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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정성 회복에 전력투구
학자들은 루터시대의 종교개혁이 종교영역을 넘어 사회구조적인 개혁으로 진행됐다는데 주목하면서 21세기 한국교회의 개혁추진 방향이 단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우려를 나타낸다. 과연 학자들의 지적처럼 루터는 중세교회 개혁을 넘어 당시 사회개혁까지 염두에 두면서 교회개혁운동을 주도했을까.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역사신학)는 루터의 개혁운동은 당시 구텐베르그에 의한 금속활자 덕분에 활개를 치던 신흥 상공업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지지를 받아 유럽전역으로부터 동조자를 얻는 쾌거를 얻었다고 했다.
루터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즉, 루터는 종교개혁에 집중한 것이지 사회개혁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실 루터는 사회구조적인 개혁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했다는 것이 교회사의 기록이다. 사가(史家)에 따라서는 루터의 이같은 모습이 사회개혁을 원하지 않는 단적인 증거라고 하면서 ‘루터의 개혁정신은 종교에 국한한 것’으로 단정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토마스 뮌쩌에 대한 루터의 단호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루터와 뮌쩌는 개혁동지였다. 루터의 개혁조치를 열렬히 지지하던 뮌쩌는 특별히 농민층(당시에는 농노)의 지지를 이끌어 내며 중세사회의 악압적 요소들이 철폐되는 날을 선전했다.
결국 농민층의 요구를 대변했던 뮌쩌는 농민전쟁의 선봉에 서게 됐고 루터는 반대편에 서게돼 피 튀기는 전쟁을 해야만 했다.
루터는 왜 절친한 뮌쩌와 원수처럼 싸워야 했을까. 루터는 당시 성장하고 있던 소시민(쁘띠 부르조아)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이었다.
소시민층은 지리상의 발견으로 무역과 상공업 등이 번창하던 당시 사회변화 추세로서는 중세적 억압요인 이던 교회의 힘을 꼭 빼야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토지를 중심으로 한 중세 경제체제(=장원제도)는, 미약한 형태이지만 소위 자본 중심의 경제체제로 이행(移行)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교회에 대해 일대 조치가 요구되고 있었다.
이는 루터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꼭 개혁의 선봉에 나서야 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루터의 비텐베르그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애초 생각과 달리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유럽 일대를 휩쓸었던 것이다.
결국 시대의 요구를 잘못 읽은 뮌쩌는 농민층의 욕구에 집중한 반면, 루터는 교회가 가르치는 왜곡된 교리가 교회부패와 사회부패를 동반한다고 보고 교리회복에 치중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소시민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결과를 낳아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공의 길을 갔던 것이다.
우리는 루터를 개혁가로 만 이해하지 중세교회 사제로는 생각하지 못한다. 소위 성직자가 가져야 할 가치관을 생각하는 대신 개혁지도자의 가치관으로만 생각함으로써 루터의 개혁 진정성을 사회개혁 측면에서 강조하려고 만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 이름을 빗대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던 인본적 중세교회의 부패상을 철저히 폭로하며 복음의 진정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종교개혁자임과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던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를 깨달은 시대의 선각자였다.
루터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성직자로서 혹은 신앙인으로서 개혁문제를 어느 선까지 나아갈지 또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 사회개혁의 그것들과 비교해서 그 범위와 한계, 방법론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