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26-30

월드컵의 열기는 대단합니다. 어제 우리나라 대표팀이 월드컵 16강 진출이 좌절 되었지만 얼마나 잘 싸워 줬는지 모릅니다. 모든 국민들이 눈물겹게 안타까이 그 경기를 지켜 봤습니다. 물론 심판의 오심문제는 분명한 이유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경기 내용은 전사답게 싸웠습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168만명 이상이 그 일찍 꼭두새벽부터, 아니 전날부터 거리를 온통 붉게 물들였습니다.

BBC는 한국의 축구 응원을 마치 종교집단의 신비적 행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어떤이는 거리 응원은 ‘시대적 울분과 답답함을 외적으로 표출하는 영적 운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포츠라고 하는 것은 국경이 없고, 인종차별이 없기 때문에 이것 하나가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한국 사람을 보면 ‘대-한민국’합니다.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합니다. 또 기독교를 선전하는 일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나가있는 우리 선교사가 지금 13,000명이라고 하지만은, 실제로는 20,00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통계에 잡히지 아니하는, 예를 들어 중국 같은 땅에서 정식으로 선교사라고 신분을 밝히지 않고 가는 분도 너무 많기 때문에 지금 20,000명 선교사가 해외에 나가 있습니다. 이 선교사들이 선교 할 때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오늘은 56주년 6월25일, 6.25는 돌이켜보기조차 끔찍한 민족사의 비극입니다. 삼천리강토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 인명피해만도 유엔군 15만 명, 한국군 1백만 명,민간인 1백40만 명이었으며 전쟁 미망인 2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남북 이산가족이 1천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 후 불과 50여 년 만에 국민소득 2만달러 육박했습니다. 월드컵 16강은 좌절 되었지만 한반도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날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해방 당시 전국 교세는 2천 교회에 교인 약30만명 밖에 없었습다. 그것도 이 북에 1천5백 교회 20여만 성도, 이남 5백교회 8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이후 1200만 성도로 성장을 했지만 최근 발표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한국개신교는 오히려 1.6% 하락을 했다는 통계입니다. 카톨릭은 10년 전보다 75%나 더 수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에 대해 출산율 감소 등 자연적인 성장둔화와 함께 교회가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지 못하고 뒤쳐진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교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불교22.8%, 개신교18.3%, 천주교10.9% 순입니다.

대하 7:14-15 “내 이름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곳에서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 를 기울이리라”
이제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성련충만하여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소금되고 빛이 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치료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국 교회는 깨어 경성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천년 동안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제일 먼저 공산주의가 일어났고, 종교개혁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타났습니다. 교황청이 있는 이태리에서 독재자 뭇솔리니가 나타났으며,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에서 공산주의가 일어나서 남한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개인, 교회, 국가 모두에게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다시 전쟁의 징계를 받지 않도록 이 나라의 빛과 소금이 되며, 민족의 파숫군이 되어야 합니다.

6.25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참으로 얼마나 잘 잊어버리는지 . .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역사나 불행했던 과거는 빨리 잊고 싶어합니다.
전쟁의 예방주사를 맞은 지 오래되면 약효가 없어져 예방 효과가 없는 것과 같이 전쟁을 치룬지 거의 6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약효를 잃으면 안되겠습니다.

1. 고난을 잊지 말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6.25를 기억하면 6.25가 안오고, 6.25를 잊으면 6.25가 다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러한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과거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40년 광야 생활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40년 동안 고난길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신8:1-10)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처참했던 6.25를 다시 기억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6.25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이나 중국처럼 공산화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북한이 침공했을 때, 유엔 파병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소련 대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오던 중 이유 없이 차의 시동이 꺼지는 바람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여 유엔군의 한국파병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고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수없이 많은 기적으로 지켜주셨습니다.

6.25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나라를 위하여 알지 못하던 나라에 파병되어 피 흘리며 목숨을 버린 그 나라들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헐벗고 굶주릴 때 얼마나 많은 옷과 담요와 식량 . .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도 안 되고, 사람의 은혜도 잊으면 안 됩니다.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 그룬트비를 기억할 것입니다. 덴마크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 주고 유럽 북부 곡창지대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주고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그야말로 황무지였습니다. 그 때 당시의 국가의 경제는 중앙은행이 파산할 지경이었습니다.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습니다. 알콜 중독자들은 늘어가고 . . . 이런 상황에서 그룬트비 목사가 자원도 없고 돌작밭 투성이인 그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땅을 사랑하자’는 표어를 가지고 국민의 정신을 개혁한 결과 덴마크는 오늘날, 지상 낙원이라고 할 만큼 잘사는 나라가 되었는데, 그 나라 젊은이들은 호화로운 파티에 들어갈 때 먼저 선조들이 굶주리며 고생했던 것을 상기하기 위하여 맛없는 까만 보리빵과 냉수를 먹고 나서 파티장에 들어가 좋은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논다고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라고 봅니다.

과거에 고생하던 때를 쉽게 잊어버리는 백성은 과거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배우지 않은 민족은 똑같은 잘못을 계속 반복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너무 풍요해서 과거의 고통을 모르는 가운데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이념적인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6.25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나라를 잃고 방랑한 지 수천 년이 되었어도 자기 나라말도 잊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도 세계 어느 나라 민족보다 강합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정예부대가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5일만에 폴란드는 독일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1940년 초, 폴란드의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우슈비츠는 전쟁포로와 유대인들의 수용소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나치는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병자와 노약자, 키 작은 어린이들은 바로 목욕탕으로 위장된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낼 때 일정 크기 이상의 짐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기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가방 안에는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만 있었습니다.
나치는 가방에 자기 이름을 쓰게 하고 잘 보관해 놓겠다는 방송과 함께 옷을 다 벗게 하고
목욕탕으로 위장된 가스실로 수건 한 장, 비누 한 개를 들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목욕탕이 사람들로 빽빽해지자 일부 유대인들은 ‘어떻게 샤워를 하느냐?’고 항의하지만 대답은 없고 곧 묵직한 철문이 닫히며 노란 빛깔의 공기가 샤워꼭지를 통해 흘러나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은 조용해집니다. 비명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다 죽은 것입니다.

약 30분 후에 철문이 열리고, 유대인 간수들이 시체를 밖으로 꺼내 화장터로 실어보냅니다. 화장할 때 흘러나오는 기름으로는 다시 불 위에 뿌리거나, 비누 재료로도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은 안경 쓴 사람만 가스실로 보냈고, 어느 날은 키 큰 사람만 가스실로 보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북쪽 아인케렘이란 산에는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 추모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기념관 출구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망각은 멸망에 이르지만 기억은 구원의 길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우슈비츠를 잊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쟁은 분명 비극이고 아픔이며 슬픔입니다. 그러나 그런 쓰라린 아픔이 우리 민족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우리는 많은 복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6.25는 이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의지하던 각종 우상과 더러운 영들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이 민족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는 복음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 결과 휴전 후에 한국 교회는 1980년도 초까지 계속해서 인구 성장을 앞지르는 교회 성장이 거듭하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복받을 대상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무에게나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자의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왜, 갈대아 우르에 사는 우상의 집안인 아브라함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 에서는 버리고 사기꾼 같은 야곱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즐비한 여리고 성안에 하필 기생인 라합만을 택하셔서 구원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왜, 예루살렘성의 박식한 사람들을 택하시지 않고 무식하고 성경도 잘 모르는 바닷가의 어부들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택함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부름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은 구원의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자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믿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이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를 떨어지기만 하면 울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붙들고 발버둥을 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꼭 붙잡힌 바 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고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자나 깨나 그 사람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희생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애굽의 부귀영화를 희생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 . .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참으로 충성합니다. 진실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진짜 사랑하면 우리가 병도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받는 세포는 암을 이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사랑의 클리닉을 통해서 질병을 고치고 있어요. 암도 고친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독일군 포로들이 시베리아에 끌려가서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특징이 있답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구나, 좋은 날이 올 때까지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야지.’ 사랑의 끈이 있는 사람은 쉽게 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모든 것이 유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늘 좋아야 좋은 줄 압니다, 오늘도 내일도 늘 좋아야만 합니다. 잘되어야만 합니다. 항상 좋은 소식만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비가 오고 천둥이치고 어둡고 캄캄한 밤이 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함께 묶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십니다.

욥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 .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병든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더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지금 사업 망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 풍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 불행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더 행복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 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래에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행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4-26)
하나님은 우리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고난의 일을 동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광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십니다. 고난의 본심은 우리를 잘못되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망하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원하시는 그 고난의 일도, 힘든 일도, 아픈 일도 그 때 당시에는 힘들고 아픈 일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그것이 우리의 복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고난도, 어려움도, 문제도, 힘든 것도 복이라는 것입니다.

옛말에 ‘새옹지마’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북방에 호족이 있었는데 한(漢) 나라는 이 호족을 대단히 두려워했습니다.
그 국경에 새옹이라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노인네 말이 국경을 넘어서 호나라로 갔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몹시 근심하니까, 노인은 말하기를 ‘이러다가 행운이 생길지 모르지 않소’라고 태연했습니다.
과연 몇 달 후에 그 말이 돌아왔는데 많은 말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축하하니까, 노인이 하는 말이 ‘이러다가 화근이 될지 모르지 않소.’라고 했습니다. 과연 얼마 후에 그 아들이 새로 들어온 말을 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위로하니까, 또 노인은 ‘천만에, 어쩌면 이 일이 행운이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호족들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옴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온통 활을 메고 싸움터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10명의 9명은 전사했지만 이 노인의 아들은 절름발이어서 전쟁에 나가지 않아서 무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인간만사는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창50:20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종으로 팔려갔던 그 길이 축복의 길이요, 성공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좋고 나쁜 것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좋은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좋게 이끌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인 일이나 개인적인 일이나 . . .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면서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출처/임경택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