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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5-8
요즘 TV드라마 뭘 보십니까? 저는「주몽」을 봅니다. 시청율이 50%가 넘는다지요? 대단한 관심입니다. 이 드라마에 대해 중국정부에서도 관심을 갖는 모양입니다. 아니 관심을 넘어 내용에 간섭을 하고는 반영취소를 요구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억지인게지요. 중국의 입장에서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고구려사(史)가 그들의 동북공정정책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사왜곡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아무튼 동명성왕이라 불리는 주몽은 리더십이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적 주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겁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가 위대한 영웅이 된 배경에는 어머니 유화부인의 영향이 컷습니다. 주몽은 어렸을 적부터 끊임없이 어머니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너는 이뤄야할 대업이 있다. 아버지 해모수 장군이 이루지 못한 조선의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 이 말이 아들의 인생을 지배합니다. 결국 어머니의 이 말은 연약한 아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이말을 마음에 새기면서 설움의 눈물을 삼켰고 분노를 삭이며 좌절을 극복하고 원수를 품습니다.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지금쯤 장면들이 척척 넘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몽을 지배한 것은 그의 어머니요, 어머니의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은 아들의 비전이 되었고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승패는 그 사람의 마음이 무엇에 지배를 받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생각이 인생을 가꾸고 생각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뿌려져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 삼성만큼 국민들의 기대와 비판을 함께 받는 기업도 없을 것입니다. 삼성만한 기업하나만 더 있어도 국민소득 3만달러 달성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소위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에서 보듯 삼성이라는 기업권력에 대한 비판도 큽니다. 이는 우리 한국사회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존재감이 너무 커서 오히려 지나친 기대와 비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평등주의적 사고가 강한 우리 사회분위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배고픈 것은 잘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참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삼성의 일등주의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나라에 삼성이라는 기업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삼성의 중심에 이건희회장이 있습니다. 올해는 그가 섬성그룹회장으로 취임한지 20년이 됩니다. 그동안 이 회장은 중요한 고비 때마다 새로운 화두로 경영의 방향을 제시해 왔을 뿐 아니라 그의 말은 우리사회에도 중요한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취임이래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강조해 왔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93년에 역설한 ‘신경영’입니다. ‘처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말로 요약되고 있는 ‘신경영’은 오늘의 삼성을 만들어낸 원천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뒤로 준비경영, 천재경영, 나눔경영 그리고 최근 삼성의 화두는 ‘창조경영’입니다.
이회장의 얘기인즉 그렇습니다. 20세기와 21세기 경영은 다르다는 겁니다. 20세기에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됐지만 지금은 품질에 별 차이가 없으므로 21세기에는 우수한 인재, 디자인, 마케팅, 적극적인 R&D투자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 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제 사람들은 삼성의 ‘창조경영’에 몰고 올 변화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희 회장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꿈꾸고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 성공이냐는 것입니다. 성공의 목적이 뭐냐는 것입니다. 성공을 가지고 뭘하겠다는 것이냐는 겁니다. 무조건 1등하는 것, 많은 돈을 버는 것, 누구를 이겨 보고 싶다. 세상을 호령해 보고 싶은 것은 결코 바른 목적도 목표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 아이들 중 아빠가 삼성에 다니는 자녀들의 꿈은 삼성사장이나 화장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죠. 그러나 그기에 머물러선 안됩니다. 그러므로 내 생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아도 될, 영원히 궤도수정하지 않아도 좋을 확고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왜, 어디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게 있어서 성공은 무엇인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성취했다고 하여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이는 성취했으나 돈의 노예가 되고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어떤이는 성취 이후에 더 오만해 집니다. 급기야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유치한 사람이 생각하는 성공은 돈과 권세와 명예가 어느 정도인가에 둡니다만 진정한 성공은 공익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인가에 완전히 붙들려 사는 것이 좋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의 노예냐는 것이다.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면 인간의 노예요, 정신적 본원 그것의 노예가 되면 신의 노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지, 나의 궁극적인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공의 방법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합당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성공을 원하는 우리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인생 경영 지침을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이 말씀속에는 인생 경영에 대한 아주 분명한 지침이 있습니다. 가지의 생존여부는 나무에 붙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지가 나무에서 끊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곧 말라버립니다. 성장도 못합니다. 추위도 더위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해마다 봄을 맞으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의 가지 끝이 움돋는 것을 보십시오. 아무런 보호를 해준 것이 없음에도 그 가느다란 가지는 얼어 죽지 않고 생명을 움티웁니다. 이유는 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무와 가지는 절대적인 관계요, 생명적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가진 돈으로, 경험으로, 지식으로, 빽으로 다 되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끊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할 수 없습니다.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살 궁리를 찾겠지만 이미 바른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 서리 힘 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으니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고백하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잠시 동안만 끊어져 있어도 끝이 나는 것처럼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이처럼 절대적이요 생명적 관계로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뿌리요, 나는 그 힘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관념적으로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영이신 주님께 붙어 있고 그안에 거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내 마음안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없이 우리는 절대로 주님을 알 수도 사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거하게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다음 두 가지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이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야 합니다.
말씀이 귀에 들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게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뉴욕 총영사로 있는 문봉주장로는 평신도로서 성경을 탁월하게 가르치는 유명한 성경선생입니다. 그는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교민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는데 1,00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불교계의 반발로 중단되어 화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성경에 빠지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태신앙인이셨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42년간을 교회 다녔습니다. 어느 주일아침 전날 밤에 늦도록 술을 마신 상태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찬송을 부르는데 술냄새가 나서 주변 사람들을 아주 곤란하게 한 적이 있었답니다. 부인이 입을 틀어막으면서 하는 말이 ‘집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날로 술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고 대신 손에 성경을 들었습니다. 외교관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생애 처음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열심을 내던 중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하고 항암과 방사선을 하는 동안 절망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가 붙잡을 것은 성경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소위 성령에 눈이 뜨여지게 되었고 성경구절들은 속속 외워졌고 성경의 맥이 보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이, 술 담배에 빠져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하여 성경선생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붙들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셨고 말씀을 사모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하나님말씀으로 들려지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랑해야하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사랑하면 깨닫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되어 있습니다. 칼바르트는 ‘보고 싶은 것이 사링이다’고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또 보고 싶고, 멀리 있으면 한없이 보고 싶고, 그 목소리를 듣고 싶고 끝도없이 또 듣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는게 되면 우리 마음에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눈으로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을 말씀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말씀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알기를 원치 않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과 사랑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우리 마음에 품을 때 그 말씀이 우리 존재의 한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우리의 언어와 행동, 인격과 습관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존재에 진리가 가득차게 되면 그 결과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요. 소위 형통했다고 하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분명히 예배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했을 때일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시1:1-3에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말씀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늘 생각이 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들을 뿐만 아니라 긍정합니다. 들으면서 감동합니다. 전적으로 수긍합니다. 반론이 없습니다. 그의 말이라면 다 옳고 다 좋습니다. 그래서 다 들어 줍니다. 그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결혼한 어느 형제자매를 결혼하기 전 상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형제에게 어떻게 사랑해 줄거냐고 물었더니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잡혀 살겁니다” ‘그거 잘 생각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사랑이 뭔지 아는 형제예요.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상대의 모든 것을 다 긍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 때 ‘그건 말도 안돼’하고 잘라 버리고 자기 주장만 내세운다면 그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저 그의 모든 것이 이쁘기만 해요. 설혹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그냥 따르고 싶어요. 납득이 안돼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냥 져주고 싶어요. 그런데 늘 이기려 하고 단점만 보이고 버릇은 고쳐줘야겠다고 하는 건 사랑의 마음은 아닌게죠.
왜 부부싸움을 하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옳고 그 사람을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밤 낮 자신이 옳고, 죽을 때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없이 산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며 순종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내 입맛에 맞추지 않고 그의 입맛에 맞춥니다. 내 삶의 모든 기준을 그에게 맞추게 돼요.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받아들입니다. 하나님말씀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때로 이해가 안되고 부담이 되어도 나의 무지한 탓으로 돌리고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여호수아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콩나물과 콩나무의 차이를 아십니까? 아시다시피 콩나물과 콩나무는 모두 콩을 씨앗으로 하여 자랍니다. 처음에는 똑같은 콩이지만 콩을 쥔 사람의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콩나물이 되기도 하고 콩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의 콩으로 한줄기의 콩나물을 놓아먹는가 하면 어떤 이는 동일한 콩으로 콩나무를 키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똑같이 성경을 갖고는 있지만 성경관이 어떠냐에 따라 두 사람의 운명은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을 그냥 ‘좋은 말’로 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는 것은 콩나물과 콩나무의 차이는 비교되지 않을 실로 인생의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운명을 겁니다. 인생의 승패는 마음에 무엇을 심느냐, 무엇에 지배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며 하나님은 말씀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말씀이 지배, 나를 이긴다. 그기에 구원의 역사가 있고 능력이 있고 권력이 있고 부흥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말씀안에서 구체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출처/국제기독신문사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