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6
마28:1-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의 시체는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서 장사 지낸바 되어졌고 그의 무덤은 병정들에 의해 삼엄하게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인간들의 철저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생의 끝장 인줄로 알았던 인간들에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당당히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발견했던 여인들은 근심에 쌓인 심정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첫 번째 부활절 아침 새벽 3시경에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주께서 세상에 계실 때 언제나 그의 말씀은 사랑이었고, 그의 걸음은 축복이었으나, 그러나 그 결과는 십자가라는 엄청난 슬픔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그토록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인봉되어 있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세상은 정말 무정하구나 하며 탄식하면서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곁에서 똑똑히 바라보았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던 여인들이 아무도 모르는 새벽 시간에 가장 큰 발견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열심의 상급으로 부활의 기쁨을 먼저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기쁨을 맛본 그들에게는 부활의 체험자가 행해야 될 큰 명령이 주어 졌습니다. 그 큰 명령은
⑴, 믿으라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천사가 일러주었습니다. 무덤 속에 누워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너무 놀랍고,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예수의 빈 무덤을 보이며 예수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믿으라고 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부활을 사실로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부활의 종교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오늘 교회는 생기지 안했을 것이고, 교회가 생기지 안했더라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 사건을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다시 살 것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⑵, 나누라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한 그들에게 천사는 말하기를 "빨리 가서 이르라"고 했습니다. 즉 부활의 기쁜 소식을 나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설교 중심은 언제나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그랬고, 바울의 전도가 또한 그랬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신자들의 지상 임무입니다.
나누라는 말에는 상대를 전제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 사이에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간에 의심과 반목과 질투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를 씻어 버리고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제의 잘못일랑 깨끗이 씻어 버립시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합시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아닙니까? 우리들 사이에 담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부활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사랑을 체험하기까지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려면 우리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모르고 기뻐할 줄도 모릅니다. 언제부터인가 부활절이면 계란을 나누어주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계란이 상징하는 바를 알고 나누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계란이 무정란인지 유정란 인지도 모른 채 받아먹습니다. 유정란은 달걀 안에 생명의 씨앗인 정자가 있어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 주면 병아리가 깨어 나옵니다. 그러나 무정란은 양계장에서 억지로 생산하기 때문에 생명의 씨인 정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따뜻하게 해주면 오히려 썩어 버리고 맙니다. 롬8장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부활의 근거를 우리 안에 계신 생명의 씨앗인 성령 때문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기에 유정란 처럼 부화(부활)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때 주님의 선교는 실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에서 주님의 부활이 증거 되어야 하고, 찬송에서 주님의 부활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⑶, 기뻐하라
"평안하뇨?"말은 인사말인데 그 본래의 뜻은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임재의 기쁨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망 중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옥중에서 밤중에 찬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옥문이 열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리더퍼드 목사님은 감옥에서 기뻐 찬송하면서 그곳을 그리스도의 왕궁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감옥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넘치는 기쁨은 언제나 신앙의 참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119:45-46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 할 것이 오며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 하겠사오며"라고 했습니다. 기쁨이 없는 경우는 신앙이 아직 초보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의 여류작가이며 찬송 작가인 크로스비 여사는 생후 6주 만에 소경이 되었으나 예수를 믿으면서 항상 기뻐서 찬송을 무려 6천 곡 이상이나 작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8세 때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습니다. "아! 나는 어찌 그리 행복 된 여인인지, 비록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결심했다. 이 세상에서도 만족하기로.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축복을 나는 누리 도다. 나는 소경이라고 하여 울지도 않고, 한숨짓지도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기쁨을 주님 외에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참된 기쁨은 주안에 살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생활은 기쁨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생활입니다. 부활을 체험 한자는 부활을 믿고, 그 소식을 서로 나누고, 부활의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