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2
참 제자가 되는 사람 (요한복음 8:31~36)
밤에 예수님을 찾아 갔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공회(Sanhedrin)의원이며 율법학자로서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에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고 하였습니다(요 3:2). 예수님 자신도 성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요 13:13).
유대인 사회에서는 선생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쓰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선생이라고 부를 경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와 권위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마 23:8).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 말이 합당하게 쓰일 수 있었습니다(마 23:10).
어느 시대에나 명망 있고 훌륭한 선생에게는 많은 제자가 따르게 됩니다.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를 길러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 열두 명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제자의 도(discipleship)를 가르치셨습니다(마 16:24-26, 20:25-28).
본문 말씀 중에도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참 제자의 도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I.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내 말”이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1) 말씀을 수용하는 자입니다.
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경이 귀하였기 때문에 그 사본을 만들어 특정지역이나 교회에 보내면 그것을 회중들 앞에서 한 사람이 읽고 많은 사람들은 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더불어 그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단순히 읽고 듣고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속에 수용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2에도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을 밝히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하였습니다.
(2) 말씀에 사로잡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하셨는데 “거하다”는 헬라 말(μένω)은 ‘멈춘다’, ‘고정 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한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얽매여서 꼼짝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요 그 말씀에 지배당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에 칭찬과 축복을 전하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계 3:10).
여기 “인내의 말씀”이란(ὐπομονἠς) ‘…에 의하여 고정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서 고정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의 정욕이나 세상적인 유행에 얽매이게 되면 그것은 죄를 짓게 하고 멸망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롬 7:23-24).
(3)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나 서신에서 예수님의 인격을 표현할 때 「말씀」(λογος)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습니다(요 1:1). 여기에도 같은 단어가 쓰여 졌는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 자신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곧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한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하여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4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Ⅱ.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32절에 “진리를 알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자가 됩니다. 요한2서 1:1에도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다”고 하였습니다.
(1) 진리의 개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총독 빌라도는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요 18:38). 진리에 대한 물음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석학이나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 온 과제입니다. 진리(ἀλἠθεια)라는 말은 참된 것, 진실, 믿음, 또는 가장 올바른 가치 등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진리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과 관련지어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곧 진리는 하나 밖에 없는 것(唯一性)이며,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것(不變性)이며, 또한 그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永遠性)이라고 정의합니다. 시편 119:60에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의 강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7에도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본체임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4:6).
(2) 진리의 신비와 환상
진리에는 불가사의한 신비가 있고 감격적인 환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증거하는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며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신비와 능력이 행사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 곧 예수님의 참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의 체험과 환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사람은 예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다른 제자들이 보지 못한 장면을 목격하였고, 신비로운 환상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황홀한 광경을 목격하였고(마 17:1-8),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죽은 소녀를 살려내는 부활의 장면을 체험하였으며(막 5:35-43), 성만찬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마 26:36-46).
사도 바울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에게 붙잡힌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진리 안에서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십자가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 부활의 승리와 신비적 환상을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진리가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언제나 최상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마 13:44).
본문 말씀에 “진리를 알지니”라고 하는 말 중 「안다」는 말(γινώσκω)은 히브리말 「야다」(ע)와 같은 뜻인데 그것은 남녀 간 애정관계로 표현되는 단어입니다(암 3:2).
여기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냥 지식적으로나 이성적으로만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더 깊이 감정과 애정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만났을 경우 서로 상대방의 외모나 조건 같은 것을 살피게 되지만 이미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살게 되면 둘이 한 몸이 된 공동운명체로서 서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예찬하면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6-7).
옛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의 사랑에 취한 나머지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 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아 2:7).
Ⅲ.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얽매인 데서 풀려나는 것을 뜻하는데 곧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유는 겉으로 보고 느끼는 자유가 아닙니다. 곧 내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겉보기는 자유로운 것 같으나 속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얽매인 사람이 있고, 겉보기에는 매우 부자유스러우나 내적으로는 얽매인 데가 없이 무한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진리로 말미암아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1) 죄에서 자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33절에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은 당시 로마사회에서 통용되던 노예를 연상케 합니다. 노예는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가 벗어나고 싶다고 거기서 해방될 수도 없습니다. 그 당시 종은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혀왔거나(왕하 5:2), 빚을 갚지 못했을 때 채주에게 종이 되는 경우와(왕하 4:1), 나면서부터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누군가가 몸값을 대신 치러주고 노예의 신분을 벗겨 주어야만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 항의하는 유대인들의 경우 겉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유 하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죄의 종이 되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그가 흘리신 속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롬 6:6-7).
(2) 죽음에서 자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다 사망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롬 5:17).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진리 안에 있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입은 사람은 여기서 예외가 됩니다. 로마서 8:2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2:15에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써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향하여 오히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호령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고전 15:55).
(3) 모든 것에서 자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것에게도 속박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관습과 제도 또는 인위적인 규범들이 있어서 사람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또 사람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권세에 얽매여 있어서 자기의 생각과 행동까지 원하지 않는 데로 끌려가는 안타까운 상태에 있습니다(롬 7:23-24).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들은 이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함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로마 옥중에 있으면서 아무런 얽매임이나 불편함 없이 무한한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였습니다. 빌립보서 4:12-13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고 간증하였습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 중에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 갔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공회(Sanhedrin)의원이며 율법학자로서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에게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고 하였습니다(요 3:2). 예수님 자신도 성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요 13:13).
유대인 사회에서는 선생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쓰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선생이라고 부를 경우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와 권위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마 23:8).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 말이 합당하게 쓰일 수 있었습니다(마 23:10).
어느 시대에나 명망 있고 훌륭한 선생에게는 많은 제자가 따르게 됩니다.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를 길러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 열두 명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제자의 도(discipleship)를 가르치셨습니다(마 16:24-26, 20:25-28).
본문 말씀 중에도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참 제자의 도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I.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내 말”이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1) 말씀을 수용하는 자입니다.
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경이 귀하였기 때문에 그 사본을 만들어 특정지역이나 교회에 보내면 그것을 회중들 앞에서 한 사람이 읽고 많은 사람들은 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더불어 그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단순히 읽고 듣고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속에 수용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2에도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을 밝히면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하였습니다.
(2) 말씀에 사로잡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하셨는데 “거하다”는 헬라 말(μένω)은 ‘멈춘다’, ‘고정 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한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얽매여서 꼼짝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요 그 말씀에 지배당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에 칭찬과 축복을 전하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계 3:10).
여기 “인내의 말씀”이란(ὐπομονἠς) ‘…에 의하여 고정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서 고정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의 정욕이나 세상적인 유행에 얽매이게 되면 그것은 죄를 짓게 하고 멸망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롬 7:23-24).
(3)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나 서신에서 예수님의 인격을 표현할 때 「말씀」(λογος)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습니다(요 1:1). 여기에도 같은 단어가 쓰여 졌는데 이를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 자신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곧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한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하여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4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Ⅱ.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32절에 “진리를 알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자가 됩니다. 요한2서 1:1에도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다”고 하였습니다.
(1) 진리의 개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총독 빌라도는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요 18:38). 진리에 대한 물음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석학이나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 온 과제입니다. 진리(ἀλἠθεια)라는 말은 참된 것, 진실, 믿음, 또는 가장 올바른 가치 등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진리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과 관련지어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곧 진리는 하나 밖에 없는 것(唯一性)이며,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것(不變性)이며, 또한 그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永遠性)이라고 정의합니다. 시편 119:60에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의 강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7에도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본체임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4:6).
(2) 진리의 신비와 환상
진리에는 불가사의한 신비가 있고 감격적인 환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증거하는 복음의 핵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며 거기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신비와 능력이 행사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 곧 예수님의 참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의 체험과 환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사람은 예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다른 제자들이 보지 못한 장면을 목격하였고, 신비로운 환상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황홀한 광경을 목격하였고(마 17:1-8),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죽은 소녀를 살려내는 부활의 장면을 체험하였으며(막 5:35-43), 성만찬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마 26:36-46).
사도 바울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에게 붙잡힌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진리 안에서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십자가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 부활의 승리와 신비적 환상을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진리가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언제나 최상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마 13:44).
본문 말씀에 “진리를 알지니”라고 하는 말 중 「안다」는 말(γινώσκω)은 히브리말 「야다」(ע)와 같은 뜻인데 그것은 남녀 간 애정관계로 표현되는 단어입니다(암 3:2).
여기서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냥 지식적으로나 이성적으로만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더 깊이 감정과 애정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만났을 경우 서로 상대방의 외모나 조건 같은 것을 살피게 되지만 이미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살게 되면 둘이 한 몸이 된 공동운명체로서 서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예찬하면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6-7).
옛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의 사랑에 취한 나머지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 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아 2:7).
Ⅲ.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얽매인 데서 풀려나는 것을 뜻하는데 곧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유는 겉으로 보고 느끼는 자유가 아닙니다. 곧 내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겉보기는 자유로운 것 같으나 속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얽매인 사람이 있고, 겉보기에는 매우 부자유스러우나 내적으로는 얽매인 데가 없이 무한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진리로 말미암아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1) 죄에서 자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33절에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은 당시 로마사회에서 통용되던 노예를 연상케 합니다. 노예는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가 벗어나고 싶다고 거기서 해방될 수도 없습니다. 그 당시 종은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혀왔거나(왕하 5:2), 빚을 갚지 못했을 때 채주에게 종이 되는 경우와(왕하 4:1), 나면서부터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누군가가 몸값을 대신 치러주고 노예의 신분을 벗겨 주어야만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 항의하는 유대인들의 경우 겉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유 하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죄의 종이 되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그가 흘리신 속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롬 6:6-7).
(2) 죽음에서 자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다 사망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롬 5:17).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진리 안에 있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입은 사람은 여기서 예외가 됩니다. 로마서 8:2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2:15에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써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향하여 오히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호령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고전 15:55).
(3) 모든 것에서 자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것에게도 속박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관습과 제도 또는 인위적인 규범들이 있어서 사람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또 사람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권세에 얽매여 있어서 자기의 생각과 행동까지 원하지 않는 데로 끌려가는 안타까운 상태에 있습니다(롬 7:23-24).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들은 이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함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로마 옥중에 있으면서 아무런 얽매임이나 불편함 없이 무한한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였습니다. 빌립보서 4:12-13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고 간증하였습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