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96
요20:11-18
제가 3년 전에 “폐인을 증인으로” 라는 제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부활 주일 새벽 “사랑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라는 제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행복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는 사회와 가정과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폐인이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성경 학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부도덕한 여자였다고 해석했습니다. 스코트랜드의 유명한 설교자 매클라렌은 일곱 귀신이 일곱 가지 죄악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교만과 시기와 분노와 호색과 탐욕과 무절제와 영적인 나태함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던 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정신과 인격이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자기와 같은 폐인에게 나타난 것을 생각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천지가 개벽하는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 라는 뮤지칼이 있습니다. 그 뮤지칼에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 뮤지칼이 예수님을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한 것은 잘못이고 마리아를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한 것도 잘못이지만, 참고로 잠깐 마리아의 노래를 소개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이런 가사와 곡조로 노래가 시작됩니다. “나는 모르네 내가 그를 어떻게 사랑할지를. 무엇을 할지를, 어떻게 그를 움직일지를. 나는 참으로 변했는데, 나를 바라보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나는 모르네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를. 나는 모르네 그가 왜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그는 사람인데, 그저 평범한 사람인데. 내가 지난날 그렇게도 많은 남자들을 만났건만. 그런데 지금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고, 사랑을 말하고 싶고, 내 마음을 들어내고 싶으니. 나는 몰랐네 내가 이렇게 될 줄을.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그만 미칠 것 같아. 나는 그를 갖고 싶어, 나는 그를 사랑해.” 마리아의 인간적인 사랑의 한 면을 묘사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 깊이 체험한 후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을 더욱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상호 교환적이고 지속적이고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세 가지 사랑의 장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으며 눈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경 학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시합니다. 우리 개신교도 무의식 중에 그런 성경 해석을 받아 드리면서 이렇게 찬송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찬346). 저는 오늘 새벽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시하거나 또는 막달라 마리아와 비교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일곱 가지 귀신과 일곱 가지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다음 예수님에게로 달려와서 옥합을 깨뜨려 눈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눅7장에 나오는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닙니다. 누구든지 가정과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폐인이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와 사랑으로 죄악에서 건짐을 받아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가 하나님 앞으로 달려와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으며 눈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특별하게 다루신 것 같습니다.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저 여자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 털로 씼었느니라.” 사랑을 받은 죄인들이 사랑과 눈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받은 죄인들이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으며 사랑과 눈물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너무도 마땅한데, 눈물 한 방을 흘리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붓고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을 쏟아 부으면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의 소유로 주님을 섬기는 봉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눅7장에 눈물의 제사에 이어 눅8장에 봉사의 제사가 나옵니다. 눅8장에 나오는 봉사의 제사의 주인공은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니라.” 폐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을 섬기는 봉사 그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눅8장에 기록된 봉사의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랑은 봉사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제사를 드린 여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은 드려도 또 드려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을 섬기고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막15:41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한두 번 봉사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도 계속해서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을 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막15:41). 진정한 봉사에는 물질의 봉사가 따르고 시간의 봉사와 몸의 봉사가 따릅니다. 사랑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고, 사랑은 눈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사랑은 봉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는 물질이 아깝지도 않고 시간이 아깝지도 않고 자기의 몸이 아깝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봉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있는 동행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예수님을 좇아 다시면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함께 있고 가까이 있는 것이 제사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실 때에도 무덤 곁에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도 일요일 새벽에도 무덤 곁에 있었습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59-61). 이것은 금요일 저녁때의 일입니다.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28:1). 이것은 주일 새벽의 일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고 곁에 있는 것입니다. 제사도 예배도 시 공간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고 곁에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난 이후 항상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제이고 동행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함께 있지 않습니다. 멀리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따르는 막달라 마리아를 보시고 너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누구를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실 가를 생각하시다가 결국 막달라 마리아를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주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뜨겁고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이란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어야 하는데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건 현장에 항상 있었던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야!” 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버림 받았던 폐인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새벽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에 흠뻑 빠졌던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폐인, 일곱 가지 죄악에 사로잡혔던 죄인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를 귀신과 죄악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과 눈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기를 피로 사신 주님께 자기의 재물로 사랑과 봉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과 항상 함께 있다가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주님의 증인까지 되었습니다. 사랑은 상호 교환적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고, 받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상호 교환적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삶의 스타일을 바꿉니다. 삶의 직업을 바꿉니다. 물질 사용과 시간 사용을 바꿉니다. 사랑은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만듭니다. 사랑은 또한 나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 반대는 저주요 불행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 그 사랑에 흠뻑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눈물과 재물과 시간을 다 드려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