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2
어린이를 용납하고 귀히 여기라 (눅 18:15-17)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교회 임원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목사님께서 열심히 애쓰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금년에는 교인이 한명도 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오기는 한 사람이 왔습니다. 너무 어려서 그렇지요. 모펫이라는 아이가 한명 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 아이를 열심히 양육했습니다. 그 아이는 훌륭하게 성장하여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에서 사역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는 영국의 국왕이 그의 앞에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 하나까지 소중하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어린아이들을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어린이를 용납하고 귀히 여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A. 어린이를 귀히 여기라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자기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자식이 하나님이 은총으로 복을 받고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까지 용납하고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까지도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말씀을 전하시느라고 무척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까지 데려와서 예수님을 괴롭히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제자들은 그것을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어린이를 귀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요한 트레보니우스라는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맨발의 수도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늘 모자를 벗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이지만 언젠가는 그들 중에서 총독도 되고, 장관도 될 것이고, 학자나 교사들이 될 터인데 이를 생각하고 공경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허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개혁자 마틴 루터가 배출되었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특히 어린 시기는 종교교육을 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유태인의 자녀 교육법」에 따르면 유치부 때에는 100% 유태인으로 만들 수 수 있으나, 초등학교 때에는 50%, 중․고등학교 때에는 10%, 대학교 때에는 5%, 그리고 장년에 이르러서는 매우 힘들다고 합니다. 교회학교 교육의 중요성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린이들은 소비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소홀히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어린이들이 쉽게 모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린이 전도도 쉽지 않습니다.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예산도 세우고 어린이 선교를 위해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들이 지금은 소비자이지만 20-30년 후에는 교회의 기둥들도 성장할 것입니다. 차세대에 교회를 지킬 목사, 장로 및 임원들이 될 것입니다. 지금 어린이를 인도하는 것은 차세대의 교회 일꾼들을 세우는 일입니다. 모두 사명감을 갖고 이 일에도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B. 자녀의 영적 성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시면 훌륭하게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오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축복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아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은 소중한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말씀 가운데 성장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눅2장 5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2장 40절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두 말씀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키가 자라가며 강하여졌고, 지혜가 자라서 부족함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성장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육체적인 성장, 지적인 성장, 그리고 영적 성장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려면 육체적 성장도 중요하고, 지적인 성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성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육체적 성장과 지적인 성장에 관심을 두고 영적 성장에는 소홀히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녀의 영적 성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하게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10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아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21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틈틈이 기도하면서 아들을 위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이 죽으면 이 편지를 1년에 2통씩 우표를 붙여서 아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10살 난 아들이 적어도 20살이 될 때까지는 1년에 2통의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사랑 속에 자라게 하려는 뜻에서 편지를 보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통은 결혼하기 바로 전날 받을 수 있도록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 내일이면 네가 결혼을 하는구나. 이제부터 하나님이 네 가정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네 가정의 인도자가 되시기를 기도한다. 진실로 너의 가정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한다. 이제는 내가 너를 축복하였던 것처럼 너도 너의 자녀를 축복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럼 이 다음에 저 하늘나라에서 우리 기쁘게 다시 만나자. 안녕”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나 자녀의 육체적, 지적 성장은 돌볼 수 없으나 편지를 통해서라도 영적으로 바르게 자라 훌륭한 가정을 이루기 바라는 아버지의 소원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C. 어린이의 마음을 유지하라
또한 본문은 성도가 어린이의 마음을 유지할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1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고 하셨습니다. 즉 성도는 어린아이처럼 겸손의 마음을 유지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많은 본을 보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형체를 가져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자신을 낮추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으로 겸손히 섬기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발을 씻기는 것은 종들의 일이었습니다.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파격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성도가 지킬 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지 받들지 아니하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받들다’는 말은 ‘맞아들이다’(공동번역) 또는 ‘받아들이다’(새번역)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순진한 믿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성도는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고 단순하게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머리가 커지면 이해하고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합니다. 이해하고 믿으려하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종교철학사상에도 우리가 도(道)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머리로 포착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믿어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는 어린아이와 같은 소자를 받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소자를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5절에 보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소자를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