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
전도서 11:9-12:1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1:9-12:1)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청년이 변해야 교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세계가 변합니다. 청년의 때는 감격성이 있습니다. 순수함이 있습니다. 진취의 기상이 어느 때보다 청년의 때에 넘칩니다. 그런가 하면 성취의 의욕도 창조적 잠재력도 청년의 때에 충만합니다.
오기 충만(五氣充滿)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기란 우리의 인격에서 다섯 가지의 기가 풍길 때 바람직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이 잘못 사용되어질 때 속어가 되기도 합니다.
첫째는 몸에 생기가 있어야 합니다.
심신 강건, 보무당당, 의기양양은 생기가 넘치는 데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기가 있어야 합니다.
눈은 얼굴을 대표합니다. 눈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괴테는 눈을 “감각의 영왕”이라 했고, 플라톤은 눈을 “인간의 태양”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정기 어린 눈이 사물의 도리를 바로 보는 활안과,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혜안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구안과, 밝게 빛나는 형안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얼굴에 화기가 있어야 합니다.
캬논 박사의 연구 발표대로 얼굴 색깔과 내장 색깔은 같습니다. 얼굴에 화기가 있다는 것은 마음이 온화하다는 것입니다. 얼굴은 개성의 인장이라 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얼굴은 정신의 문이요 초상”이라 했습니다.
링컨은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역설하면서 당시 전국에 미소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옛날 코메디 프로 이름 가운데는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제목도 있었습니다.
넷째는 머리에 총기가 있어야 합니다.
총기란 현명한 것이며, 영리한 것이며, 명철한 것이며, 슬기로운 것입니다.
총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귀가 밝고 눈이 밝아야 합니다. 구가 밝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알고 옳게 판단할 줄 아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마음과 인격에 덕기가 있어야 합니다.
덕은 인지대본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근본입니다. 덕은 인격에서 풍기는 훈훈한 향기입니다.
인격의 삶에서 무엇보다도 덕스러움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오기는 청년에게 충만해야 할 바람직한 내용들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간추려 오늘 본문의 전도자는 청년에게 아주 지혜로운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12:1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풀어 말씀을 드리면 창조자를 기억하는 삶은 오기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가장 본질적 삶이 창출됩니다. 그 삶의 내용을 오늘 말씀 안에서 정리하여 특히 청년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1. 청년의 때에 겉푸름이 아니라 속푸름이 살아야 합니다.(전 11:1-6)
11:1-6절의 말씀 내용은 신앙인으로서, 특히 청년의 때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우치는 교훈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터전 위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라는 권면인데 내용을 보면 속푸름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남에게 베푸는 삶(11:1-3)과 최선을 다하는 삶(4-6)으로 대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청년기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젊을 때는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다반사인데 남에게 베푸는 삶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깨우치고 교훈합니다.
일생을 어느 누구보다도 모든 분야에서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솔로몬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귀중한 삶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일생을 사는 동안 청년의 때에 속푸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를 확신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9에 청년에게 주는 귀한 교훈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이것이 바로 속푸름의 삶입니다.
나이는 젊으면서 마음은 늙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늙었는데 마음은 젊은 사람이 있습니다.
생리적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연령이 중요한 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음이란 무엇입니까?
청년의 혼을 가진 사람이 청년입니다. 몸이 젊을 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젊어야 합니다. 청년의 때에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한 성경의 훌륭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보리 타작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이해 사명을 감당하는 속푸름에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불굴의 신앙으로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왕 시대를 거치면서 믿음을 지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강직한 신앙으로 속푸름에 살았습니다.
디모데는 목사로 임직을 받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나이 적다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 정도로 모든 면에 모범된 속푸름에 살았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이후 자신의 모든 부귀와 영광도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속푸름에 살았습니다.
스데반은 젊은 나이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개인적 삶의 영광인 겉푸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속푸름에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속푸름에 산다는 것은 순수성이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사이비적인 생각이 아니고 바람직한 생각을, 그리고 개인적 이기적인 사심이나 욕망이 없는 것을 순수성이라 합니다.
젊다는 것은 바로 이런 멋을 가진 것입니다. 이 멋이 없을 때 이미 그는 청년이 아닙니다. 마음이 맑지 못하고 썩어 냄새나듯, 그런 혼탁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는 젊은 혼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거지와 같은 근성이라든가, 창부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그는 젊은이가 아닙니다. 되지 못한 아집과 오만은 순수성이 아닙니다. 청년이 한 잔 걸치고 길거리를 비틀거리는 것은 순수함이 아닙니다. 청년이 사회악을 보고 방관하는 것도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혈안하고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도 순수성이 아닙니다. 이해 타산에 밝고, 사리사욕의 노예가 되고, 현실과 안이하게 타협이나 하고, 무사 안일이나 꿈꾼다면 그는 청년이 아닙니다.
또한 속푸름에 산다는 것은 이상을 가지고 진취적인 기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이란 철학적인 용어로서 이성에 의해서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닐 수 있는 꿈입니다. 꿈이 없으면 이미 청년이 아닙니다.
강도에게, 술중독자에게, 마약 중독자에게, 수전노에게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상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작은 일에 좌절하거나, 쉽게 절망하거나,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거나,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것은 청년이 아닙니다. 비겁하고, 우유부단하고, 좌절하고, 패배감을 가지는 것은 젊은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독일의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는 “내가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세 마디 분이다. 젊은이여 일하라, 좀더 일하라, 끝까지 일하라”고 역설했습니다.
“소년이여 꿈을 가져라”
속푸름에 사는 것은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성장과 감격성, 그리고 미래를 향한 진취성을 가지고,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욕과 장래성과 창조적 잠재력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속푸름에 사는 것입니다.
2. 청년의 때에 인생의 지우개가 없음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 11:9-10의 말씀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인생의 지우개는 없으니 일생을 사는 동안 사람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말할 것 없이 청년의 때에 더욱 그러하라는 것입니다.
7-10절의 말씀의 요약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이란 현재를 즐기면서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7-8절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현재적 삶을 마음껏 즐기도록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잘못 오해하면 마음껏 세상적인 향락만을 추구하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전도자의 본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7절 말씀의 요지는 인생을 살아갈 때 비판적인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의 삶을 기쁨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이 주신 사람을 열심히 즐기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절 하반절에서 전도자는 이생을 즐기되 적극적으로 낙을 누리는 삶에 제동을 걸고 인생이란 땅 위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사후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좀더 올바르게 살아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10절에서 인생은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인생의 낙을 누리는 삶에 대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이 즐김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엄격하게 판단하겠다는 사실은 그것이 영원한 삶의 토대가 됨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요약이 한 마디로 인생은 지우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풀어 말씀 드리면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19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내세에 대한 소망이 지나친 나머지 현실 도피나 비관적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되며 오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우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삶에 대해 선악간에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유념하고 모든 언행심사를 조심하며 의롭게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5:10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인생의 지우개가 없음을 안다면 우리는 마땅히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교훈은 특히 청년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혈기 방장한 젊은이는 옳고 그른 것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방탕과 죄악의 길로 쉽게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정리되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하루하루 좋은 날을 씨앗 심듯 살아야 합니다. 좋은 씨앗에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나쁜 씨앗에서 나쁜 열매를 거둡니다.
인생의 가장 좋은 부분이 청년의 때인 만큼 청년의 때를 하나님 앞에 심는 젊은이가 축복의 일생을 거둘 수 있습니다.
청년의 때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뒤를 돌아보지 말고(눅 9:62), 쉬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살전 5:17), 신앙의 경주를 하되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며(빌 3:14), 원수까지 사랑하는 감격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마 18:22)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지우개가 없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청년의 때에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12:1)
12:1의 말씀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12:1)
여기의 “곤고한 날”은 ‘에메 하라아’(הערה ימי)로서 원어상 “악한 날들”(the evil days)을 뜻하는데 본문에서는 인생의 노년에 맞게 될 “쇠약한(괴로운, 역경의)날들”을 의미합니다.
그날이 임하기 전, 청년의 때에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기를 싫어합니다. 오래 젊음을 간직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열흘 이상 피지 못하고 권세는 10년 이상을 지탱하지 못한다”는 ‘花無十日 權不十年’이란 말처럼 젊음은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청년의 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창조자를 기억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 있는 삶입니다.
둘째,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근심과 악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심판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일성의 생명을 가지고 일회성의 생애를 살아갑니다. 이 삶에서 어떤 인생관을 가지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허무주의의 인생관을 가지면 허무한 이생을 삽니다. 이상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면 성실하고 진지한 인생을 삽니다.
칼 힐티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 목적에 쓰겠다고 작정한 그 목적을 깨닫는 것이다.”
청년 여러분! 청년의 때를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겉푸름이 아니라 속푸름에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지우개 없음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여러분이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광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