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3
마 26:57-68
오늘부터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지내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이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당한 고난이 특별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여러 가지 입니다.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로 당하는 고난이 많습니다.
즉 가난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질병으로 인한 고난도 있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사고로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사고 없이 하루를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루에도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에도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보면, 하루하루를 무사고, 무병으로 건강하게 지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고난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삶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당한 그런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은 특별한 고난입니다.
1. 주님이 당한 고난은 대속(代贖)의 고난이었습니다.
대속(代贖)의 고난이란 대신 받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받지 않을 고난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그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두 자기와 관계되는 고난입니다.
가끔 남의 잘못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도 있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데 와서 들이받아 내를 다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통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이라도 그것은 그 한 사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모든 인류의 범한 죄와 관계된 고난입니다. 즉 한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당한 고난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고, 주님의 당한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낳음을 입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5)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다시 되 색이면서 세상과 깊이 짝했던 생활에서 다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으로 되돌아서야 하겠습니다.
2. 먼저 주님이 당한 고난은 불의 한 재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재판처럼 불의 한 재판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미리 각본에 의하여 짜여진 요식 행위의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벌써 죽이기로 마음먹고 재판하는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과 같은 그러한 재판을 일컬어 빌라도 법정의 재판이라고 하는 말이 생겼습니다.
과거 민주화 투쟁을 하던 시대에 이렇게 짜여진 재판을 받아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런 경우가 없다고 누가 단정하겠습니까?
세상의 불 의한 정권은 언제나 그 권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빌라도의 재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도 지구촌 어디에서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경우들이 모두다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법정의 판결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제사장과 로마인의 총독에게 끌려 다니면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먼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갔습니다. 이것도 절차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대제사장의 장인에게 먼저 예수를 끌고 가도록 했겠습니까? 그만큼 원로 안나스의 입김이 강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숨어서 말한 일이 없고 공중 앞에서 들어내 놓고 하였으니, 내게서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옆에 있던 안나스의 부하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면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불손하게 답 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실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누구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말하던 자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지칭하였는가?
두말할 것 없이 나사렛 예수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자이었습니다.
재판할 것도 없이 그는 예수를 로마관청으로 넘겼습니다.
로마 관청으로 끌고 가게 한 것은 유대인에게는 사형 권이 없음으로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판결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죽을 죄인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민심을 의식하여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이 사람의 피와 상관이 없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책임을 넘겨 버렸습니다.
뻔히 죽을 죄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좌의 유지를 위하여 비겁하게 빌라도는 예수를 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빌라도의 법정은 불법의 법정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매번 예배시 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라는 말을 듣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일입니까? 그러기에 권력의 책임의 자리가 그렇게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불의 한 재판으로 인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을 재판한 법정은 거짓이 진리를 죽이기로 한 불의 한 재판이었습니다.
정식 재판의 절차도 없이 일사천리로 죽이도록 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은 갖은 모욕과 천대를 다 받으면서 사형 틀을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고난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직도 북한의 인민재판을 본 사람들이라면 예수 님의 재판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고는 인민의 이름으로, 공개 처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님이 당했던 불의 한 재판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재판을 우리 주님이 먼저 당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받으면, 주님과 함께 면류관을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의 행렬에서 우리는 불의 한 재판의 희생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참고이길 수 있었던 것은 불의 한 세력은 반드시 꺾어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을 보면, 로마의 세력 앞에 힘없이 죽어간 예수 님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자신의 죽음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것을 위하여 내가 세상에 왔다고 여러 번 말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였고,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요10:11).
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요12:24).
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요16:5-7).
이렇게 주님은 자기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고난임을 제자들에게 때마다 순간마다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십자가 없는 영광만 바라보면서 그를 따랐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속죄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당한 고난은 이렇게 대속의 고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심판했던 불의 한 세력들은 지금도 잔존해 있습니다.
주님을 사형에 처했던 로마의 창검은 지금도 그 위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만이 승리의 월계관을 쓸 것입니다.
<네로> 황제의 명령 한마디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야 했고,
십자가의 못박는 로마의 군인들의 당당했던 모습 앞에 우리 주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라했지만, 오늘 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위력은 총검의 위력보다 더 강합니다.
영국의 아프리카 탐험가 중 두 명의 탐험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실 로이드>이고,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 리빙스톤>입니다.
<로드>는 남아프리카에서 소위 황금전쟁(Boer War)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을 벌어들임으로써 당시 영국의 훈장과 애국자 칭호를 받았습니다.
반면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제도와 영국의 침략정책을 반대하고 식민지 압제 정치를 비판하면서 싸워 그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조국의 반역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로드>는 무덤조차 없지만, <리빙스톤>은 영국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많은 방문객이 지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의 차이를 낳게 하였습니까?
하나는 총칼의 힘으로 정복하고 빼앗았지만, 다른 하나는 대신 고난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희생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렇게 대속의 고난은 위대한 결과를 낳게 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묻히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 주님의 고난은 한 알의 밀 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형벌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낳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의 삶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옛 구습을 좇아 살던 생활은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주님으로 옷 입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의의 옷으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의 행위로는 모두 죽을 존재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사람의 신분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 끝날 까지 동행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