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6
본문 : 예레미야 32장 1-5
할렐루야 !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들에게 오늘도 이말씀을 통하여 주님안에서 희망찬 삶을 보장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벽에 부딪칠 때도있습니다. 미래가 없다는 말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더우기 의로운 일을 하다가 이런 벽에 부딪치는 성도의 곤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직전 역사의 황혼기에 살던 고독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처지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라고 합니다. 이는 유다의 멸망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잠시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 나라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은 역사적인 필연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유다 백성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짓게 되고 정상적인 토지 매매가 성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결단이 지혜로운 것을 입증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 왕국의 회복을 믿었습니다. 그는 폐허의 잿더미 저 건너편에 있는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철저한 미래주의자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들 앞에 다가오는 민족의 멸망을 적나라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현실 때문에 미래를 포기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꿈을 갖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고 절망이 다가올 때 그리고 어두움이 엄습해 올 때 예레미야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내일이 없는 감옥 속에 던져질 때 예레미야에게 배울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같혔던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기에 처한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았고 인도하여 내일의 희망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폐허의 감옥 속에서도 예레미야가 절망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들려오는 거룩한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격려와 위로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는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성경의 역사 중에 가장 어두웠던 시기는 신, 구약 중간에 있던 약 400년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기록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오늘 애청자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오해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만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멜이라는 사촌이 와서 땅을 사라고 하자 땅을 샀습니다.
만일 그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아마 이런 오해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 나라가 망한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놓고서 자기는 부동산 투기를 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 중에 가장 숭고한 사고는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말씀하길,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 중요한 것인 줄 예레미야는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했습니다.
우리가 삶의 고난의 현장에 서고 내일이 없는 감옥에 던지움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애청자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세 번째 예레미야는 최선을 다하여 의무를 이행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위기 앞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알 수 없는 내일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흔들리게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내일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레미야는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오늘의 삶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
오늘이 어렵고 힘들다고 오늘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포기하는 것은 내일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의무를 다 하고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에게는 나라가 흔들리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도 오늘은 의미있는 시간으로 그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예레미야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미래를 신뢰하고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시간 애청자 여러분들도 예레미야처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하나님께 보여드리기를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다섯 번째 예레미야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환경과 어떤 일 가운데 있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절망에 부딪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절망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념으로 다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에는 벽이 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신념의 출발은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자기의 유한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이 절망의 벽을 깨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예레미야를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위에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에 도취하여 내일을 망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낙심 때문에 내일을 체념하기도 합니다. 하나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값있게 투자할 수 있는 애청자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
내일의 희망을 붙잡은 사람만이 오늘의 고난의 감옥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희망을 붙잡은 사람만이 오늘의 고난의 감옥에서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어둡고 절망적일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절망의 문을,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오늘의 감옥에서 내 일이라는 희망의 문을 열어줄 것을 믿고 주님안에서 늘 승리하는 애청자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4)
할렐루야 !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들에게 오늘도 이말씀을 통하여 주님안에서 희망찬 삶을 보장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벽에 부딪칠 때도있습니다. 미래가 없다는 말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더우기 의로운 일을 하다가 이런 벽에 부딪치는 성도의 곤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직전 역사의 황혼기에 살던 고독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처지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은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라고 합니다. 이는 유다의 멸망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잠시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 나라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은 역사적인 필연입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유다 백성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짓게 되고 정상적인 토지 매매가 성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결단이 지혜로운 것을 입증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 왕국의 회복을 믿었습니다. 그는 폐허의 잿더미 저 건너편에 있는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철저한 미래주의자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들 앞에 다가오는 민족의 멸망을 적나라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현실 때문에 미래를 포기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꿈을 갖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고 절망이 다가올 때 그리고 어두움이 엄습해 올 때 예레미야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내일이 없는 감옥 속에 던져질 때 예레미야에게 배울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같혔던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기에 처한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았고 인도하여 내일의 희망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폐허의 감옥 속에서도 예레미야가 절망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들려오는 거룩한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격려와 위로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는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성경의 역사 중에 가장 어두웠던 시기는 신, 구약 중간에 있던 약 400년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기록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오늘 애청자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오해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만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멜이라는 사촌이 와서 땅을 사라고 하자 땅을 샀습니다.
만일 그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아마 이런 오해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 나라가 망한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놓고서 자기는 부동산 투기를 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 중에 가장 숭고한 사고는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말씀하길,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 중요한 것인 줄 예레미야는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했습니다.
우리가 삶의 고난의 현장에 서고 내일이 없는 감옥에 던지움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애청자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세 번째 예레미야는 최선을 다하여 의무를 이행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위기 앞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알 수 없는 내일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흔들리게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내일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레미야는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오늘의 삶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
오늘이 어렵고 힘들다고 오늘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포기하는 것은 내일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의무를 다 하고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에게는 나라가 흔들리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도 오늘은 의미있는 시간으로 그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예레미야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미래를 신뢰하고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시간 애청자 여러분들도 예레미야처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하나님께 보여드리기를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다섯 번째 예레미야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환경과 어떤 일 가운데 있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절망에 부딪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절망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념으로 다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에는 벽이 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신념의 출발은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자기의 유한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이 절망의 벽을 깨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예레미야를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위에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에 도취하여 내일을 망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낙심 때문에 내일을 체념하기도 합니다. 하나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값있게 투자할 수 있는 애청자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애청자 여러분!
내일의 희망을 붙잡은 사람만이 오늘의 고난의 감옥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희망을 붙잡은 사람만이 오늘의 고난의 감옥에서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어둡고 절망적일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절망의 문을,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오늘의 감옥에서 내 일이라는 희망의 문을 열어줄 것을 믿고 주님안에서 늘 승리하는 애청자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