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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으로 맞이하는 성탄절 (마1:18-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은 역사이래 최대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기적인 동시에 죄와 사망에 갇힌 인생들에게는 가장 큰 영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 편에서도 이 일은 더 없이 큰 일이었습니다. 마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타락한 세상을 다시 한 번 창조하는 제2의 창조였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노래한 대로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그런데 그 같은 영광과 기쁨의 사건 이면에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함의 이면에는 독생자를 이 어두운 세상에 보내셔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더 나가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슴저린 아픔과 뼈아픈 순종의 제사가 숨어져 있음을 생각하여 보셨는지요?
이 복된 계절의 뒤에서 아파했던 순종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성탄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 가지 일들로 고난을 겪는 성도님들께는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마리아라는 처녀를 사용하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예언을 하셨습니다(사7:14). 마리아는 그 당시 정혼한 사이의 요셉이라는 약혼자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서 쓰임 받은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의 사건이었습니다.
1. 먼저 마리아의 아픔을 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이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마리아가 놀라는 장면입니다. (눅1:31,32,34)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첫째,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자연법칙상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이 점에서 천사는 친척인 엘리사벳이 늙었지만 요한을 수태케 된 일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전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임신된다는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녀는 혼전의 성적 타락이 돌로 쳐 죽게되는 율법과 그 시대의 풍속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이일이 보통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정혼한 요셉의 아픔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마리아가 임신을 하였다는 말은 믿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유를 따지는 요셉에게 마리아는 자기는 절대로 정직하다면서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배신감으로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잠 못 이루는 많은 밤을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고민하며 신중히 생각하였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2.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에는 이처럼 이름 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희생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라고 하면 무슨 굉장한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란 영웅호걸이나 이름이 있는 명망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아닙니다. 그 당시로서는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역사의 방향이 움직여지고 결정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을 보더라도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 때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알았을 뿐이고 모두 다 무관심하게 지났습니다. 헤롯왕이나 아우구스트 황제 같은 이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크게 알려진 사람들이요, 또 유대인 사회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랍비 등은 그 이름과 명성이 널리 알려진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나 요셉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오시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들은 그 뜻을 깨닫고 신앙으로 순종하였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역사는 언제나 이름 없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져 나갑니다.
아우구스트 황제나 헤롯왕, 또 그 당시에 이름을 떨치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랍비들은 실상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을 훼방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선교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하는 이들은 어린 사람이 아닙니다. 소위 이름 있는 사람들, 무엇인가 힘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방해꾼이 되고 있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롬8: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마리아가 복중에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서 받는 고난, 주님을 섬기다가 겪는 고통,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하나님 나라와 그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희생을 통하여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희생을 피하지 마십시오. 주의 십자가는 내가 피하여 도망치면 엄청난 짐이 되지만, 내가 그 고난을 덥석 안아 버리면 그리고 그 고난을 주님께 의탁하면 거기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 앞에 마리아와 요셉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눅1:38)"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주어지는 고통과 수치와 어려움을 피하여 숨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멘 아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요셉 역시 (마1:24,25)"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만일 마리아가 순종으로 예수님을 영접치 못하였다면 그리고 요셉이 생각 없는 사람으로 이 일을 처리하였다면 나중에 마리아의 억울한 입장은 어떻게 보상되며 또 자기 자신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성취되지 못하고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는 길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거수 일동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의 평범한 삶, 일상적인 생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별것도 아닌 소소한 일들이 모이고 쌓여서 결국 역사를 움직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겨자씨와 같이, 또는 작은 누룩과 같이,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는 가운데 자라고 두루 퍼져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의 의롭지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생각과 행동들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뜻을 항상 방해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 없는 결정, 순간적인 기분이나 감정으로 치우친 행위 그리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소한 이익이나 자기 중심적인 판단들이 그 이후에 진행되는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과 피해들을 끼쳤습니까? '조금만 참았다면', '그런 말만 아니했다면', '생각의 방향을 이쪽으로 돌렸더라면' 좋았을 뻔한 일들이 역사 안에는 참으로 많았습니다. 우리는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공헌이 될 수 있도
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요셉은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성경이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들이 순종했느냐 거역했느냐를 돌아보게 하고, 그 각각의 결과들이 어떻게 되었느냐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계획과 목적에 대하여 반항하는 인간들, 또 그 약속을 의심하고 믿지 아니한 사람들은 심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고 떨어져 나가면 그들은 구원을 상실합니다.
광야의 떨기나무처럼 보잘것없고 쓸모 없는 가련한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까지 반항하고 거역한 자들은 시간과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도 없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우신 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도움이 되는 사람,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귀중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마리아의 일로 고민하는 요셉에게 적절한 시기에 천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 깊은 회의와 갈등 속에 빠져 있는 요셉에게 이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했으면 어떨까요? 임신하기 전에 "요셉아, 이제 곧 네 아내가 임신할텐데 그랬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미리 일러주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다면 얼마나 간단할까요? 그러나 이야기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도 미리 양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셨으면 얼마나 갈등이 없었을까요?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한 두 번쯤 돌면 구름이 몰려오고 다섯 바퀴를 돌면 우르릉 꽝꽝 천둥번개가 나고 그래야 신나게 예수 믿을 거 아닙니까? 여섯 바퀴를 돌 때까지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셔요. 우리가 믿음에 따른 행동을 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순종함에 있어서도 오직 믿음을 보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의 자리에 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결코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은 정확한 때에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그때'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당장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가산이 탕진되고, 집이 무너지고, 자식이 병들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나중에는 돌이켜 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처럼 고통 당하는 저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임마누엘이 되심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소식은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소식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을 소개받은 이들은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나 권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나 평범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임마누엘의 축복이 누구에게 가장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예수님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부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아 주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은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영생의 보장 안에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영생의 삶은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즉 임마누엘의 사건의 신앙체험이 곧 천국생활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소식이 임마누엘의 소식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나, 개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with-me) 의 체험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경험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본래 개체성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적 관계 즉 교회라는 관계 안에서 자라 가는 법입니다. 구주 성탄을 앞두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소식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체험적인 사건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나" 개인과 구체적인 관계가 없는 크리스마스는 과거의 역사적인 회고나 기억에 불과한 기념일은 될지 모르지만 우리 개인 개인에게 인생과 변화와 구원을 주시는 사건은 아닌 것입니다. 더 나가서 우리 교회 안에 함께 하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축복을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와의 연합과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야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에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역사가 임하실 것입니다.
말씀결론
성탄의 감격으로 기뻐하는 계절이지만 우리는 이날을 이루기 위하여 아파했던 사람들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를 목이 터지라고 부르던 황영조 선수의 기쁨과 감격 속에는 훈련의 쓰라렸던 고통,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차라리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어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쏟아 놓는 감격의 눈물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옥동자를 낳고 기뻐하는 시부모님이나 아버지의 행복감 뒤에는 해산의 고통으로 울어야 하는 어머니의 괴로워하는 울부짖음이 가리워져 있음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모든 기쁨의 역사 뒤안길에는 그 누군가의 눈물과 땀 그리고 희생이 감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과 희생을 기억하면서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그리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마리아와 요셉처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같이 아픔과 오해와 고통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 위에 그리고 저들과 함께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어 위로와 기쁨이 넘치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은 역사이래 최대의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기적인 동시에 죄와 사망에 갇힌 인생들에게는 가장 큰 영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 편에서도 이 일은 더 없이 큰 일이었습니다. 마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타락한 세상을 다시 한 번 창조하는 제2의 창조였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노래한 대로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그런데 그 같은 영광과 기쁨의 사건 이면에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함의 이면에는 독생자를 이 어두운 세상에 보내셔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더 나가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슴저린 아픔과 뼈아픈 순종의 제사가 숨어져 있음을 생각하여 보셨는지요?
이 복된 계절의 뒤에서 아파했던 순종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성탄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 가지 일들로 고난을 겪는 성도님들께는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마리아라는 처녀를 사용하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예언을 하셨습니다(사7:14). 마리아는 그 당시 정혼한 사이의 요셉이라는 약혼자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서 쓰임 받은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의 사건이었습니다.
1. 먼저 마리아의 아픔을 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이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마리아가 놀라는 장면입니다. (눅1:31,32,34)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첫째,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자연법칙상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이 점에서 천사는 친척인 엘리사벳이 늙었지만 요한을 수태케 된 일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전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임신된다는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녀는 혼전의 성적 타락이 돌로 쳐 죽게되는 율법과 그 시대의 풍속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이일이 보통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정혼한 요셉의 아픔입니다.
그토록 믿었던 마리아가 임신을 하였다는 말은 믿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유를 따지는 요셉에게 마리아는 자기는 절대로 정직하다면서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배신감으로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잠 못 이루는 많은 밤을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고민하며 신중히 생각하였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2.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에는 이처럼 이름 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희생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라고 하면 무슨 굉장한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란 영웅호걸이나 이름이 있는 명망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아닙니다. 그 당시로서는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역사의 방향이 움직여지고 결정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을 보더라도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 때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알았을 뿐이고 모두 다 무관심하게 지났습니다. 헤롯왕이나 아우구스트 황제 같은 이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크게 알려진 사람들이요, 또 유대인 사회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랍비 등은 그 이름과 명성이 널리 알려진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나 요셉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오시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들은 그 뜻을 깨닫고 신앙으로 순종하였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역사는 언제나 이름 없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져 나갑니다.
아우구스트 황제나 헤롯왕, 또 그 당시에 이름을 떨치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랍비들은 실상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을 훼방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선교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하는 이들은 어린 사람이 아닙니다. 소위 이름 있는 사람들, 무엇인가 힘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방해꾼이 되고 있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롬8: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마리아가 복중에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서 받는 고난, 주님을 섬기다가 겪는 고통,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하나님 나라와 그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희생을 통하여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희생을 피하지 마십시오. 주의 십자가는 내가 피하여 도망치면 엄청난 짐이 되지만, 내가 그 고난을 덥석 안아 버리면 그리고 그 고난을 주님께 의탁하면 거기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 앞에 마리아와 요셉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눅1:38)"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주어지는 고통과 수치와 어려움을 피하여 숨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멘 아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이다.
요셉 역시 (마1:24,25)"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만일 마리아가 순종으로 예수님을 영접치 못하였다면 그리고 요셉이 생각 없는 사람으로 이 일을 처리하였다면 나중에 마리아의 억울한 입장은 어떻게 보상되며 또 자기 자신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성취되지 못하고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는 길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거수 일동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의 평범한 삶, 일상적인 생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별것도 아닌 소소한 일들이 모이고 쌓여서 결국 역사를 움직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겨자씨와 같이, 또는 작은 누룩과 같이,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는 가운데 자라고 두루 퍼져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의 의롭지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생각과 행동들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뜻을 항상 방해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 없는 결정, 순간적인 기분이나 감정으로 치우친 행위 그리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소한 이익이나 자기 중심적인 판단들이 그 이후에 진행되는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과 피해들을 끼쳤습니까? '조금만 참았다면', '그런 말만 아니했다면', '생각의 방향을 이쪽으로 돌렸더라면' 좋았을 뻔한 일들이 역사 안에는 참으로 많았습니다. 우리는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공헌이 될 수 있도
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 요셉은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성경이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들이 순종했느냐 거역했느냐를 돌아보게 하고, 그 각각의 결과들이 어떻게 되었느냐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계획과 목적에 대하여 반항하는 인간들, 또 그 약속을 의심하고 믿지 아니한 사람들은 심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고 떨어져 나가면 그들은 구원을 상실합니다.
광야의 떨기나무처럼 보잘것없고 쓸모 없는 가련한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까지 반항하고 거역한 자들은 시간과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도 없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우신 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도움이 되는 사람,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귀중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마리아의 일로 고민하는 요셉에게 적절한 시기에 천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 깊은 회의와 갈등 속에 빠져 있는 요셉에게 이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했으면 어떨까요? 임신하기 전에 "요셉아, 이제 곧 네 아내가 임신할텐데 그랬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미리 일러주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다면 얼마나 간단할까요? 그러나 이야기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도 미리 양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셨으면 얼마나 갈등이 없었을까요?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한 두 번쯤 돌면 구름이 몰려오고 다섯 바퀴를 돌면 우르릉 꽝꽝 천둥번개가 나고 그래야 신나게 예수 믿을 거 아닙니까? 여섯 바퀴를 돌 때까지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셔요. 우리가 믿음에 따른 행동을 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순종함에 있어서도 오직 믿음을 보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의 자리에 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결코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은 정확한 때에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그때'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당장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가산이 탕진되고, 집이 무너지고, 자식이 병들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나중에는 돌이켜 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처럼 고통 당하는 저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임마누엘이 되심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소식은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소식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을 소개받은 이들은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나 권력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나 평범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임마누엘의 축복이 누구에게 가장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예수님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부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아 주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은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영생의 보장 안에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영생의 삶은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즉 임마누엘의 사건의 신앙체험이 곧 천국생활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소식이 임마누엘의 소식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나, 개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with-me) 의 체험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경험을 가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본래 개체성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적 관계 즉 교회라는 관계 안에서 자라 가는 법입니다. 구주 성탄을 앞두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소식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체험적인 사건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나" 개인과 구체적인 관계가 없는 크리스마스는 과거의 역사적인 회고나 기억에 불과한 기념일은 될지 모르지만 우리 개인 개인에게 인생과 변화와 구원을 주시는 사건은 아닌 것입니다. 더 나가서 우리 교회 안에 함께 하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축복을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와의 연합과 관계를 새롭게 확인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야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에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역사가 임하실 것입니다.
말씀결론
성탄의 감격으로 기뻐하는 계절이지만 우리는 이날을 이루기 위하여 아파했던 사람들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를 목이 터지라고 부르던 황영조 선수의 기쁨과 감격 속에는 훈련의 쓰라렸던 고통,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차라리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어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쏟아 놓는 감격의 눈물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옥동자를 낳고 기뻐하는 시부모님이나 아버지의 행복감 뒤에는 해산의 고통으로 울어야 하는 어머니의 괴로워하는 울부짖음이 가리워져 있음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모든 기쁨의 역사 뒤안길에는 그 누군가의 눈물과 땀 그리고 희생이 감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과 희생을 기억하면서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그리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마리아와 요셉처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같이 아픔과 오해와 고통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 위에 그리고 저들과 함께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어 위로와 기쁨이 넘치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