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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대상 25:8)
(대상 25:8) 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무론하고 일례로 제비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어느 분의 간증이 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가슴 뭉클한 떨림으로 맞는다. 울음이라도 울컥 토해내고 싶은 마음이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창 시절,홀로 남은 어머니마저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 세상에 철저히 혼자 내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다. 양 어깨룰 짓누르는 소녀 가장이라는 짐이 너무 무거워 나는 서서히 탈선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선물해주신 일기장과 편지 한 통이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이 일기장을 엄마,아빠라고 생각하고 힘들거나 괴로울 때 여기에다 모두 토해놓으렴. 그러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거나 직접 말하기 거북한 일이 있으면 일기장에 적어서 선생님 교탁 위에 얹어 놓고 가려므나. 경연아,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단다. 네 인생은 네 것인 게야.' 선생님은 평소 말수가 적고 소심하던 내 성격을 간파하시고 말보다는 글로 대화를 유도하셨다. 그 덕에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바둥거리며 살아야 하는 현실의 고난을 지체 없이 일기장 속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기를 쓰고 나면 놀랍게도 가슴 속이 후련해지고 다시 한 번 해봐야겠다는 힘이 새록새록 돋아나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선생님이 내 일기 끝에 빨간 볼펜으로 몇 자씩 적어주셨던 천금 같은 격려의 말 때문이었을 게다. 그해 어버이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 빨간 카네이션을 고르느라 분주한 친구들 틈에 끼여 나도 모르게 꽃을 사고 보니 달아줄 사람이 없어 나는 다시 울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선생님도 어버이와 마찬가지란 말 모르니? 그 카네이션 나한테 달아주면 되잖아"라며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셨다. 스승의 날도 아닌 어버이 날에 선생님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면서 또다시 울먹거려야 했다. 그 뒤 무사히 졸업을 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지만 해마다 5월이면 그때 그 빨간 카네이션과 함께 떠오르는 선생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빨간 카네이션을 사도 달아드릴 수가 없다. 몇 해 전 선생님마저 내 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선생님이 베풀어주신 사랑 잊지 않고 더욱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부디 영생을 누리소서.'”
스승과 제자는 동행의 관계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가 동행하면서 그의 삶을 배우고 그의 생각을 닮게 됩니다.
에녹은 365년을 향수하는 중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동행이란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하고 한마음이 되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역대기하 24장을 보게 되면 7살에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 요아스라는 인물을 보게 됩니다.
(대하 24:1) 요아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요아스의 아버지는 요아스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안타깝게 죽게 됩니다.
요아스의 조모는 자신의 아들들까지 다 죽여가면서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대하 22:1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그런데 그를 사랑하는 고모가 요아스를 숨김으로 말미암아 7살까지 자라게 되었습니다.
(대하 22:11)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한 고로 아달랴가 저를 죽이지 못하였더라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
그리고 7살이 되었을 때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하여 요아스를 왕위에 봉해지게 됩니다.
(대하 23:11) 무리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세워 왕을 삼을새 여호야댜와 그 아들들이 저에게 기름을 붓고 모두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그런데 역대하 24장 15절을 보면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아 늙어서 130세에 죽게 됩니다.
(대하 24:15)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 세라
여호야다가 세상에 있었을 때는 요아스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합니다.
(대하 24: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
여호야다는 어린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치리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자연적으로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요아스는 혼자 남게 됩니다. 요아스는 유다 왕 중에서 비교적 선정을 베푼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인 여호야다가 없어지게 될 때 그는 또 다른 선생님을 맞아들이지 못했고 마침내 17절 이하를 보면 유다 방백들이 왕에게 와서 절하고 말할 때 그는 그 말을 듣게 되고 흔들리게 되며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김으로 이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하 24: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대하 24: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대로 진행하고 실행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승하게 하셨으나 그가 말씀의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그가 고통 속에 죄악과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격할 때 이와같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선생이 있음과 없음의 현격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역대하 26장 5절을 보게 되면 웃시야라는 왕이 있습니다. 웃시야에게도 그를 가르치는 스가랴라는 선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는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역대하 26장 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하 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그런데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변방까지 퍼졌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말에 따라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안타깝게 세상에서 없어지게 되고 웃시야는 지속적으로 강성하게 될 때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화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니 악을 행하게 됩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없고 다른 선생도 만나지 못하니 주 앞에 교만하여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는 제사장의 권위까지 창탈하고 말았습니다. 웃시야는 자기 손의 향로를 가지고 향단에 분향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대하 26: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문둥병환자의 상태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웃시야는 애굽 변방까지 이름을 떨치던 나라의 왕이었다가 그의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다 사그러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하 26:21)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그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
스승과 제자는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바울과 디모데는 영적 스승과 제사 사이인 동시에 아버지 아들관계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으로 아껴줘야 하고 제자는 스승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충성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좋은 스승은 학생의 지금만을 보고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을 오늘 바라보면서 가르치고 꿈을 심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괴테가 어린 학생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오면 항상 어린 학생들에게 모자를 벗어 정중히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선생님은 “너희 중에서 앞으로 독일의 역사를 바꿀 인물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야기 때문에 괴테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미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훌륭한 태도는 충분히 감명 깊은 것입니다.
벨기에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가 큰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그 동안의 피곤을 풀 겸해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의 집에는 문하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루벤스가 외출하자 스승이 완성한 대작을 보려고 앞을 다투며 루벤스의 화실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젊은 제자들은 서로 밀고 당기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맨 앞에 있던 제자가 그만 떠밀려 넘어지면서 채 마르지도 않은 그림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루벤스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림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스승이 오랜 시일을 두고 얼마나 애써 왔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귀중한 그림을 망쳐 버린 것에 대한 두려움과 당황함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붓을 들고 작품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어쩌겠나. 내가 한번 고쳐보지 ”이렇게 말하고는 여기저기 수정을 해서 엉망이 된 부분을 고쳐나갔습니다. “저런, 오히려 더 망치면 어떡하려고.” “잘못이 두 번 저질러지게 되면 더 큰 꾸지람을 받을 텐데.”모두들 걱정하며 만류하였지만 그는 계속 묵묵히 그림을 손질했습니다. 이윽고 스승 루벤스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한 쪽에 몰려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루벤스가 그림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제자들은 벼락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루벤스는 작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뜻밖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보다 더 좋게 고쳐놓았군!” 작품에 손질을 한 제자는 바로 후일 영국 궁정 수석화가로 명성을 떨친 반다이크였습니다. 타고난 재능은 큰 보물입니다. 그리고 그 재능은 그것을 키워주고 가꿔줄 줄 아는 사람을 만날 때 더 빛이 납니다.
영락교회의 은퇴하신 장로님으로 대광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역임하셨는데 학생들에게 아주 엄하여 한 때는 호랑이 선생님으로도 불리웠던 분이신데 어느날 고등학교 1학년 영어 시간에 들어가셔셔 한 학생에게 영어 교과서를 읽게 하셨답니다. 그 학생이 영어 교과서를 아주 잘 읽자 지나가는 말처럼 '너 참 발음 좋다'라고 칭찬을 하였답니다. 그 호랑이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그 학생은 훗날 대학교의 영어교수가 되었습니다. 교수가 된 후 그 장로님을 찾아와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 '너 발음 좋다'는 말씀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영어에 더욱 취미를 갖게 되었고 결국 영어 교수까지 되게 되었다고 인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선생의 칭찬을 받은 학생은 그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선생님과의 관계가 좋아짐으로 그 아이는 그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영어 과목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은 잘 교육을 받아 성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교훈을 주고 따르는 관계입니다.
주변 선지 생도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간 이유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려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만,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이 되었을 때, 그는 지오반니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의 놀라운 재능을 본 지오반니는 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된다. 너는 네 기술로써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 먼저 분명한 결정을 해야 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서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구경시켜준 곳은 바로 술집입니다. “스승님,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 “이 조각은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서 이 조각을 사용했단다.” 이 스승은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서 아주 거대한 성당으로 가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서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스승의 물음에 어린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 시간, 기회 등 이 모든 것을 무엇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까? (21세기 예화-미켈란젤로의 스승)
스승과 제자는 동행하며 아끼고 사랑하며 교훈을 따르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스승을 어디에 계실까요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소년은 깊은 숲과 황량한 사막을 헤맸으나 '위대한 스승'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너무 지쳐서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를 지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소년아,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마. 지금 곧장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채 뛰어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란다" 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년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채 뛰어나와 소년을 맞았습니다. 그 '위대한 스승'은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최선의 교육자입니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스승입니다.
신령한 스승의 모형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요 보혜사로서 동행하십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사 생명을 다 주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엄히 책망하시고 실수와 연약한 제자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인내하시고 눈물로서 가르치시며 지혜와 사랑으로 가르치시며 말씀의 권위로 신령한 교훈하시며 따르도록 하시는 참 스승이셨습니다. 참 스승, 참 목자 예수님을 우리의 스승으로 섬기며 각종 좋은 것으로 함께 하는 모두가 됩시다.
(갈 6:6)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와의 관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고, 또 그 관계가 서로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좋은 관계여야 하며 그와 같은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