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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1-15
어제가 84주년을 맞은 3.1절입니다.
우리의 조국이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의 국왕이 아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우리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자유를 잃고, 나라를 잃은 우리 한민족이 1919년(己未年)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친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의 공포로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조국의 독립 운동에는....
"독립만세!" 하면 생각나는 유 관순을 비롯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선진(先進)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 죽어 갔고, 심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어 갔습니다. 이런 순교의 피로 조국은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치하에서 해방되어 독립하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은 잠시의 기쁨 뿐....
우리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남북으로 둘로 갈라졌습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으로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이 벌어져 서로를 죽였습니다. 동포간에, 부모 자식간에, 형제간에 서로를 죽여 조국의 강토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이 조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3.1절에서 현재까지를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독립이 얼마나 귀중한 가를 우리 민족은 잘 압니다.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 가를 우리 민족은 잘 압니다. 더욱이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우리 성도들은 잘 압니다. 잃어 보았기 때문에, 빼앗겨 보았기 때문에 자유가, 독립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그러나, 독립이 귀중하지만....
하나 되지 못한 독립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를 또한 누구보다 우리 민족은 잘 압니다.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을 몸소 겪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독립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우리 민족은 잘 압니다. 더욱이 북녘 동포들은 잘못된 독립의 허망함을 잘 알리라 봅니다. 월남민들의 생생한 증거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독립이 귀중하지만, 잘못된 독립은 참으로 허망합니다.
이것은 비단 세상적이요,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신앙 세계에서의 잘못된 독립은 그 결과가 허망을 넘어 멸망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이 독립을 해야 합니다. 잘못된 독립이 아니라 올바른 독립을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남에게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목회자에게 의지하고, 부모에게 의지하고, 형제에게 의지하고, 이웃에게 의지하는.... 자유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에서 독립을 해야 합니다.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창세기 30:25절/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나를 보내어.... 나로 가게 하소서"....
한마디로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양육해야 할 자식들도 늘어갔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을 섬기는 종 같은 사람일 뿐, 자기의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의 땅을 떠나 자기의 땅 곧 본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독립운동입니다.
창세기 30:28절/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네 품삯을 정하라"....
떠나겠다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은 품삯으로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고.... 양떼 염소떼 중에서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을 내 몫으로 달라는 계약 조건을 제시하며, 외삼촌을 섬기기로 했습니다.
야곱의 독립운동은 품삯에 묶여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재물은 이렇게 숭고한 독립운동의 정신을 갉아먹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동지를 배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 모두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숭고한 독립운동의 정신을 팔아먹은 사람들입니다. 야곱도 품삯에 얽매여 6년이란 세월을 속았습니다. 결국 몰래 탈출했습니다(창31:20).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그 탈출도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창31: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오늘 본문 말씀은 야곱이 세겜에서 떠나 벧엘에 돌아온 내용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을 떠나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러 밭을 싸서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아 정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정착이요, 잘못된 독립이었습니다.
창세기 31:3절/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야곱의 진정한 독립은 네 조상의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돌아가라"는 말은 바로 이곳 밧단아람으로 떠나왔던 그곳 곧 네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조상의 땅이 아닌 세겜 땅에 정착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정착이요, 잘못된 독립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하려는 야곱이 잔꾀를 부린 것입니다. 그곳은 야곱에게 진정한 독립을 주지 못했습니다. 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억눌림의 땅이었습니다. 피의 보복을 가져온 불안과 공포가 있을 뿐, 평화가 없는 땅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참 좋으신 하나님, 야곱이 위경(危境)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갈 길을 인도하시고, 지켜 보호해 주시던 하나님이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는 야곱의 위경(危境)에(창34:30),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본1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야곱이 진정한 자유, 진정한 독립을 얻기까지의 일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야곱의 삶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진정한 독립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일어나야 합니다.
본문 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 진정한 독립을 찾아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세겜에서의 정착은 잘못된 정착이요, 잘못된 독립이었습니다. 이 잘못된 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나야 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여기의 "일어난다"는 것은 벧엘로 올라가기 위한 첫 단계입니다. 이 첫 단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첫 걸음입니다. 또한 죄악의 땅 세겜을 떠나는 첫 걸음이기도 합니다. 독립은 스스로 혼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립의 첫 걸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일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어나야 걸을 수 있습니다. 일어나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일어나야 독립운동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야 세겜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일어나야 이방 신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일어나야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야 의복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은 진정한 자유를 위해, 진정한 독립을 위해, 진정한 행복을 위해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일어나 이방 신상을 버리는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더러움을 씻어 정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신앙의 독립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머물러 함께 살았던 세겜 땅을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결단이 필요합니다. 품삯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은금을 주고 사놓은 논밭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잘못된 신앙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정결케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결단이 없이는 벧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2.올라가야 합니다.
본문 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여기의 "올라가다[아라(hl;[;)]"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올라가다, 드리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창22:2). "올라간다"는 말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곧 산에 올라간다고 하지요. 또 높은 사람이 있는 곳 곧 임금이 계시는 한양으로 올라간다고 하지요.
우리 신앙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높은 곳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곧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지요. 그래서, 야곱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지도(地圖)에서 세겜은 벧엘의 정북쪽에 있습니다. 지도에서 북쪽은 위를 차지하지요. 대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적인 것이 임금이나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간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은 세겜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거기에 평안이 있고, 거기에 기쁨이 있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거기에 진정한 독립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안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세겜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본문1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 성도들은 세겜을 떠나 하나님이 계시는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세겜에 정착한 자체가 잘못된 독립입니다. 세겜에 머물러 사는 한 진정한 신앙의 독립은 없습니다. 세겜에 쳐놓은 장막에 연연해서는 벧엘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세겜에 묻어둔 은금을 아까워하면 벧엘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진정한 신앙의 자유, 진정한 신앙의 독립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이 계신 곳 벧엘, 여호와를 앙모하며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고(시84:1-2).... 주를 찬양하며, 주를 앙모하는 자에게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주십니다. 새 힘을 주시어 진정한 신앙의 독립을 이루게 하십니다.
3.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 6-7절/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본문 1절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것입니다. 야곱은 드디어 벧엘로 올라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30년 전에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갈 때에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았습니다(창28:20).
야곱이 30년 전에 서원한 것을 갚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30년 전이 되는지 창세기에서 한번 살펴보세요. 신앙의 독립을 생각한다면, 이런 것을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야곱이 위경(危境)에 처했을 때, 갈 길을 몰라 답답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완성된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성경 말씀 속에서 해답을 들어야 합니다.
본문 9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여기에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은 창세기 28:13절의 30년 전의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던 30년 전에 돌베개를 하고 자던 꿈속에 나타나신 후로도 야곱이 당하는 환난 날에 나타나사 인도하시고 위경(危境)에서 건져주셨습니다(창31:3, 13).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다시 나타나신 그 하나님은.... 30년 전에도 이곳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네 누운 땅을 주리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네게 허락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언약하신 하나님이 십니다.
언약하신 그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다시는 야곱(속이는 자, 간사한 자)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승리자)이라 하리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약속의 땅을 주리라」는 엄청난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독립하기로 한 야곱의 독립운동은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라헬과 레아 두 아내를 위하여 14년, 양떼를 위하여 6년.... 20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과 재물에 마음이 빼앗겨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언약하신(창28:15)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과 재물에 마음이 팔려 잊어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간사한 야곱,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라반의 아들들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빼앗아 거부가 되었다"는 불평으로, 달라진 라반의 안색으로.... 야곱이 위경(危境)에 처해서야 벧엘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재물에 빠지고,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을 때 영안(靈眼)이 흐려지고, 영혼이 어두움 속에 잠자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시120:1).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을 잊었다가도 위경(危境)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매달리게 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시는(시50:15) 하나님의 응답으로 위경(危境)을 벗어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잠시 뿐 다시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요, 우리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그러기 위해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이 있고, 부귀영화가 있는 이 세상에 정착하면 안 됩니다. 밧단아람을 박차고 일어나는 야곱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은금을 궨아부은 장막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막을 버리고, 논밭을 버리고 야곱처럼 세겜 땅에서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다른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여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 성도들은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어났으면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 하늘, 저 천국을 소망하며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이 계시는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독립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평안이 있고, 참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의 신앙이 독립을 해야 합니다. 잘못된 독립이 아니라 올바른 독립을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남에게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목회자에게 의지하고, 부모에게 의지하고, 형제에게 의지하고, 이웃에게 의지하는.... 자유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에서 독립을 해야 합니다.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독립을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새벽기도를 강조하면 새벽기도의 참석자가 늘어나고, 예배 참석을 강조하면 예배하는 성도가 늘어나고, 헌금을 강조하면 헌금액이 늘어나고, 봉사를 강조하면 봉사자가 늘어나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이 온전히 독립하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환난과 핍박의 시대가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지면 우리 성도들은 큰 환난과 핍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했습니다(마24:22). 그 환난을 일깨우기 위하여 우리 교회사는 카타콤(catacomb) 시대를 통과해 왔습니다. 다가올 환난과 핍박의 시대는 이보다 더합니다.
환난과 핍박의 시대가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지난날 카타콤(catacomb) 시대처럼 이 산과 저 바다, 암혈(巖穴)과 토굴(土窟) 속으로 뿔뿔이 흩어질 때가 옵니다. 그 때에는 의지할 목회자도 없습니다. 의지할 부모도 없습니다. 의지할 형제도 없습니다. 의지할 이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독립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의무감에 억지로 나오는 게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1-2)」.... 주의 전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남의 권고에 못 이겨 끌려나오는 게 아니라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119:123)」.... 주의 구원을 사모하여 찾아 나와야 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3」.... 송이꿀 보다 더 단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찾아 나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신앙이 독립한 성도들입니다.
세상이 능히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히11:38). 마귀가, 사단이 능히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상이 능히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신앙이 독립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