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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창세기 4:1-7; 마가복음 6:6-8)
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가 제기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아마도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까?" 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성서는 인류가 창조된 후 그 최초의 인류가 그 첫 노동의 결실을 거두었을 때 그들이 취하였던 그 첫 번째의 행위가 다름 아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행위"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에게 드린 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놀랍게도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관한 이 성서의 기록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가장 모범적인 감사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관한 성서 이야기는 미스테리에 속하는 이야기라고들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행위를 보도하고 있는 창세기 4장 본문으로부터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아 받지 않으신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들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가인의 제물은 저주받은 땅(창 3:17)의 소산물이고 또 하나님께서는 유목민을 농경민보다 더 좋게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맏배의 양 새끼 기름을 가인이 드린 밭곡식보다 더 선호하셔서 아벨의 양 새끼 기름의 제물만 반기시고 가인의 곡물제물은 반기시지 않으신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본문의 뚜렷한 전거(典據)도 물론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일 그렇게 곡식류 보다는 양고기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시고 그 고기 중에서도 기름끼있는 부분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은 반기시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혹자는 좀더 깊은 신학적 시각으로 이 문제를 살펴봄으로서, "인간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고 안 받으시고는 하나님 자신의 선택이므로, 그 선택의 이유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금세기 최고의 구약학자인 폰 라트(G. von Rad)라는 학자조차도 <하나님의 자유의지>에서 그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하였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묻어두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곳 이외의 여러 성서적 증언들을 살펴 볼 때도 이러한 <대답회피>란 전혀 그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곳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와 예물이 무엇인지를 거듭거듭 분명하게 밝혀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은 반기시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4장이 이 물음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의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제물의 양과 질이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분병하다는 것은 창세기 4장 2절 하반절이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라고 분명하게 전제하고 있는데서도 나타납니다. 즉 양치는 업이든 농사를 짓는 업이든 그 업 자체에 편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든가 "업보(業報)"라든가 하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업은 생업(生業) 또는 직업(職業)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흔히 우리가 말하는 "vocation"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농업은 천한 업이고 목양업은 귀한 업이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유목민이 아니라 농경민을 조상으로 하는 우리 한국의 전통에서는 <농자(農者)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다>라고 해서 농사의 업을 생업의 기본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런 전통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성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경우에서도, 비록 거기에는 유목문화를 선호하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들이 여러 곳 있기는 하여도, 그러나 결코 구약성서는 농업을 하나님이 싫어하는 업종으로 보는 전통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약성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국호를 정할 때, "야훼 공동체"라는 이름 대신에 가나안 농경문화의 신인 "엘"이라는 이름을 채용하여, 이른바 선민의 국호를 결코 "이스라-야" 또는 "이스라-야훼"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구약신학적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선호적 입장에 대한 저항감이 국제사회에 팽배해 있다고는 하여도, 고대 이스라엘은 그 신앙 이념에 있어서는 매우 위대한 민족이었다고까지 보는데는 큰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비록 한쪽으로는 시오니즘적인 배타적 유대 민족주의의 편견이 여전히 중동사회의 "뜨거운 감자"의 기능을 하고는 있다고 하여도, 적어도 고대 히브리인의 구약종교는 이러한 민족적 배타주의를 선호하기는커녕,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배타주의를 끊임없이 규탄하고, 오히려 탈민족주의적 보편주의 원리를 지향하였다는 것은 구약종교의 위대성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가인의 곡물제물과 아벨의 양새끼의 기름으로 드린 제물 사이의 그 제물 자체의 질적, 양적 가치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아득한 고대로부터 히브리인의 성서가 지닌 기본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4장에 나타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기록이 두 감사제물 사이의 <제물의 질적 양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그 근본 이유였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둘째로, 우리의 본문 창세기 4장은 제물 자체의 질적, 양적 가치보다는 그 제물을 드리는 자의 인격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4장 4절 하반절에서부터 5절 상반절까지는 단지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을 뿐임을 보게 됩니다.
야훼께서 아벨과 그리고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리고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본문의 히브리 원문을 문자대로 따라 읽으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아벨을/ 반기셨으므로/ 그래서 그가 바친 제물도 [반기셨다]
그러나, 가인은/ 반기지/ 않으셨으므로/ 그래서 그가 바친 제물도 [반기지 않으셨다](4+4)
아마, 더 이상의 주석적 설명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본문을 또박 또박 읽는 것만으로도 야훼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드리는 자의 그 인격(personality)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결정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 그의 예물 또는 그의 제물을 받으실지 아닐지도 결정하셨다는 것이 성서적 증언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의 이러한 문학적 고안은 놀라운 신학적 사유를 기초로 하여 진행되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제물이나 예물 그 자체를 탐내시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성서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도 또한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증언의 정당성은 시편 50편 시인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더욱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말한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두고 증언한다.
나는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저희를 책망하지는 않는다.
...
나는 너희의 집에서부터 수소를 가져오거나
너희의 우리에서부터 숫염소를 가져오거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숲 속의 뭇 짐승이 다 나의 것이요 수많은 산 짐승이 모두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배 고프다한들 너희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겠느냐?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것이 모두 다 나의 것이 아니더냐?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그런게 아니다!]
하나님께 드릴 참 제물[쩌바하-렐로힘]은 너희 자신의 감사의 고백일 뿐이며
지존자에게 드릴 참 서원도 [그 서원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 서원대로 맹세를 지키는 일,
그것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언을 우리는 과연 다른 어디에서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가지고 오기를 바라는 것은 제물이나 예물 그 자체보다는 그 제물과 예물을 통한 우리의 감사의 신앙고백이며 감사하는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없는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이 진리를 증언하는데 그 어느 누구보다 더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을 나는 감히 기원전 8세기 말에 유대 땅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던 "미가"라는 예언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의 언어는 너무도 분명하여 특별히 주석과 해석을 장황스럽게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야훼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리고 저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아갈 때에 무엇 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년된 송아지입니까? 아니면, 수천마리의 양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수만 의 강줄기를 채울만한 올리브 기름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속죄를 빌 때 드리는 맏아 들이나 허물 벗기를 위하여 빌 때 드리는 몸의 열매를 바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까?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니다!!]
너 인생들아, 무엇이 선인지를 야훼께서는 이미 너희에게 알려 주셨다. 야훼께서 너희에 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너희에게 알려주셨다.
그것은 오직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 그것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로 나아갈 때에 우리가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물질을 드리는 나의 인격과 나의 신앙고백>,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이 이제 명백해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물질 예물이라는 것을 결코 바치지 말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나는 감히 셋째로, 이 말씀을 역(逆)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즉 역으로 말해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는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긍정적 명령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신학적 뒷받침은 이런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오는 물질, 그것은 본래적으로 볼 때는 본래,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써 왔던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물질만(!) 가지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곧 <빈손>으로 나아오는 것과 다름없다라는 것, 예컨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것을 주인이 올 때까지 묻어만 두었다가 먼 후일 이자도 한푼 붙이지 않고 그 한 달란트만 달랑 내어놓았던 저 게으른 종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서, 이것은 분명 심판 받을 악행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잘못 생각하여 목을 곧게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하나님께 선심 쓰듯이 헌금하는 행위와 같은 그런 가장 구역질나는 신성모독 행위와 같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써 왔던 그 물질을 나의 감사고백은 전혀 덧붙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본래 받았던 그것만을 달랑 들고 가지고 와서는 하나님께 내어 던지듯 반환하는 것, 물론 오늘날에는 지능지수가 높아져서 하나님의 것을 정확히 반환하는 것조차도 대체로 하지 않고 속이고들 있지만, 그러나, 어쨌든 성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우리의 물질반환 행위, 이른바 그 받은 바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나중에 그 한 달란트만 달랑 들고 와서 주인에게 되돌리는 성격의 그런 파렴치한 물질반환 행위적 감사행위를 성서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악행>이라고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나아오지 말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만 가지고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물질을 가진 그 인격을 그 물질과 동시에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의 물질을 가지고 오되 그 물질을 가지고서 공의를 실천하며 그 물질을 가지고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 물질을 가지고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 결의, 그 신앙고백, 그 회개의 결단을 함께 가지고 나아 오라는 것입니다. 공의를 실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물질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나아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심쓰는 듯한 감사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먹이기 위하여 물질을 가지고 나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온 물질에 의존해서 사시는 분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사예물을 드리는 우리의 감사행위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의 물질 중에서 구별하여 정의의 실천, 사랑의 실천, 믿음의 실천을 우리 안에 구현하려할 때 필요한 물 질을 성별해 가지고 나와서 그러한 삶의 실천을 약속하고 결단의 고백을 하는 행위일 뿐 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오늘의 우리에게 "미가"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감사절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아올까?>라는 물음에 대한 성서의 유일한 대답입니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