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3
창세기22:7-15
1950년 6월 25일 문경에서 올라왔다가 정동제일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했던 장로교 김은석 목사가 목격한 6·25전쟁당일 서울시내의 모습입니다.
“12시 정각이 되자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며 각종 차량이 미아리 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고, 조용한 분위기라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않았다. 예배를 마치고 걸어서 화신 앞까지 갔는데 그 곳에서는 전에 없던 놀라운 장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수많은 청장년들이 흰 노타이 샤스에 머리는 수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트럭에 분승한 채 미아리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소문을 들으니, 지금 그 시간에 인민군들이 의정부까지 쳐들어와서 지금 막으러 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의 손에 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두 달 만에 대구, 포항, 마산으로 연결되는 경상남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 3년 만에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으로 양측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전쟁 중 사망자 실종자는 남북한 합쳐서 520만 명에 달하였고, 1천만 명의 이산가족들이 생겼고, 전쟁이재민은 남쪽에서만 2백만 명, 60만 채의 가옥과 5천개의 학교, 1천개의 병원이 파괴되었습니다.
6.25전쟁 일어난 지 57년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아현 중앙감리교회 창립50주년 기념사업으로 “6·25와 한국감리교회 순교자”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6·25때 순교한 감리교회 목회자 평신도 136명의 삶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22년, 짧은 기간에 오늘과 같은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내면적인 이유 중에 하나를 한국기독교역사 속에 나타난 순교의 사건과 순교자의 영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과, 일제 36년 동안에도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우리감리교회는 유관순을 비롯해서 재암리교회 사건 등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총채적인 재앙 속에서도 나라, 교회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건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6·25이후 소멸되어진 북한의 교회와 영적재건사업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야할 우리의 사명입니다. 특별히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금년 북한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교훈을 생각하는 4번째 시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쉽게 지나치는 이 부분에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집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일생동안 자신의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예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도록 하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빌립보서1:20,21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실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면 하나님이 그를 존귀히 여김을 받도록 하시겠다 하였습니다.
사무엘상2:20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할 수 있을까요?
1.하나님의 이름은 본래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성경에 세 가지로 계시되어져 있습니다. “엘로힘, 아도나이, 여호와”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특징과 속성을 드러내어 줍니다.
‘엘로힘’은 능력의 창조자, 만물의 원천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말합니다.
‘아도나이’는 “주님과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의 소유권을 가지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인데 1인칭으로 사용하면 “나는 존재한다···나는 변하지 않는다.” 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께 당신은 누구신지를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 때문에 존재하거나, 거룩해지거나 속되게 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거룩하십니다.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존재가 본래 거룩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할 수 있거나, 더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이미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룩하십니다.
우리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될까를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우리 영성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유대인으로서 이집트 바로왕의 공주의 양자로 입양되어 어릴 때부터 이집트의 왕궁교육을 섭렵하였습니다. 그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위대한 결단을 합니다. 히브리서11:24-26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자기 민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바로궁의 모든 영광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출애굽기에서 보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종의 움직임을 시작하는 모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자기 민족의 배신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로 나가 40년을 양을 치는 목동으로 지냅니다. 그는 애굽왕궁에서 배운 그 많은 지식과 영광이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하고서야 호렙산 중턱에서 타는 가시떨기 나무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어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은 그 자리에서 모세는 저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자기의 것을 내려놓는데 4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는 끝가지 자기가 붙드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라들도 있습니다. 하나니을 만나고서야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그 능력을 알 때 하나님은 그를 새워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급기야는 그리스도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일에 앞장을 서서 일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이 오히려 그에게는 올무가 되고, 일을 하면 할수록 그르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비로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날마다 죽고 사는 위대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고 펄펄 살아서 뭔가 멋있게 이루어보려는 욕망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2.그리스도인은 성도의 인격으로 승화되어가야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기도는 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이거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인정받으실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1)이 기도하는 엄격한 의미에서 나와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바꾸면 이런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격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불신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먼저 우리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복음을 알게 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이 기도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다 이루었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이 기도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나를 통하여 아직도 그리스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할 곳에 많이 있음을 인정하는 삶에서 이 기도는 더욱 간절히 드려지게 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여 괴로워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대적하고 싸우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대선주자들을 보십시오. 후보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케케묵은 미비들을 다 들추어내어 신문에 공개하고 방송하고 최악의 상태로 끌고 가도 견딥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입니다.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비판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돌아보면 성장과 성숙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첫째, 그리스도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해야합니다.
손님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에로 모셔 들이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요한복음1:12,13
그런데 하나님을 영접하는 수준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2:1-11에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예수님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더 이상 잔치가 정상적으로 계속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를 통하여 그 집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의 자리에 모시게 됩니다. 손님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에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삶의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과 우리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의 깊이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6:16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날마다 내가 죽어야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못된 성질을 죽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자기고집과 아집도 꺾어야합니다. 자기 중심적인생각을 버려야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큰 마음을 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인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이 내 인격과 삶 속에 형성되고 실현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예수를 본받아야합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해야합니다.
넷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모든 것이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알아야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약15살 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 하셨습니다. 이 기막힌 사실 앞에서 아브라함은 혈육 곧 그의 가족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산으로 아들과 함께 올라갈 때, 아들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준비하셨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담아 말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대답에 이삭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서 산위에 올라가서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그 위에 올려드립니다. 칼을 들어 그 아들을 희생의 제사로 드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급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수양 한 마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삭을 대신하여 그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그 위대한 말 “여호와 이레” 라는 말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로 온 세상에 드러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 속성을 계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는 믿음과 그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로마서4:17,18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언제나 최상의 것을 준비하십니다.
“여호와이레”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오늘도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미래를 아무것도 모릅니다.
바로 다음순간에 어떤 일이들이 벌어지게 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키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원래 이 절기를 보리추수가 끝난 다음에 드리는 신앙인들의 절기입니다. 한해의 절반을 지난 다음의 감사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드려야할 감사가 많습니다. 매주 하나님께 드려야할 감사가 많습니다. 매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추수감사주일도 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쳐라 불려진 성산 장기려박사에 일회가 있습니다.
그는 1947년 김일성대학외과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6·25때 둘째 아들과 월남한 이후 복음병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봉사하다가 1995년 84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홀로 사셨습니다. 1970년대 명동부근의 사무실에서 만난 친구가 재혼을 강력히 권면하는 말을 물리치고 나오다가 계단을 헛디뎌서 발목의 아킬레스 근이 끊어지는 불운을 경험하였습니다. 급하게 백병원에 입원하여 있으면서 그는 세 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첫째, 지금가지 자기 힘으로 잘 지낸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호해주어서 잘 지낸 것을 알게 되어 감사하고,
둘째, 그 동안 바빠서 친지, 제자들을 만날 틈이 없었는데 많이 문병오니 그들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고,
셋째, 읽고 싶었던 책을 읽게 된 것을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그 때 부상이 가벼운 것이 아니었는데도 잘 빨리 치료되어 테니스까지 할 수 있어서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2007년의 절반을 살아왔습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감사하는 절기를 잘 지키십시다.
6·25의 상처 속에서 오늘의 풍요와 번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무엇보다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