가시 든지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자원 자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여기서 보면 간접적으로 거 절합니다. 직접적인 거절은 아닙니 다. 이제 선택은 이 사람에게 달렸 습니다. 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예 수님께서 아마 그랬던 거 같아요. 이 사람이 부잣집 아들에다가 고생 없이 자랐고, 뭐 편안하게 자랐고, 도대체가 고생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다만 예수님을 따라가면 출세할 거 같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뭔가 화려한 미래가 있을 것같이 생 각해서 지금 청운의 꿈을 꾸고 예수 를 따르겠다고 하시는 것으로 그렇 게 예수님은 저의 마음을 읽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공중 의 새도 거처가 있고 또 그렇지만은 여우도 굴이 있다. 그러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게 뭡니까? 나는 가난하다. 나를 따라오면 고 생할 것이다. 나는 집이 없는 사람 이다. 오늘 밤 당장 어디에서 자야 할 지 그것도 정함이 없는 그런 사 람이다. 자 이 말끝에 이 서기관이
"주여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디 로 가시든지 따를 겁니다"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만은 고 다음 에는 말이 없어요. 아마 그저 그렇 게 생각하고 그저 돌아갔던 것 같습 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헌신은 하겠다고 하지만은 예수가 누구신지, 그가 어 디로 가고 있는지 관찰하지 못했습 니다. 몸으로서는 따르겠다고 하나 마음으로서는 전혀 따를 준비가 없 습니다. 플러머(Plummer)라고 하 는 유명한 분은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남 의 마구간을 빌려서 세상에 태어났 고, 남의 무덤을 빌려서 생을 끝냈 다."
참 그렇습니다. 세상에 용납 할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 태어납니 다. 예수님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남의 마구간이에요. 예수님 장례 되었지만은 장례 때, 그 무덤이 아 리마데 요셉의 무덤입니다. 자기 무덤이 아닙니다. 잠시 빌린 거지 만은 남의 무덤에 장례 되었었습니 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에게 이 적이 있고, 인기가 있고, 명예가 있 고, 화려한 많은 사람들의 성원이 있는 것을 알고 이 사람은 예수를 따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여러분, 이제 중요한 문 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히 예 수님에겐 이적이 있었습니다. 병을 고쳤고, 바다를 고요하게 했고,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만은 이적의 사 람이나 그는 가난했습니다. 자 생 각해 보세요. 문둥병을 고쳤다, 중 풍병 환자를 일으켰다, 이런 거 하 나만 가지고도 요새 비즈니스마인드 로 생각하면 그 돈벌이 되는 거 아 니에요. 이 많은 환자들이, 아니 조 금씩만 갖다가 사례를 해도 예수님 머리 둘 곳이 없다고까지 하실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히 기적의 사람이었어요. 확실하게 이적의 사람이었지 만은 그는 가난 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신비가 있는 것이에 요. 예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 말씀하셨고, 지혜로 율법을 해석했고, 이 지혜에 대해서는 예수 님을 박해하는 원수들까지도 깜짝깜 짝 놀랐어요. 예수는 확실히 지혜 로운 분이고 지혜를 말씀하는 분이 요.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배척받았 습니다. 결국은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지혜에 대하여 감탄 하면서도 예수를 핍박했습니다. 그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도 예수는 배 척 당하는 그런 생을 살게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권능입니 다.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 거는 확실히 인정을 했습니다. 그 러나 그는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거는 크나큰 수수께끼입니다. 그 래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도 하는 말이
"뛰어 내리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
하지 않습니까. 죽은지 나 흘이나 된 나사로를 며칠 전에 살리 신 당신이 왜 말없이 죽어 가느냐는 거지요. 빌라도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 사람을 보라"
이렇 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 는 분이다. 내가 알기로는 굉장한 능력을 가진 분인데 왜 말 한마디 없이, 한마디 반항 없이 이대로 십 자가에 죽어 가느냐는 거죠. 우리 는 능력이 없어서 당하고, 할 수 없 어서 고난을 당합니다 만은 예수님 의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능 력도 있고 지혜도 있어요. 그러나 십자가를 졌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능력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신비로운 것, 이 서 기관은 알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누구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 다. 이것을 알아야지요. 오늘도 마 찬가지입니다. 자 이 서기관은 모 름지기 예수님의 그 화려한 인기만 보고, 그 지혜만 듣고 감탄하면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은 오래갈 수가 없고요, 또 하나는 예수를 따르는데 대한 대 가를 지불할 생각을 못했어요. 값 싼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요새도 보면 예수를 믿으면서 싸구려 은혜 를 구하는 분들이 많아요. 가지고 있는 것에 또 은혜, 또 정당화, 또 합리화, 그리고 더 큰 물질적, 세상 적 축복만을 기다리는 이런 답답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걸 분명히 알아야 합 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버 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로 영접하기 위해선 끊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위해서, 이 귀중한 일을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 를 져야됩니다. 마땅한 값을 지불 해야 되는데, 이 값을 지불함이 없 이, 이 각오가 없이 주를 따르겠다 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란 말이예 요. 또 하나는 여기 있습니다. 그 래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 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 를 쫓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너무 쉽게, 빨리 결정한 것 같아요. 이건 감정적입니다. 깊은 생각도, 깊은 결단도 없이 마치 돌 짝밭에 뿌려진 씨와 같이 급하게 나 서 급하게 자라지만 이런 결심은 곧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예수님은 알 고 계시기에 이 사람, 제자 되겠다 는 것을 사양하셨습니다. 즉흥적이 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은 아니요. 또 다시 그 다음에 말씀이 이어집니다. 또 한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따르겠 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조금은 달라 요. 따르기는 따르겠다고 하는데
"부모님을 장례하고 나서 따르겠습 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 연기 신청해 달라는 거죠.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니라고,
"죽은 자는 죽 은 자로 장례케하고 너는 나를 쫓으 라"
말씀하십니다. 아주 박절한 말 씀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엄청 난 진리가 있습니다. Priority가 문 제입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 엇이 더 중요한 가를 알아야합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여러 가지 일 중에 선과 악 이 있습니다. 물론 선을 따라야겠 죠. 같은 선 중에도 무엇이 더 우 선적인 선이냐, 그것이 문제죠. 절 대 우선,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 기 위해서 우리는 부득불 그 차선, 그 다음 일은 버려야 된다는 것이 죠. 절대 우선! 예수님을 따른다 는 것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 이에요. 또 하나, 그것이 근본적이 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미룬다고 하 는 것은 그것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 지입니다. 아프리카에 한 청년이 하도 똑똑해서 영국에서 생각할 때, 저 사람을 키워 가지고 아프리카를 앞으로 개발하는데 크게 쓰여질 수 인물이다 하고 생각을 해서 이 사람 에게 장학금을 줬습니다. 장학금 주는 통지를 보내고 속히 와서 옥스 퍼드대학에 와서 공부하시라고 했더 니 이 사람이 Scholarship에 대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가겠습니다. 공 부하러 가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하 고는 하는 말이 거기에 주가 달렸어 요.
"부모님 세상 떠난 다음에 가 겠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다 시 또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부모 님 나이가 지금 얼마입니까?"
그랬 더니
"지금 40입니다"그러더래요. 이 사람 갈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저는 신문에 그런 게 난 걸 보 고, 그 신문에서는 그것을 마치 무 슨 한국적인, 참 지극한 효자인 것 처럼 써 놓은 것을 보고 제 마음이 별로 좋질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 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산에 가서 3년동안 묘살이를 했다는 거 죠. 그래서, 그래 어쩌란 말이요? 이래서 말씀하는 거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케하고 너는 나를 쫓 으라. 그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아 서 못 다한 소원을 내가 나가서 이 룰 생각을 해야지, 그래 묘지 앞에 3년동안 엎드려 있다고 효자더냐고 요.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밖에 못 하니까. 효도가 그것입니까? 저도 절박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 아 버님이 내 앞에 목전에서 총살을 당 했습니다. 북한에서. 멀리서 난 누 군지 모르고 봤는데 마음이 좀 이상 해요. 그러고 총 쏴버리고 그냥 가 버렸어요. 그 다음에 제가 막 달려 갔어요. 좀 어두워질 때 달려가 봤 더니 제 아버님이 거기 쓰러져 있어 요. 다른 분 두 분과 함께. 거기 엎드려서 울고 있습니다마는 저의 아버님이 막 살아서 말씀하는 것 같 아요.
"이놈아 살아야 효자다"그러 더라고요.
"여기 엎드려 있다가 너도 죽을 거냐? 살아야 효자다"
그랬어요. 벌떡 일어나서 도망을 했어요. 그리고 한달 후에야 집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거기 엎드려 있어야 효자입니까? 아버지 시체를 보고 도망가? 이 불 효자식!, 그겁니까? 어떻게 하는 게 효자입니까? 효가 뭡니까? 그걸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자기 나약성을 알아야됩니다. 이렇 게 한번 미루어 놓으면은 미룬 일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당장 결단을 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기 일 자기를 다 알잖아요. 일을 미루다 보면은 못하게 되거든요. 우스운 얘기입니다 마는 언젠가 손 녀 아이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와 서 놀다가, 아 부모님하고 같이 와 서 놀다가 저녁에 부모님들이
"가 자"
그러니까
"나 오늘 할머니하고 잘래."
떨어졌어요. 그리고 부모님 은 집으로 갔지요. 애가 한잠 자고 나서 깨더니만 앙앙 우는데 엄마 찾 고 우는데 정신없어요. 할 수 없이 제가 차에 태워서 데려다줬어요. 얼마 후에 집에 와서 놀더니 또
"할 머니하고 자고 잘래"
그랬어요.
"애야 내가 너를 믿을 수 있냐?"
했 더니 이 녀석 하는 말이
"할아버지, 나도 나를 못 믿어요"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을 믿습니까? 그래 내일 하겠다고? 얼마 후에 하겠다 고? 그것은 믿을 수 있느냐고? 지금 당장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개 보니까 그렇드만요. 돈 벌어서 헌금하겠다는 사람, 헌금 하는 사람 못 봤어요. 얼마가 됐든 지 지금 딱 잘라서 내려면 내고, 말 려면 말지, 제가 40년 동안 속았는 데 안되더라고요. 밤낮 벌어 가지 고 뭘 한다지, 하긴 뭘해? 쓸데없 는 소리.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을 해야지요. 너는 나를 쫓으라. 직선적으로. 지금 금방. 이런 얘기 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 다.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예 수와 함께 영광을 누립니다. 예수 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부활합 니다. 근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와 함께 고난받는 것은 내가 할 일이요, 예수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사입 니다. 그쪽은 생각하지 마세요. 예 수와 함께 고난 당하고 보다 더 많 이 고난 당하고 보다 더 철저하게 고난 당하는 것. 이것만 내가 할 일이요.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 세요. 그런고로 지금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지금 쫓으라. 기도하십 시다.
출처/ 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