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6-20절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 까지에 이르는 '셋'가계의 족보로서,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낳았다'는 말과 '죽었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낳았고' '태어났고' '죽었다'는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마디는 영원한 인생의 테마입니다. 인생을 통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고, 목숨을 걸 일도 많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낳아 주신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요' '내가 태어나게 한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이며' 마지막으로 '잘 죽는 일' 입니다.

언젠가 524명의 사람들이 타고 가던 일본 여객기가 기관 고장으로 인해 추락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급박한 순간에 유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52세의 한 해운 회사 간부는 조그마한 수첩에 일곱 페이지나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은 6시 30분, 비행기가 흔들리면서 급히 떨어지고 있소... 이제 모든 것이 끝인 것 같소. 여보, 부디 잘 있어요. 힘을 내어 아이들을 잘 키워 주기 바라오. 너희들도 모두 사이좋게 도와서 엄마를 도와 다오... 나는 지금 매우 슬프다.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구나. 이유는 모르겠다. 기내에 연기가 가득하다. 비행기가 내려가기 시작한다..." ※,또 어떤 40세의 회사원은 비행기 멀미용 주머니에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을 썼습니다. "아이를 부탁하오..." ※, 43세의 건축사는 서류 뒷면에 "굳세게 살아요 여보! 그리고 두 아이를 부탁하오"라고 남겼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것들, 즉 자기에게는 '일이 중요하다. 명예가 중요하다. 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을 코앞에 둔 시간에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에는 빠짐없이 아이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고백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손을 통한 생명의 이어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잇고, 핏줄을 잇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어나고, 또 낳고, 그리고 죽는 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인생의 이 절대적인 과정 앞에 서면 겸손해지고, 또 겸허하게 '변해 가는 자신의 인생의 과정'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겪어 가는 인생의 이세 단계가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들에게는 이 과정은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희남자'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미친 사람이 동으로 뛰면 그를 쫓는 사람도 동으로 뛴다. 그러나 동으로 뛰는 것은 같지만 뛰는 동기는 서로 다르다. 또 물에 사람이 빠지면 이를 구하려는 사람도 물에 뛰어든다. 물 속에 들어간 것은 같지만, 그 동기는 서로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聖人)도 한 가지로 살고 죽으며,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로 살고 죽는다. 그러나 성인의 생사는 도리에 통달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삶과 죽음의 가치를 몰라서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다 똑같이 태어나고, 낳고, 죽는 과정을 밟는 것 같지만, 그러나 거룩한 씨인 '셋'자손의 낳고 죽는 것은 죄악으로 가는 '가인'의 자손의 낳고 죽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첫째. '여자의 후손으로 가는 족보'라는 사실이 다릅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끝을 선언합니다. 연극이 끝나면 무대는 어두워지고 마는 것처럼, 죽음이 오면 인생의 불은 꺼지고 모든 것은 마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족보의 주인공들의 결국이 죽음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들어 있는 창세기 5장에 죽었다는 말이 무려 여덟 번이나 기록되어 있고, 그 중 본문에만 다섯 번이나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그 후손들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버림과 포기의 선언이실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었더라는 죽음의 행진에 틈틈이 낳았으며 라는 생명의 역사를 스무 번씩이나 표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비록 실패한 인간의 삶일지라도 버려두지 아니 하시고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으로 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는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창3:15절), 곧 '예수 님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어지는 생명의 역사의 끝에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획하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깊고 오묘하신 뜻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사실은 이제 여자의 후손을 이미 보고 체험한 우리들에게 '예수의 생명이 보이는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예수의 생명을 잉태하는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경복 중학교에 다니던 어린 학생 하나가 불신의 가정에서 혼자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부자 였는데, 그런데 그만 이 학생이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병이 중해지니 돈이 많은 집이라 훌륭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니며 치료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병은 점점 더 중해만 갔습니다. 시름시름 앓던 아이가 바짝 타 들어간 입술을 엽니다. "엄마! 저 예수 믿는 것 아시죠? 제가 이렇게 오래 앓고 있는데 교회에서 누가 좀 와서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우리 교회에 좀 알려주세요. 저를 가르치시던 선생님 좀 오셔서 예배 드리게 해 주세요"

이 부탁을 어느 엄마가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연락을 받은 교회는 선생님과 함께 목사님이 오시기로 하셨고 아이의 원대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런데 사실은 엄마도 처녀 시절 신앙을 가졌었던 분이었는데 불신 가정으로 시집을 온 후로 예수 님을 떠났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어머니가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속으로만 따라 부르다가 옛날 믿던 생각이 나서는 그만 억제치 못하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면서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 예수를 영접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출근하기 전 들른 아빠에게 아이가 부탁을 합니다. 아빠, 오늘도 회사에 나가시는 거예요? 오늘 하루만 회사에 나가시지 않으면 안되나요? 오늘은 꼭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아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빠는 옷을 다시 벗어 걸고는 회사로 전화를 걸어 회사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는 아이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또 엄마 아빠에게 부탁을 합니다. "엄마, 교회로 전화하셔서 한 번만 더 목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를 드리게 해주세요. 이게 마지막이야.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 더 오시라고 해주세요" 아이의 이상한 분위기에 부모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교회로 연락을 해서 목사님을 모셔 다가 아이의 소원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자 아이가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비켜! 비켜요! 다들 비켜 주세요 부모는 걱정이 되어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아이는 더 크게 비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다들 비켜 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말합니다. 저기 십자가가... 십자가가 보인다. 엄마, 저기 십자가가 보여요. 아빠 저기 십자가가 보이지 않으세요? 이렇게 행복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은 채로 아이는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아이의 장례를 다 마친 후, 그 가정에서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 아이의 아버지가 목사님께 고백을 합니다. 저도 예수 믿겠습니다. 저는 예수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헌데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예수 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어린아이를 통해서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거룩한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이의 죽음은 예수의 생명을 낳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이의 육신은 부모의 폼을 통해 나왔지만, 그러나 오히려 영적으로는 그 부모를 낳아 여자의 후손의 생명을 잇는 족보에 올렸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향수 하는 삶을 사는 족보"라는 사실입니다.
창4:16-24절까지의 '가인의 자손의 죄악 된 족보'와 창5장 전체를 이루는 '거룩한 씨인 셋의 자손의 족보'를 비교해 보면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셋의 자손의 족보'에는 반드시 '향수하고 죽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가인' 자손의 족보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향수하고 죽었다'는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셋'의 자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신의 삶을 '향수하고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향수 했다'는 말은 '하나님께' 받은 수명대로 복되게 인생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행복했다'는 말입니다. '평안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장수했다' 는 말입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셋의 자손들은 거의 다 구백 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특히 '므두셀라'는 969세를 향수하고 죽어 역사상 최 장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거의 천년에 가까운 인생을 살았으니 얼마나 오래 산 것입니까? 그러나 가인의 자손의 족보는 죽은 나이조차도 기록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삶조차 제대로 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법이 없던 그 옛날에 칼에 의지하던 가인이 사람들은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을 죽여 본 경험을 가진 가인이 피가 그대로 그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라멕의 칼의 노래'를 살펴보면 이런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야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4:23)

'죽인다'는 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노래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사회가 얼마나 살벌했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니 인생을 장수하고, 단명하고 떠나서, 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삶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항상 불안하고 언제나 마음을 놓고 살수가 없던 세상이 그들의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삶에는 '향수 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가인의 자손 중에도 오래 살았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슷한 시절의 사람이니 가인의 자손들만 일찍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셋의 자손들처럼 구백 수 이상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그렇게 행복도 없고 평안도 없는 불안한 삶은 살았어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나이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인'의 족보는 '칼의 족보'입니다. 그들의 삶은 불안과 공허의 살았어도 살았다 할 수 없는 족보입니다. 불안과 공허의 족보입니다. 그러나 '셋'의 족보는 다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족보'요, 끝내 '영생을 얻게 되는 족보'이며, 충분한 행복과 평안으로 '향수 하는 족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누리며 '장수하는 족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씨, 셋의 족보를 이어갑시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의 생명을 잉태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저/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