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4:7-10

   얼마 전에 우리 사회에 만두파동이 있었습니다. 벌써 패기처분 해야 될 재료들을 가지고 만두속을 만들었다 해서 쓰레기만두라 했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는 그 만두 하나만이 아닙니다. 그 만두가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사건이 된 것 뿐입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불량식품, 불량의학품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 만두 하나만 가지고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갈등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모든 분야마다 우리는 마치 그 쓰레기만두 속처럼 겉으로만 포장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장에서의 경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경건은 기독교 용어 중에 아주 강조됩니다. 한 때 교회사 안에 경건주의 운동이 발생했습니다. 경건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말은 매우 영적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수도사적인 그런 의미로 경건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건이라는 이 말은 헬라어를 보면 두 가지 말이 합해졌습니다. “유세베이아.” ‘유’라는 말은 영어로 ‘well’ ‘좋은’ ‘바른’ ‘잘’이라는 뜻입니다. '세베이아'라는 말은 '세보'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인데 서비스라는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세비이아’ 라는 말은 어디서든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게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수도원 안에서의 경건이 아닙니다. 예배당 안에서의 경건이 아닙니다. 이 경건은 유혹이 있고 도전이 있고 투쟁이 있고 경쟁이 있고 장애물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건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인기와 명예와 물질과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침해당하는 사탄의 유혹이 있는 우리들의 직장에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 경건은 보존되고 지켜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경건한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호칭은 아무에게나 붙혀 주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12편 1절에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을 볼 때 경건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서 이 말세의 죄악을 말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다 있다, 그러나 경건의 실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2절에서는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라”고 했습니다. 아무렇게 살지 말고 경건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에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을 하라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경건은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고 증명되는 기독교의 덕입니다. 리빙 바이블에 보면 “Spend your time and energy”라고 나옵니다. 네 시간과 힘을 쏟으라는 말입니다. 경건은 내 시간과 내 힘을 쏟아 붓는 것이 경건의 연습입니다. 시간을 들이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서 에너지를 쓰지 아니하면 경건의 연습이 되지 않습니다.
   엥겔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 국가에 엥겔지수를 나타내는 지표가 있는데 이것이 국가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전체 생계비 지출 가운데 먹고 사는 음식비 지출이 얼마냐 하는 비율입니다. 그러니까 엥겔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후진국입니다. 우리나라가 5, 60년대는 그저 농사지어 먹고 살고, 장사해서 먹고 사는 거기에 집중했습니다. 그 비율이 높았던 후진국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도, 영적인 엥겔지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에너지를 드리는 비율이 낮으면 낮을수록 영적인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육을 위해서 시간을 다 바치고 에너지를 다 쓰면 그 사람이 영적인 후진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천재는 경건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천재는 창세기를 한 번 읽으면 다 외워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열흘 걸려서 창세기를 한 번 읽습니다. 매일매일 몇 장씩 열흘 동안에 읽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성은 천재가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경건성은 반복하는데 있습니다. 연습하는데 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매일매일 노력하고,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말씀을 접하는 연속성이 경건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왜 경건을 연습하라고 하느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죽어도 그 덕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경건한 사람 에녹, 경건한 사람 노아, 경건한 사람 요셉, 경건한 사람 바울, 경건한 사람 주기철 그 분들은 갔지만 그들의 경건은 오늘 우리에게 강력한 교훈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5일제와 주일

   요즘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우리 교회 앞에 나타날지는 예측불허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야 되는데 바로 주5일제 근무가 주는 우리 사회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강타할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여기저기서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벌써 ‘왜 하필 주일인가?’ 라는 주제로 주일날 드리는 우리 예배가 순서도 똑같고 형식도 같이 드린다면 다른 날 드려도 예배가 되지 않는가? 꼭 주일을 고집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공개적으로 일부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밀려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여행프로그램도 2박3일 혹은 3박4일로 주5일제에 맞추어서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어떤 반응들이 일어날지는 모릅니다. 상당히 매력이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떠납니다. 그리고 주일날 밤에 돌아오는 2박3일, 이렇게 하면 어지간히 먼 나라도 전부 여행이 다 됩니다. 심지어 홍콩이나 싱가폴 정도는 금요일 오후에 가서 월요일 아침에 출근시간에 맞추어서 귀국을 시켜주는 이런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거기에 지금 응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분명히 말하는 것은 ‘왜 주일인가?’ 라고 하는 이 말 앞에 우리는 ‘반드시 주일어야 한다’고 확고하게 우리의 다짐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주일이 무너지면 기독교의 경건의 방패가 무너집니다. 주일은 그냥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기독교의 경건을 유지하는 기초입니다. 터전입니다. 주일날 우리가 나아와서 예배드리는 이것은 경건을 연습하는 기초입니다. 이것부터 해야 됩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 일에 게을리 하면 경건의 기초가 무너집니다. 안타까운 것은 주일날 두 번 예배드리는 그것도 안 되는 교인들이 태반입니다. 두 번도 예배를 못 드리고, 두 번도 설교를 안 들으려고 하는 오늘 우리들의 세태입니다. 경건은 연습하고 끊임없이 투쟁하고 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 과정이 없으면 경건은 성립이 안 됩니다. 제가 경건에 관한 많은 이론을 말할 수 있지만 오늘 여러분 앞에 성경에 나와 있는 경건한 사람 두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셉의 경건

   첫째는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는 경건을 입증한 사람이고 우리 앞에 경건이 무엇이다 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의 주인은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입니다. 그 지체 높은 귀족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준수한 청년 요셉에게 나와 같이 동침하자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보디발의 아내의 기질이 음탕하거나 나쁜 여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시면 보편성이 없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보면 중동의 고대사회에서는 상전들이 반듯한 여종을 전부 성적 노리개로 즐겼습니다. 그리고 귀족 부인들이 남종들 가운데 인물이 준수한 남종들과 함께 성적으로 놀아나는 일들은 그 당시의 풍조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라비안나이트를 보셨을 것입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스토리 중에 귀족부인과 노예 남자들이, 상전들과 여종들이 놀아나는 지저분한 스토리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같은 폐쇄적인 유교문화에도 양반사회에서 상전들이 하인들의 여자를 건드리고 성적으로 유희하는 일들은 허다히 있었다고 전합니다. 야사에서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디발의 부인이 요셉을 희롱하고 유혹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풍조입니다.
   요셉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주인께서 이 집의 제반 모든 것을 내게 맡겼지만 금한 것은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그의 부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9장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무서운 말이 하나 나옵니다. 유혹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한번 툭 건드려 보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보디발의 부인이 날마다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일부러 그 여인과 안 부딪히려고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1-12절에 보면 “어느 날 그 집에는 아무도 없는지라”고 합니다. 요셉과 그 여인 외에는 아무도 없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여인은 요셉을 유혹합니다. “나와 함께 동침하자. 이 집에는 아무도 없느니라.” 결정적인 순간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때 요셉은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주모를 겁탈하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던져집니다.
   이 요셉의 스토리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몇 가지 점검을 해야 합니다. 유혹은 반복됩니다.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에게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날마다 다가오는 유혹을 받아야 되는 요셉의 삶의 현장은 비장한 투쟁과 각오가 없이는 헤쳐 나갈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런 일에 호기심을 가집니다. 체면상 몇 번 거절하다가 ‘웬 떡인가’ 하고 모두가 달려드는 것이 남성들의 기질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끝까지 그 여인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부인이 인물이 못나서가 아닙니다. 귀부인입니다. 모든 남성들이 탐낼만한 그 당시의 최고의 귀족입니다. 그런데 왜 요셉은 이 여인의 유혹을 끝까지 거부했습니까? 그것은 요셉의 중심에 있는 경건 때문입니다. 요셉이 갖고 있던 경건의 믿음이 이 여인을 마지막까지 거부한 것입니다.

   경건의 세 가지 적

   오늘 우리 현실에도 온갖 유혹이 있습니다. 사탄의 도전이 있습니다. 충동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극복해야 합니다. 불꽃 튀는 삶의 현장입니다. 저는 직장 생활도 오래 해 보지 않았고 사업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겪는 현실감각을 경험해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지식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오늘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말하면, 첫째 돈의 유혹입니다. 대통령도 고관도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예술가도 군대 장군도 어느 누구도 돈의 유혹 앞에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강렬한 돈의 유혹 앞에 우리 모두는 지금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돈의 유혹 앞에 자유롭지 못한 세대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고 않고 설치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제발 우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을 접하면 그것이 불행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이 돈을 가지고 사람을 얽어매든지 상처를 주든지 하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이 사탄은 돈의 유혹으로 오늘 우리의 경건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동산이나 부동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많든 적든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그 생각이 벌써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은 네 것이다.’ ‘이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마귀는 이런 생각을 자꾸 줍니다. 그 생각을 돌파하지 못하면 경건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가 주신 것으로 고백을 하고 이 물질을 바로 벌고 바로 사용해야 합니다. ‘유세비아’는 바로 섬긴다는 말입니다. 돈을 바로 벌고 돈을 바로 사용해야 경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의 유혹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과 우리 아들세대, 손자세대를 생각해 보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밀려오는 염려는 동성애, 에이즈 문제입니다. 이것은 비집고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들어와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동성애 붐이 젊은이들 세계에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유니섹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옷 모양, 머리모양, 남자, 여자 구별 없이 유행하는 유니섹스입니다. 요즘 미장원에 여자만 갑니까? 청바지를 남자만 입습니까? 복장이 남자, 여자 이제 구분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문화입니다. 이 유니섹스 문화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청바지를 남녀가 함께 입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성연애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이즈, 성문란 때문에 에이즈가 지구촌에 급격하게 번져가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섹스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고 대상이 있고 여건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숨어서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입니다. 여기에 우리 세대들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 번째, 명예의 유혹입니다. 비교의식 사회입니다. 멸시 받고는 살지 못합니다. ‘멸시 받은 상처, 나도 언젠가는 회복할 것이다’는 것에 한을 품고 삽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유혹의 현장은 극렬합니다. 경건은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으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주말문화가 발달되어 있는 우리사회에서 미련하게 예배당을 찾아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습은 세상적으로 보면 따분하겠지만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모습은 경건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건은 예배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이 경건한 모습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경건은 유혹의 현장, 경쟁의 현장,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이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재물과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는 사탄의 공격이 있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한나의 경건

   또 하나 사무엘상 1장의 한나의 경건은 배울 만합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첩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첩 중에서도 브닌나 라는 첩이 본처를 구박합니다. 첩에게 구박당하는 본처의 심정을 여러분은 이해합니까? 여성의 고통이 많지만 본처가 되어서 첩에게 구박을 당하는 여자의 고통은 형언을 못합니다. 자존심의 상처는 말로 못합니다. 한나가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통곡하며 서원하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무서운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아들을 주십시오. 내가 이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급하면 그런 막가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 죽을병에서 살려 주시면 내가 주를 위해 멋있게 살아보겠습니다.’ 목숨을 담보해야 할 위기가 오면 우리는 섣불리 막가파식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내 전부를 충성하겠습니다.’ 한나가 그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애가 사무엘입니다. 이 한나가 사무엘을 얻어서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한을 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장 27-28절에 보면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한나가 서원기도를 하여 아이를 얻었는데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이입니다. 그 기도한대로 성전에 데리고 가서 제사장에게 이 아이를 인계했습니다. 이제는 이 아이를 성전에서 제사장께서 키워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바쳐 드렸습니다.
   그런데 24절에 언제 갖다 주었습니까? “젖을 뗀 후에” 라고 했습니다. 이유식이 없을 때, 분유가 없을 때, 농경사회의 아이들은 보통 젖을 3, 4살까지 먹었습니다. 유대적 관습에서는 젖을 떼는 시기가 우리나라의 나이로 만 4살입니다. 유치원에 갈 때입니다. 여러분, 아이를 낳아서 4살이 되면 어떤 모습입니까? 말을 배워서 말을 하고 재롱을 떱니다. 부모들은 이 아이를 보고 매우 좋아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말을 배워서 재롱을 피우는 손자, 손녀를 업고 시내를 한 바퀴 돌라 해도 돌 것입니다. 그만큼 귀여울 때입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늙어서 기도하여 낳은 아이, 가장 귀여울 젖 뗀 후의 아이를 한나는 생이별을 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 때문에 아이를 성전에 바칩니다. 여러분, 경건이 무엇입니까? 내게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경건은 입증이 됩니다. 한나의 경건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경건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씨랜드 화재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치원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부모들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얼마 전에도 그 부모들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엄마는 설거지를 하다가 죽은 아이의 환영이 떠오르면 설거지가 안 된다고 합니다. 청소를 하다가 죽은 아이의 흔적이 느껴지면 청소를 하지 못합니다. 사고 난 그날이 뉴스에 보도만 되어도 그 부모들은 말로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한국을 떠나면 잊혀 질까봐 이민을 간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4살 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애정은 말로 못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경건을 말씀드립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유혹과 경쟁과 도전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고난 없이 경건을 훈련한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이 싸워야 하는 삶의 유혹의 현장은 극렬했습니다. 한나가 감당해야 할 경건의 싸움은 극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건의 사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셉의 경건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지키는 경건입니다. 요셉은 건강, 육체, 인격, 믿음을 지켰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 앞에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사를 지켰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입을 벌려 우리에게 달려들 때 그 마귀의 입에 송두리째 털어 넣는 그런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받은 축복은 마귀의 입에 사탕 한 알이라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마귀의 입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지키는 경건은 요셉의 경건입니다. 그리고 한나의 경건은 젖 뗀 귀염둥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입니다. 그래서 경건은 지키는 경건과 드리는 경건, 이 두 가지가 경건의 온전성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신 것은 사탄의 손에 돈 한 푼이라도 던져주어서는 안됩니다. 다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할 때는 젖 뗀 아이라도 바쳐드리는 한나의 경건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경건을 모범으로 보여준 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보면 3년동안 유대주의 자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했던 3년은 끊임없는 목숨의 위협과 유대인들의 도전 속에서 주님은 메시야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주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메시야입니다. 여러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범사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생과 내생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도 내가 이 땅에서 이룬 경건의 연습은 후대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이것은 “아멘. 옳도다”라는 말입니다.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복이 되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경건의 연습을 왜 우리가 무관심해야 합니까? 기독교의 주일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왜 주일이어야 하는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맺는 말

   경건의 기초와 터전은 하나님 앞에 바로 지키는데 있습니다. 이것부터 해야 합니다. 주일은 삶의 초점의 날입니다. 초점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주일은 한 주간동안의 초점의 날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예배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경건의 기초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경험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엿새 동안 피비린내 나는 영적전투에서 우리가 경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경건함으로 이 땅에 살고"라는 성구가 있습니다. 경건을 잃어버린 성도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경건은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경건함을 가지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주를 섬기는 자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