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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 (요 20:11-18 )
부활의 아침입니다. 참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오늘은 아침 날씨부터가 새롭고 밝고 아름답습니다. 마음은 물론이고 생각도 뜻도 하늘까지 맑고 깨끗합니다. 지난 주일은 참 우울했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서 웃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편히 잠도 잘 수 없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그냥 고난이 아니고 참 처절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어떻게 웃고 놀고먹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passion of Christ "예수의 수난“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보니까 2천년 전에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받으셨것다 싶었습니다. 너무나 처절한 고난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젊은 청년은 사귀던 애인을 감쪽같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 애인이 누구도 의심 없이 자살한 것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고 감동받아서 몇 일전 경찰서에 찾아가서 자수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이런 결과도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은 고난을 생각하며 보내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세상이 확 달라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찬송도 달라지고 오늘 예배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오늘은 잔치 집에 온 기분입니다. 아주 밝고 환하고 소망적인 아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 세상에 부활의 선물이 주어졌고 이 땅에 부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소망도 주어졌습니다. 은혜도 주어졌습니다.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은혜와 힘도 주어졌습니다.
어느 영화를 보니까 할아버지에게 어린 손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손자가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나는 너보다 내가 먼저 죽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네가 먼저 가는구나, 나도 곧 너를 따라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주안에서 부활해서 천국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자“. 이것이 부활이 준 복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귀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부드럽게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 부활이 준 은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과정이 아주 신비롭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금요일 낮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 밤에 무덤에 묻히십니다. 또 토요일 하루 종일 무덤에서 지내십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 일찍 부활하십니다. 그 아침이 바로 오늘 아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시는 방법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민첩한 마리아
주일 아침이 밝으려하자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생존시에 참으로 지극 정성을 다하여 사역하시는 것을 도왔습니다. 제자 보다 훨씬 나은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그 고난의 행렬을 끝까지 따라가며 눈물을 흘렸던 여인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도 이 여인은 모친 마리아와 함께 끝까지 십자가 행렬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가장 마음 아파했던 여인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충격 받은 여인도 이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정식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제자들을 선도하며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여인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냅니다.
마리아는 금요일 밤, 토요일 하루 종일 주님이 무덤에 있는 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주일 아침 일찍 날이 새기도 전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주일날 날이 밝자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가서 보니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세마포만 놓여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그 길로 제자들에게 뛰어갑니다. 그렇게 뛰어갈 때 마리아의 발걸음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성경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무겁게 무덤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 부활사실을 전하려 달려가는 이 여인의 발걸음은 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언자가 됩니다. 이 여인은 이런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여인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두 여인들 덕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삶에서는 여인들이 언제나 앞서 갑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믿음뿐 아니고 매사가 그렇습니다. 오늘 정치도 보면 남자들 시대는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여야 모두 여인들이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다 망쳐놓은 것을 여인들이 나서서 수습하고 있습니다. 또 사순절 기간동안 성경통독을 했는데 모두 12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남자는 20여명뿐이고 모두 여성이 나섰습니다. 성경을 읽는데도 보니까 남자들이 못 당합니다. 모두 여성들이 딱 부러지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도 보니까 남성들은 2-30% 정도이고 모두 여성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으로 목격한 사람이 여성이었습니다. 평소 제자들은 큰소리나 치더니 정작 예수님의 부활은 여인들이 전해주어서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첫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이렇게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는 이 간절함과 사모함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모함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초지일관하는 신앙인의 열정과 중심 있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제자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 죽으실 때도 둔감하게 대처했는데 부활하셨을 때도 참 둔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에 제자들은 허둥댔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는 잠을 잤습니다. 가장 위급한 때는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니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부활 때도 날이 밝았는데도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도 마리아가 전해주어서 알았습니다. 2절을 보면 “마리아가 사건을 알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그때서야 “제자들이 비로소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은 민첩성에나 의지력이나 이해력에서 한결같이 둔감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각이 없으면 낙오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민첩성과 예민함과 의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깨달음이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민첩성이 떨어지면 이렇게 불행해집니다. 예수님 재림 때도 이 민첩성이 떨어지면 이렇게 낙오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다, 매를 갈다, 길쌈을 하다 하나는 들림 받고 하나는 낙오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 민첩성이 둔감해서 뒤쳐지는 것입니다. 이 다음 주님의 재림 때에도 이 같은 현상은 또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나타날 현상을 성경에서 미리 지적하고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유대인은 결혼을 밤에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들러리들은 반드시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은 밤늦게 옵니다. 그런데 민첩한 여인들은 밤새울 각오를 하고 기름을 미리 준비합니다. 그런데 민첩하지 못한 여인들은 준비도 없지만 그 밤을 인내하지도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허둥댑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불은 이미 꺼져가고 있습니다. 기름은 바닥나 있습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기름을 꾸어 달라고 하니 누가 꾸어 줍니까. 그때서야 기름을 준비하러 다니게 되니 무슨 들러리 입니까. 이것이 민첩성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여기 제자들을 보면 바로 이 민첩성이나 의지성 그리고 감각이 한참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낙오되고 순서에 밀리고 뒤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제자들이 더 한심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시몬 베드로가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여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예수님은 이미 부활했고 시체를 샀던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곳을 나가신 후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왜 만나야 하는가 하면 예수의 부활을 만방에 알려야 하기 때문에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아픔을 당했습니까. 엊그제 그 환란당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당했고 그래서 아픔을 당했고 기가 죽었습니까.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확인하고 나아가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 수모 당하신 예수는 죽지 않고 살아나 부활하셨다고 알려야 합니다. 또 그래야 실패한 제자들은 그 실수와 부끄러움을 만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제자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10절을 보면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도 조금 찾아보다가 없으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마디로 이 제자들은 자질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민감성이나 감각의 문제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질 자체가 떨어집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만 골라 제자로 삼으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제자들을 무지하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을 탓할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을 보면서 곧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제자들의 무지한 행동이 곧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을 읽음으로서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제자들의 무지한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보십시오. 11절을 보면 제자들이 돌아갔는데도 혼자 남아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다시 예수님 무덤 속을 또 들여다봅니다.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상이 있고 보상이 주어집니다. 찾는 자는 찾아지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돌아갔어도 혼자 남아 또 기다립니다. 그랬더니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첫 번째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보상이고 복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와서 찾다가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찾아지겠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달려가서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해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마리아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또 만났다는 보고를 받은 제자들은 무슨 심정이었겠습니까. 주님도 너무 야속하다는 생각 안 들었겠습니까. 우리는 명색이 제자인데 나타나시려면 제자들부터 만나주셔야 하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부터 만나주시는 예수님이 야속하고 또 서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알아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직분이 높다고 반드시 더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입고 영적성장을 이루는 데는 직분의 고하나 신앙 연륜 길고 짧음이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영적 생활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여기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매사를 그냥 봅니다. 자세하게 보질 않습니다. 물건을 사도 그냥 보고 삽니다. 값도 달라면 조금 깎아 보다가 안 되면 그냥 사 버립니다. 그래서 속기 쉽습니다. 가짜를 사들고 오기도 합니다. 퇴근길에 보니까 과일 한 상자가 5천 원씩 팔고 있습니다. 나도 빨리 집에 가려고 싸게 판다고 합니다. 지금 사지 않으면 금방 다 팔릴 것이라고 합니다. 퇴근하다가 생각하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찌 나한테 까지 오느냐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심 없이 사들고 당당하게 집에 와서 풀어보니까 속이 다 썩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아내로부터 안하던 한다고 핀잔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들 같으면 어림도 없습니다. 백화점에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물건 하나 사는데 참 구경할 만 합니다. 고르고 또 고르고 만져보고 뒤집어 보고 세심하게 살펴봅니다. 그래서 사려는가 보다 싶었는데 그냥 놓고 또 다른 곳으로 갑니다. 가서 또 살펴보다가 다시 와서 또 만지고 깎고 또 깎고 그러다 기어이 반값으로 깎아 사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그냥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는 복을 누린 것이 아닙니다. 그 만남이 있기까지는 그런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래도 명색이 제자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사건의 전후에서 역할이 막달라 마리아 보다 뒤로 밀린 것은 그런 민첩성이나 의지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 행동이 참 우둔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이 민첩성과 의지력이 참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응답받는 신앙의 요소입니다. 이것이 찾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이것이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만남의 복입니다. 또 이것이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응답의 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이렇게 소망을 주신 사건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죽음에는 새로운 질서와 혁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복된 승리인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