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28


사람이 겪는 고통 중에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심리적 고통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고, 염려, 걱정, 근심, 불안에 시달리는 고통을 많이 받습니다. 두 번째는 지구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질병의 고통입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인류에게 매우 심각합니다. 세 번째는 환경적인 고난입니다. 홍수, 지진, 기타 여러 가지 천재지변과 전쟁으로 인한 환경, 물질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환경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 어떤 고통을 안고 있습니까? 심리적입니까? 질병입니까? 환경입니까? 우리는 어떤 부류이든 고통을 나누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

   본문에 보면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주님나라의 좌우편에 앉혀달라는 청탁을 합니다. 이 여인은 그 당시 갈릴리 부잣집의 마님정도 되는 살로메입니다. 두 아들은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과도한 부탁을 주님께 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면서 간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열 제자들이 분노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반응입니다. 어머니가 두 아들을 위해서 부탁한 것은 무리한 부탁입니다. 열 제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부탁입니다. 여인은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신체적으로 아무런 고통이 없지만 두 아들을 주님 나라의 좌우편에 앉히고자 하는 심리적인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대한 고통입니다. 아주 집요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두 아들의 문제를 안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부탁입니다. 열 제자들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이 여인은 두 아들의 문제를 그렇게 주님 앞에 거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아집이고 타락의 모습입니다.
   요즘 우리가 심각하게 기도제목으로 삼고 기도할 일은 우리 사회의 분열현상입니다. 한 때 우리는 지역분열과 같은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세대간에, 계층간에, 경제인간에, 군대, 교육계 뿐 아니라 언론까지도 분열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극심합니다. 왜 분열이 일어납니까?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말과 의견, 상대방이 갖고 있는 입장에 대해서는 인식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분열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경제가 부흥하면 뭐합니까? 수출이 잘 되면 뭐합니까? 우리 내부 안에 분열이 심화되어 간다면 모두가 파멸입니다. 남북이 갈라진 것만 해도 민족적 아픔인데 오늘날 왜 우리끼리 이렇게 분열이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상대방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원로들의 말을 한마디로 일축해버립니다. 지난 날의 상처가 있는 인물들이라고 한마디로 매도해 버립니다. 그런 논리라면 하나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100점짜리 부모입니까? 우리의 부모들, 우리 조상들에게도 상처가 있고, 허점이 있고, 못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조상들이 조상답지 못하다고 해서 조상이 되지 않습니까? 오늘날은 어른들을 몰라보고 있습니다. 어른들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 세대 간의 분열은 극심합니다. 말로 못하는 현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하면서 노래를 부르지만 북쪽에서는 주체사상 의식을 가지고 통일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막연한 감상을 가지고 생각 없이 통일이라고 하는데, 북쪽에서는 그렇게 통일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북쪽에서는 통일이라는 용어만 나와도 엄숙해지고 긴장합니다. 왜냐하면 주체사상으로 통일한다는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캄보디아에 가서 북한 사람이 경영하는 평양냉면집에 가서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형 같은 딸아이들이 거기서 공연을 했습니다. 밀양아리랑을 부르고, 민요도 부르는데 통일노래를 부를 때는 방긋방긋 웃던 얼굴이 다 사라집니다. 마치 신전 안의 신상 앞에 서 있듯이 통일노래를 부릅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가지고 통일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이 표정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분열을 없애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기 바랍니다. 이 땅위의 분열은 그냥 지켜보고 구경할 분열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인식하지 않고, 상대방을 용납지 않는 것은 너 없어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너 없이 내 의견만 가지고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사람은 나 혼자서는 살수 없습니다. 너도 있어야 합니다. 나와 네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왜 분열 현상이 일어납니까? 섬김의 철학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 문제를 아주 엄숙하게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살로메와 두 아들과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 “큰 자가 되고자 하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나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 섬김의 복음을 주님께서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은 그저 남에게 대접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섬김의 세 가지 요건

   복음적인 섬김은 세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발적 섬김입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억압 속에서 강제적으로 하는 섬김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기독교의 섬김입니다. 둘째는 목적이 있는 섬김입니다. 주님은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섬김은 자기 몸을 대속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 번째는 주님은 자기 생명을 드렸습니다. 최선입니다. 기독교의 섬김은 최선입니다. 흉내 내는 섬김이 아닙니다. 자발적, 목적, 최선이 있는 섬김을 복음적 섬김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섬김입니다.
   주님은 메시야로 섬겼습니다. 그 섬김을 우리가 따라 가야 합니다. 복음은 고백이 아닙니다. 감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명상의 주제가 아닙니다. 복음은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은 자기를 좇아오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주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좇아가는 그 따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주님께로 가면 무엇이 다가옵니까? “나는 섬기러 왔노라”는 주님으로 다가옵니다. 섬기는 그 예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섬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가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섬김이 있는 곳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기는 메시야로 오셨고, 그 섬김이 우리에게 구원으로 임한 것입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국인을 지배하는 세 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팔자의식입니다. 샤머니즘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고 은혜 받아도 팔자타령을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팔자타령 하지 말기 바랍니다. 성도의 의식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나면 팔자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 땅에 나서 하나님이 보낸 존재인데 인간이 만든 세속이 만든 팔자에 메어 버리는 불우한 인간이 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불교사상에서 나온 인연입니다. 지옥에 가서도 ‘내가 지옥에 온 것은 인연이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만사를 인연으로 받아들입니다. 무슨 인연이라는 말입니까? 인간이 만든 세속철학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진리 안에서 자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면 모든 인연을 초월합니다. 예수님 만난 것보다 더 위대한 만남은 없습니다. 어떤 불행한 만남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다 극복됩니다. 세 번째는 운명론입니다. 이것은 이교철학이 만든 것입니다. 문학이 만든 것입니다. 운명은 없습니다. 날 때부터 운명 지어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운명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우리의 운명이 운명에서 해방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섬김을 통하여 극복되고, 해방되고, 자유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섬길 줄 모르면 팔자에 매입니다. 운명에 매입니다. 공부 많이 했습니까? 공부 많이 한 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지식 한계 아래에서 매이는 운명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돈 벌었습니까? 그 돈으로 섬길 줄 모르면 돈이 여러분 인생을 지배하는 돈의 운명에 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지만 왜 그가 하나님이 됩니까? 왜 그가 메시야가 됩니까? 우리 하나님이 원하는 일에 섬김의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주님은 자연인 인간으로 살다가 죽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메시야가 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섬김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섬길 줄 모른다면 한 마리의 소와 돼지의 삶과 방불합니다. 짐승들은 섬길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섬김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섬김의 지도자상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350년간 백인이 지배하는 유일한 나라, 아프리카에서 백인 사회가 주도하는 나라가 남아공입니다. 세상이 변하여 흑인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만델라는 정적에 의해서 27년간 감옥살이에 시달렸습니다. 27년간 정적에 의해서 죄 없이 압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젊음을 송두리째 감옥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세상이 변하여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취임하면서 제1순위로 선포한 것은 “용서와 평화”입니다. 그는 27년간 자기를 괴롭혔던 모든 정적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치이념은 오직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퇴임한 이후에 만델라만큼 인류에서 존경받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그 분은 어느 나라, 어느 종족, 어느 시대라도 최고의 영웅으로 찬사를 받습니다. 만델라가 주창했던 용서와 평화는 섬김의 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 복음 안에서의 평화, 그것이 섬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만델라는 원수를 섬겼습니다. 만델라는 세계 인류를 섬기고 있습니다. 노벨 평화상도 주고 나고 후회하는 대상자가 많습니다. 여러분, 땅위의 상은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 받는 실수가 있습니다. 금년에 평화상 받고 1년 후에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델라의 평화상은 역대 평화상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의 몫을 묶어도 그 이상의 영향력이 없다고 평가합니다. 그는 진정 평화의 사도입니다. 그가 방문한 나라는 전쟁이 그칩니다. 방문하는 그 기간만이라도 싸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만델라에게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섬김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도자이든, 피 지도자이든 무명의 인생이든, 그것은 사람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은 주님 자신이 한창 전성기에 복음을 전하던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알은 바로 자기 자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알은 자기를 따르는 모든 성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는 씨앗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섬김을 말합니다. 섬기는 자는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타인을 살려주고 내가 죽는 것이 섬김입니다. 여러분이 귀빈들을 대접해 보면 대접받는 상대방을 높여주고, 대접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는 분위기라야 그 대접이 바로 된 것입니다. 손님을 모셔놓고 자기 자랑하고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면 섬김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고 나는 낮아지는 것이 진정한 섬김의 예의입니다.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죽어야 섬김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폴 트루니에는 인생을 세 분기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아동기라는 것입니다. 소유기, 그저 가지려고만 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만약 아이들이 어릴 때 욕심 부리는 일이 없다면 그 아이는 상당히 문제아입니다. 오늘도 욕심 많다고 고민하는 부모가 계시거든 정상인 줄 알고 심리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청년기입니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청년의 개념은 젊다, 힘 있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꿈을 이룬다는 개념입니다. 인생은 꿈을 성취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꿈을 이루고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장년기입니다. 남을 섬기는 시기입니다. 영적인 개념으로 보면 나이가 젊다고 해서 인생의 청년기가 아닙니다. 나이가 젊어도 남을 섬기는 삶을 살 때 그 사람의 인생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인생의 장년기입니다. 아무리 성취하고, 아무리 나이 들고, 경륜이 있어도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면 인생의 유아기적 모습입니다. 자기욕심만 부리고 유아기적 인생으로 끝내는 인생이 많습니다. 트루니에는 정신과 의사이면서 위대한 성경학자입니다. 이 분이 인생을 논한 것은 매우 영적이면서도 관찰력이 심오합니다.
   이번에 국정감사에서 국가기관의 기업들이 예산을 별세계처럼 쓰고 있는 것이 지적되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그런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의 40%가 정부기관에서 낙하산 인사로 된 사람입니다. 현직 때는 연봉이 6,7천만원 밖에 되지 않아도 퇴직 후에 국가기관, 국가기업의 임원이 될 때는 드러난 것만 1억 이상의 특혜를 받고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특혜는 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항목이 너무 많아서 열거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끼리만 배부르면 전부라고 하는 의식, 나라야 사회야 어떻게 되든지, 우리만 배부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모든 분야에 팽배하고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섬긴다는 것은 벌써 박물관에 보내야 할 철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물관에 보내야 할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섬김의 삶을 실행해야

   이제 영국속담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 한 주일을 행복하려면 여행하라. 한 달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1년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 이 말은 풍자적입니다. 1년만 생활하고 헤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혼의 기쁨이라는 것도 아무리 만족해도 1년 이상을 보장하지 못하는 세속적인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고 20, 30년 해로할 때까지 오늘만 같아라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평생을 행복하려면 이웃을 섬겨라.’ 이것은 성경적인 사상에 바탕을 둔 영국의 속담입니다. 섬김의 삶은 평생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섬김은 주님이 가신길입니다. 이 길에는 수고와 땀과 희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하나님의 영광스런 언약과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 있는 사람 중에 두 사람을 좋아합니다. 한 사람은 야곱이고 한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요셉을 연구해 보니 이해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부귀, 영광, 출세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런 자리에 섰다면 오늘 우리들의 사회 심리 같으면 제일먼저 보디발의 부인을 불러다가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형님들만 생각하면 이가 갈려서 잠이 안 오는 사람입니다. 형들을 불러다가 복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11번이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빌라도를 찾아가야 합니다. 빌라도를 공개재판을 해서 공개처형해야 합니다. 네가 불법재판을 해서 내가 죽었다고 처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괴롭힌 대제사장들, 가야바, 안나를 비롯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일등공신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차례로 불러다가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부활 후에 원수 집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야곱의 생애를 보니, 요셉이 총리가 되어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므낫세를 낳았습니다. 에브라임을 낳았습니다. 두 아들을 낳고 요셉이 하나님 앞에 찬양한 내용이 있습니다. 므낫세를 낳고 요셉은 “내 수고와 고난과 아비집의 모든 일을 잊게 하셨도다.” 요셉은 아비 집만 생각하면 못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형님들이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압박했던 형님들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부귀영광을 얻고 아들을 얻은 기쁨의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이 내 아비집의 쓰라린 모든 과거를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지난날의 상처를 잊어야 섬김의 길로 갑니다. 과거에 얽매인 사람들은 절대로 섬길 줄 모릅니다. 사람에게 얽매인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섬기지 못합니다. 요셉은 원수 형님들, 고향 아비 집에 대한 원한과 반감을 다 잊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아 놓고 “여호와께서 나를 창대케 하셨도다.” 지난날의 상처는 잊고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축복만 붙잡은 요셉의 철학은 애굽을 흉년에서 구원하고, 애굽을 찾아온 가나안 사람을 구원하고, 자기 집을 구원하고, 형과 아비와 모든 원수들까지 요셉은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 다 하고나면 섬길 기회가 없습니다. 원수를 잊어야 섬길 기회가 옵니다.
   야곱도 욕심꾸러기입니다. 형님의 축복을 가로채서 형님 눈에 나서 그만 집을 떠나 외삼촌집에 가서 외가살이를 합니다. 그런데 외삼촌 라반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둘째딸 라헬을 야곱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얘, 너 7년간 머슴살이 하면 내가 둘째 딸을 주마.” 하고 약속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7년을 하루같이 일했다고 합니다. 사랑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그런데 외삼촌이 둘째딸을 약속대로 주지 않고 못난이 레아 첫째 딸을 주었습니다. 야곱이 사기 당했습니다. 야곱은 결혼 사기경력이 있는 상처가 있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7년 동안의 임금착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념은 기어코 둘째 딸 라헬을 얻어야겠다는 신념으로 불리한 계약을 맺습니다. 7년 더 머슴살이 하면 둘째 딸 라헬을 주겠다는 계약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14년 동안 임금착취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훗날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된 다음에 야곱이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나의 수고와 땀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갚으셨다.” 멋있는 기도입니다. 오늘 제가 인용한 말씀은 창세기 31장 42절, 41장 51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수고와 내 고난을 감찰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14년 동안 외삼촌에게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야곱이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외갓집이 부자 되도록 공헌한 사람입니다. 외삼촌을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의 섬김입니다. 외삼촌에게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야곱은 후에 “하나님이 내 손의 수고와 내 땀을 다 감찰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나쁜 일을 하면 안 되지만 남을 섬기는 일에는 인간적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땀을 흘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갚아주셨다는 족장의 경험을 중요하게 다루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일생을 살고 나서 ‘아! 나의 생애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땀과 수고를 갚아주셨구나!’ 그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찬양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

   맺는 말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섬김의 길은 고난의 길, 수고의 길, 땀이 있는 길이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수고와 땀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함께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 앞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삶은 어떤 면에서 고달픔입니다. 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끼리만 당하고 마는 억울한 땀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갚아주십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