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3
마태복음 15:21-32
논지 : 십자가를 지는 삶은 죄사함과 생명구원과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온다.
가. 피곤하신 예수님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우리가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기념하는데, 그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받고, 환영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역의 결정적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고난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그 십자가를 지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점점 다가갈 때마다 제자들은 점점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 선생을 돈 주고 팔아 넘기는 배신을 하고 멀어져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 당할 때에 아예 십자가 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그 전에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재판정까지는 갔으나, 그곳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고 떠났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있을 때에 그 고통을 겪고 고민하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돕기는커녕 다 떠나갔습니다. 3년 동안이나 양육하고 훈련시켰는데, 십자가를 앞두고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2.
다른 한편으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니까 그것을 시기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그 음모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배신하는 사람도 생기는 등 여러 가지 여건들이 잘 들어 맞았습니다. 그들은 명절을 다 마치기 전에 속전속결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기 때문에 모든 불법적인 방법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거짓 증거로 함정에 빠뜨렸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이든지 혹은 세상의 법이든지, 법에 따라서 사람을 죽이든지 처벌을 해야 하는데, 법관은 간데없이 여러 가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갔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 주님께서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3.
그렇게 해서 우리 주님은 로마 총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 총독은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법의 나라입니다. 로마라는 나라는 법이 잘 정비되어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정부의 관리는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서 정의를 세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로마 총독은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의를 세우기 보다는 자기의 정치적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죽는 것은 대단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사람 때문에 소요를 일으켜서 자기의 정치적 위치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없는 한 사람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주었습니다.
로마 총독으로부터 예수님을 건네 받은 로마 군인들은 잔인한 살인 기계였습니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사람과 맹수가 싸워서 피를 흘리고 죽는 것을 오락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대화거리가 있다면 무수한 전쟁터에서 얼마나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대화거리이고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잔인한 살인 기계인 로마 군인들에게 죄없는 한 사람이 넘겨졌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는 심심하던 차에 놀잇감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을 혹독하게 고문했습니다. 채찍질 했습니다. 그 당시 채찍은 아홉 갈래로 갈라진 것이었는데, 가죽 줄의 끝에는 동물의 뼈 조각이나, 납 조각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채찍으로 사람을 치면, 몸이 찢어지고, 살점이 묻어나고 피가 튀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즐겼습니다.
또 그들은 죄없는 한 사람을 희롱했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었습니다. 불규칙하게 솟아있는 가시가 머리 곳곳을 파고들어서 살갗을 찢었습니다. 그 머리를 갈대로 때린 것이지요.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고 침을 뱉으면서 모욕했습니다. 이러한 온갖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문으로 인해 예수님은 기진맥진해서 쓰러졌습니다. 온갖 모욕을 당하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마음이 지쳤습니다. 피가 흐르고 온 몸이 찢어졌습니다. 주위에는 위로하거나 돕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다 조롱하고, 모욕하고 고문하는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신이 탈진하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나. 십자가를 지는 시몬(21)
1.
이제 날이 밝고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가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문으로 예수님은 기진맥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없었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십자가를 지고 천천히 행진을 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몇 걸음 가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제대로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죄수들을 공개 처형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는 죄수를 공개처형하지 않습니다만 공산사회 등 여러 사회에서는 죄수들을 공개 처형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지은 사람이 비참하게 고통을 받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공개처형을 합니다. 십자가 행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긴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쳤습니다. 또 잔인한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삼아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아프리카 북부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구경왔습니다. 시몬은 먼곳에서 예루살렘까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명절에 순례하러 온 순례자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연히 길을 가다가 십자가 행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군병에게 걸려들었습니다. 자기는 단지 십자가를 지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보고 있었는데, 그만 갑자기 자기가 걸려들어서 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갑자기 죄수가 된 것입니다. 구경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건의 중심에 끌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2.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가는 죄수들을 보고 욕하고, 저주하고 야유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인데, 갑자기 갖은 욕을 듣게 되니까 말할 수 없이 창피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을 사형시키는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다른 죄인들 틈에서 같이 죄수같이 되서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났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마음속에 불평불만이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불평불만이 가득차서 십자가를 지고 가니까 십자가가 더욱 무거웠습니다.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온 몸이 젖었습니다. 마음 속에 원망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도 원망하였을 것이고, 로마 군병에 대해서도 원망했을 것이고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원망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힘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본의 아니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서론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서론에 구레네 시몬은 동참했습니다.
다. 십자가의 능력
1.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 말씀에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프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 16장 13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시몬과 그 아내와 알렉산더와 루포와 이 모든 사람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름들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시몬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고, 알렉산더와 루포와 모든 식구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얘기이고, 그저 예수를 믿은 정도가 아니라 열심있는 성도들이어서 그 당시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성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시몬은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자기가 지고 갔던 십자가,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그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는 무겁고 힘든 십자가였습니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였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던 십자가였습니다. 사람을 못박아 죽이는 잔인한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십자가가 자기 죄를 사하고,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는데, 그는 자기 자신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그 모든 죄가 씻음을 받고 사함을 받았습니다. 새생명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고, 새생명을 얻고 보니까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것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요 수치스러운 십자가였는데 이제는 죄사함 받은, 기쁨과 감동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기쁨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나아갔습니다. 일생동안 신앙생활하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고 겸손하게 자기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았습니다. 날마다 자기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성숙한 신앙과 인격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구원받은 사실이 분명해 졌고, 날마다 그 생명력이 풍성해 졌습니다. 그전에는 십자가가 수치와 고통과 죽음과 공포의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죄사함과 생명구원, 겸손, 희생, 거룩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십자가를 졌던 자기의 경험이 기억하기조차 싫은 부끄러운 경험이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경험이 되었습니다. 고전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몬에게 있어서 이전에는 그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까 자기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
그뿐만 아니라 아마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증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져봅니다. 여러분, 사도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쫒아야 한다’는 설교를 했을 때, 사도들은 사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에 그를 배신하고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이니까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고 얘기할 때는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 사도들은 구레네 시몬에게 간증을 부탁했을 것입니다. 시몬이 아마 가장 강력한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간증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 십자가가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인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가 값없이 구원받고 은혜를 받았는데, 그것이 결코 값없다고 해서 값싼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치른, 대가를 치른 구원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시몬은 간증했을 것입니다. 시몬이 십자가를 진 경험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경험이었던지, 그 이후 오늘날까지 전 세계 방방곡곡의 성도들이 저마다 시몬의 흉내를 내지 않습니까? 여러분,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고 죄사함과 생명구원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 우리 교회는 회개와 영적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온 소아시아 7개 교회를 가지고 우리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요. 우리가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과 신앙생활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양심에 찔림을 받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경험을 가졌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기도하게 될 텐데, 이 모든 일들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될 때에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요.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새로운 생명을 얻는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새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적인 회복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케 하십니다. 새롭게 하십니다. 소생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금주 한 주간 고난주간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나를 부인하십시요. 겸손하게 내 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요. 그렇게하므로써 다음 주 부활주일에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실 때에 우리 또한 새생명으로, 영적으로 회복되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철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