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3
눅19:3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많은 무리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라는 구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 118:26) 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왕이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미 '므나의 비유'에서 예견되었거니와 여기서도 예수를 왕권적 권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사용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 라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지만, 메시야 예언과 관련된 경우에는 예수의 승리의 입성을 예표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은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기 위해 제자 중 둘을 보내시어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행한 제자들은 준비된 나귀 새기를 끌고 왔습니다. 준비된 나귀 새끼는 이제까지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비록 나귀 새끼를 타고 초라하게 입성하셨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37절)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이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11:8-10)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왕자를 환영하는 극진한 대우였습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로서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성별 되게 사용하고 성물 에 발라 구별하고 성전에 불을 밣히며 사람에게는 식용으로 등화용으로 의료용으로 사용하여 광명을 상징합니다. 종려나무를 들고 환영하는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승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합니다.
호산나는 히브리말로 호시아나 호시아나 인데 우리를 구원하소서, 비오니 구원하소서, 메시야 만세 입니다.
호산나는 간구 기원 기쁨 환호 찬양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뢰와 경배로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118:25-26) 합니다.
유다 민족이 장막절 의 일곱째 날을 호산나의 날(hosanna day)이라 하여 순례자의 인사말로 사용하였으며 그들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호산나 였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도 전에 많은 환영 인파가 이미 거리에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기쁨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열렬한 환영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개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백성들은 겉옷을 깔아 드리며 찬송과 영광을 돌림으로써 그들의 존경과 기쁨을 표시했습니다.
시이저가 B.C 45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입성할 때 100만의 인파가 그의 개선을 축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815년 파리로 입성할 때에 50만 파리 시민들이 나와 그의 개선을 축하했습니다. 호산나 찬송의 무리는 네로 시대에 국세조사에 의하면 유월절 때에 모인 무리들은 약270 만명 모였다고 합니다, (이상근박사 신약주해p301) 그 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호산나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 오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는 참된 왕으로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그는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마구간이었습니다. 말구유에 누워 있는 왕을 상상해 보십시오. 왕이라면 마땅히 호화로운 궁전이 거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얼마나 낮추어야 했는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진리를 전파하시면서 많은 이적을 행하신 것은 왕으로 오시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주께서 다시 오실 때는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 그대로 천사의 나팔 소리와 만인의 환호 속에서 참된 왕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의 충성스러운 제자 된 우리는 모두 찬송과 기쁨으로 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눅 21: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주께서 다시 영광의 주로 오실 때 그의 제자 된 우리가 그를 열렬히 맞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속하기 위해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마땅히 기쁨으로 그를 맞이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은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환영 인파가 그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의 새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질서와 권위로 그들을 다스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던 세속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세속적인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의 주권을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세상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왕이 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은 영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비록 많은 인파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얼마 안가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임을 주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을 자유케 하는 길이며, 자신의 메시아 사명을 완수케 되는 길임을 알고 계셨으므로 담대히 고난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메시야의 예언시는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 14-18)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은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든지 마음이 촛밀 같이 녹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잠도 못 주무시고, 드시지 못하시고, 수차례 재판과 고문, 채찍질 당하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몇 번이나 쓰러지며 골고다에 올라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파사에서 사용하다가 로마 제국에 도입되어 주후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방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대개 노예나 외국인 반역자들의 사형에 사용되었습니다. 손목과 발목에 약 20cm 크기의 대못이 박히면 몸무게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집니다. 손발의 신경이 다 끊어지는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늘어져 있으니까 가슴의 근육이 당겨져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호흡을 할 수 없으니 온 몸에 산소가 부족함으로 몸 전체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그 뿐 아니라 손과 발에서 흐르는 출혈로 말미암아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극악의 고통인 것입니다.
심한 조롱과 멸시를 당한 사실을 그립니다.
마태복음 27장 43절로 44절에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5장 29절로 32절에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인내하시며 대속의 길을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3절로 34절에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경 못 박히셔서 오후 3시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고 ‘내가 목마르다’하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함께 영혼을 아버지에게 의탁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한 고난이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기록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2-10)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온갖 고난과 모욕을 당하시고 버림받은 그리스도께서는 죄악을 대속하시사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뿐 아니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은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위해 나아가신 길이 고난의 길이었듯이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우리의 길 역시 고난의 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써 그의 주권을 되찾으셨습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시고 왕이 되셨으므로 그는 우리를 통제하고, 다스릴 권리가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장래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노르웨이의 작가로서 192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바 있는 함순(Hamsun, Knut)의 소년시대와 청년시대는 행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날부터 그는 고난의 생활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채석 공 등으로 일하다가, 도미하여서는 시카고시의 전차 차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의 생활은 그에게 많은 체험을 가지게 하여, 드디어 그로 하여금 소설 <굶주림 Sult, 1890>을 쓰게 하고, 이것을 발표함으로써 드디어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리게 했다. 그에게 가난이란 과거가 없었던들 그가 노벨상을 탈수 없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들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토지의 성장 Markens grode, 1917> 이라는 작품에 의해 노벨 문학상을 탔다. 그러고 볼 때 고난은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닌 것이다.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고, 분투하여 극복하도록 하자.(인터넷정보클럽-함순의 고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은 영광의 길을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절) 하시는 천사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라고 다시 나타납니다. 계속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승리에서 승리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시작도 영광이요, 끝도 영광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일시적인 권세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권세는 곧 끝장나며 그가 받을 고난을 오히려 하늘나라의 영원한 권세를 약속해 주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긴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합니다.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하니,
계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 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계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딤전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인간을 죄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며, 영원한 승리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며, 사명이었습니다. 우리가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까지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종려주일을 지키며 고난 주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열렬히 환영 받으셨으나 곧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지만 속죄의 사역을 감당하시므로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신 사실을 확신하며 경건하게 고난에 동참하며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고 종국은 영생 복락임을 확신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