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67
사가랴의 이야기 (눅1:5-25,57-80)
1. 누가가 등장시킨 첫 인물은 사가랴였습니다. 사가랴는 아마 50세에 가깝거나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엘리사벳이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맨앞에서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고 또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고 그들이 모두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눅1:7).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지만 자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고대의 유대인들은 자녀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으며, 자녀없는 결혼은 이혼의 근거였습니다.
사가랴는 이스라엘에서 2만 명의 제사장들 중의 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은 특별한 성일을 제외하고는 일년에 두 번 일주간만 일하였습니다. 때문에 모든 제사장들이 일 년에 두 번 근무하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사가랴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도록 뽑혔다고 말합니다(9절). 제사장이 평생을 살면서 분향하라는 요청을 한 번도 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사가랴가 분향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명예인가를 의식하면서 직무를 행할 때 그는 기도하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는 그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것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결코 가질 수 없는 아이를 원하는 엘리사벳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그들의 결혼 생활과 그들의 아이를 못 낳음의 모든 슬픔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사가랴가 직무를 행하며 기도할 때 한 천사가 나타나서 “내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믿었던 사가랴였지만, "나는 중년이고 아내는 임신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아내가 아기를 낳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말을 계속 이었습니다. "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리라." 사가랴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가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예언된 대로 엘리사벳이 임신하였음을 압니다. 그녀는 아마 홍분, 기대, 구역질 및 특정한 음식에 대한 갈망과 같은 오늘날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몇 가지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였습니다. 그들은 자녀의 탄생을 기뻐하며 기념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엘리사벳과 사가랴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 부모가 아기의 할례를 위한 8일째 되는 날에 그를 성전에 데려갔다고 말했습니다. 제사장이 "우리는 그를 사가랴라 부르겠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사벳은 "아니다. 요한이라 할 것이다“라고 확고하게 말하였습니다. 남아는 으레 부친이나 조부의 이름을 따르기 때문에 성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때 사가랴는 여전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판에다 "그 이름은 요한이라”하고 썼습니다. 누가는 곧 사가랴의 음성이 회복되어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합니다. 누가는 말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머리를 들고, 팔에 아기를 안고 의기양양하게 성전을 걸어나가는 엘리사벳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아기 세례 요한은 이사야가 수백년 전에 기록한 대로 어느 날 광야에서 나는 소리가 될 것이며,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며, 그가 그의 말로 많은 사람들을 좌우할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알려지고 요한이 죽임을 당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2. 이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1) 하나님은 신실한 자에게 참으로 오십니다.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눅1:6).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참으로 오셨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우리 만큼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들도 말다툼을 했었고, 엘리사벳은 잠자리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없음의 비탄은 그들 모두에게 아주 절실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참 반가운 신도여"(O Come All Ye Faithful)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 찬송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천함과 우리의 범죄와 우리의 옹졸함 및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오셨듯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경배하며, 그로 하여금 우리의 생을 변화시키게 하기를 참으로 원합니다.
(2) 하나님은 피의 자녀들에게 참으로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 부부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큰 슬픔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슬픔을 다루셨듯이 우리의 슬픔을 다루신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들의 큰 슬픔은 자녀없음이었으나 그들의 아이를 못낳음에 새 생명이 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우리의 아이를 못낳음과 우리의 어찌할 수 없음에도 오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알습니까? 옛날에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실로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하였습니다(사53:4). 그것이 대강절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우리에게로 오시는 분이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소원을 들으셨듯이 우리에게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3) 평화의 길이 올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들이 생각했던 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년 요한은 언제나 좀 이상했습니다. 그는 완전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행실을 나무랐습니다. 요한은 남과 어울려 지내지 않았고, 그는 남달리 자연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연식을 먹었으며 준비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요한에게 귀를 기울였으며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요점입니까? 평화가 오나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오지 않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들의 처자에서 구약의 예언이 싶현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도다"(눅1:78 하,79).
사람들은 오늘날 빛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망의 그늘을 두려워합니다. 우리 중 어떤 분들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남녀에게 오시며 인생이 다르다는-쉽지 않으나, 다르며 특별하다는-것을 발견합니다. 평화는 여기에도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한 일들을, 놀라운 일들을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촛불을 켭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 돈을 보냅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에 대한 전부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