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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면서 만약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후손에 관한 약속을 받은지 이제 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B.C. 1990년에 창세기 12:1-4에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은 B.C. 1911에 임했으니까 연도를 계산해보면 만 10년이 됩니다.
물론 유여곡절 많았던 지난 10년이었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만 생각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만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났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요즘은 3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요? (나는 이 말을 옳다 생각하고서 내 아내와 세대차이를 느낀다고 농담합니다. 왜냐하면 호적상 나와 아내의 나이 차이가 3년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마라톤 해 본적이 있습니까? 나는 내 평생 꼭 한 번 마라톤에 참가해 보았습니다. 내가 참가한 마라톤은 15 km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경기였습니다. 나는 그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2 주일 정도 체력 보강 훈련을 했습니다. 평소에 타고 다니던 버스를 타지 않고 버스와 경주했습니다.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하면 버스에 올라타는 친구에게 가방을 부탁하고 버스가 출발할 때 나도 같이 출발했습니다. 나와 버스와의 경주에서 누가 이겼을까요? 만약 내가 졌다면, 자존심 강한 제가 이런 예화를 들겠습니까? 한 두번 제외하곤 내가 이겼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토록 빨리 달릴 수 있었느냐?” “와! 엄청나게 빨리 달렸겠네요!” “얼마나 빨리 달렸는데요?” 궁금해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설교 끝날 때까지 그 궁금증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느라 설교 듣지 못할 것 같아 아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은 내가 빨리 다녔던 것이 아니라 그 버스가 늦게 달렸습니다. 그 버스는 시내 버스였는데, 그 시간에는 방과 학생들을 주로 태우고 다녔습니다. 그 버스는 곳곳에서 학생들을 태우고 내려주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지요. 그래서 버스가 정차해 있을 때 나는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승리를 도와준 다른 요인 하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시골 우리 동네길은 포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커다란 버스가 빨리 달릴 수 없었습니다.
나는 2 주일간의 피눈물나는 고된 훈련(?)을 끝낸 후 본 마라톤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그 경기출발지점에는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 모두다 모여 있었습니다. 출발 신호가 내려지기가 무섭게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참가자 모두다 힘찬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비록 2 주일간의 훈련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뛰는 경험을 해 보았던지라 초반에부터 힘을 빼지 않았습니다. 뛰는 도중 수많은 참가자들을 제치고 달렸는데 내 뒤로 제쳐진 대부분의 선수들은 마라톤을 어떻게 하는 줄 몰라 초반에 힘을 너무 소비했던 분들이었습니다. 뛰는 도중 이런저런 잡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내가 우승할 수 있을까?” 초반에는 내가 우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정말로 우승을 목표로 뛰었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도중 우승에 관한 미련이 서서히 사라져 갔고,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승은 생각치 말자. 끝까지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끝까지 완주하는 것을 내 자신을 위한 우승으로 삼자!”
결국 나는 결국 완주했습니다. 골인 라인이 있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스탠드에서 기다리고 있던 분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들어설 때마다 그들은 큰 박수 갈채를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도는데 기분 좋더라구요. 그리고 결승점에 도달한 후 그냥 땅바닥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지쳐서 쓰러진 이유도 있지만, 발바닥이 너무 아파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뛰는 도중 신발 속으로 조그마한 돌이 들어갔는데 차마 그 돌을 빼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빼기 위해 앉게 되면 더 이상 일어나 뛸 수 없을 것 같아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는 학우들 도움을 받아 신발을 벗고 양발을 벗었더니 발바닥 전체적으로 커다란 물집이 이곳저곳에 생겨 있었습니다. 신발 안의 조그마한 그 돌이 이러저리 굴러다니며 발바닥을 마구 상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기뻤습니다. 완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교우 여러분, 그날 몇 등으로 골인했느냐는 것은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시작은 기분 좋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원대한 꿈과 포부를 가지고. 활기찬 열정을 가지고. 하지만 달리는 중도에 하나 둘 떨어져 나갑니다. 왜? 달리는 여정이 너무 길고 힘들기에 중도에 뛰는 목적이 희박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신앙의 경주 길(이민)을 떠난 아브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 .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아브람은 기분 좋게, 활기차게, 정열적으로 믿음의 경주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을 만난 감격이 사라져 가고, 그분께서 약속하셨던 말씀이 당장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뢰도 줄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신뢰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약화된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시간이 흘러가도 자그마치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으니까. . .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인해 지쳐가는 아브람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절). 이것은 아브람이 지칠 정도로 지쳐 있는 상태였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멀고 먼 신앙의 경주에서 아브람은 지쳐 있었습니다. 처음 가졌던 포부와 이상이 식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약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오히려 이방 땅까지 가족을 이끌고 온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 주변에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횡포나 약탈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비상 간섭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힘들어 지쳐 있을 때, 이런저런 환경(사람)을 통하여 위로가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비상 간섭이었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기다리는 바에 대한 초조함이 생겨납니다. 불안감이 생겨납니다. “정말로 이루어질 것인가? 내가 헛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회의심과 불신이 생겨납니다. 이곳 토랜스에 교회를 개척한지 불과 3개월이 채 지나지 않는 내게도 불안함과 초조함이 있습니다. “과연 개척을 성공할 수 있을까? 괜한 수고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괜한 고집 부려 가족을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곤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인간인 것을. 사람이기에 초지일관 강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바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강해지고도 하고, 때로는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은 나와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약해지려는 내 자신을 기도와 말씀으로 곧바로 세우는 노력입니다. 하지만 내게 한가지 변치 않는 신뢰가 있는데, 그것은 나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좌절토록 가만 놔두지 않으실 것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들어 쓰러지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 다시 세워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곧 내 자신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실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람은 지쳐도 몹시 지쳤나 봅니다. 답답해도 몹시 답답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짜구자 하나님께 항변조로 되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내게 아직까지도 자식이 없지 않습니까? (What can you give me since I remain childless?)” (2절 상반절). 10년 전에 아브람이 후손이 큰 민족이 될 것과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될 것과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해주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믿음의 길을 떠났던 게 아닙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렇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강한 반항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What can you give me?)”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아브람의 항변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항변은 아닙니까? “하나님, 내가 지금껏 얼마나 오래 동안 기도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게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을 믿겠노라 작정하고 믿음 생활로 들어온 이후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형편이 다를 바 전혀 없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항변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고 난 이후 내 자신, 가정, 사업이 더욱 어렵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 눈이 있다면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여러분의 절망을 솔직히 말씀드리십시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십시오. 믿어지지 않는다면 믿지 못하겠다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항변의 정도가 더욱 깊어져 갑니다.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2절 하반절).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손이 될 것이니이다” (3절). 아브람의 말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옳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나는 헛된 소망을 꿈꾸지 않으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살렵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나의 상속 후계자 삼으렵니다.”
아브람의 말은 주변에서 흔히 듣는 체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노력한지 어느덧 10년, 20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젠 믿음이라는 상상 속에서 꿈과 같은 이상을 바라지 않으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살렵니다. 굳이 어렵게 살지 않으렵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 가치관을 좇으며 살아가렵니다.”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라고 체념조로 대답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4절). “아브람아, 아브람아, 아니야! 그 종은 아니야! 내가 너의 몸을 통하여 아들을 줄터인데 그 아들이야 말로 내가 네게 주겠다 10년 전에 약속했던 바로 그 후손이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끌고 당기는 하나님과 아브람의 대화를 통하여 깨닫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10년의 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인하여 허물어진 하나님에 대한 약해진 믿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아브람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람의 약해진 믿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다시 새롭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5절).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데려 나가셨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믿음의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라톤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장기간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달리는 목적을 분명히 세워놓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곧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목표점에 이르렀을 때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목적이 분명해야 장거리 마라톤을 할 수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중도에 쓰러지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달리는 목적을 목적히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현 상태를 분명히 아뢰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믿지 못하면서 믿는 척하지 말기 바랍니다. 믿을 수 없거들랑 믿을 수 없다 고백하기 바랍니다. 믿음 있는 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의로운 척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백해야 하나님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말씀하고 있는 의로움인지 모른다면, 모른다고 해야 의로움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 주지 않겠습니까? 나는 우리 성도들이 정말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자신을 믿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세상 속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하여 자신감 있게 달려가고 있는 우리를 세상 사람들이 보고서 강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오늘 본문(창 15:1-6절)을 토대로 하여 믿음의 경주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주제이니 주변 친구들을 종용해서 함께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면서 만약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후손에 관한 약속을 받은지 이제 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B.C. 1990년에 창세기 12:1-4에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은 B.C. 1911에 임했으니까 연도를 계산해보면 만 10년이 됩니다.
물론 유여곡절 많았던 지난 10년이었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만 생각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만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났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요즘은 3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요? (나는 이 말을 옳다 생각하고서 내 아내와 세대차이를 느낀다고 농담합니다. 왜냐하면 호적상 나와 아내의 나이 차이가 3년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마라톤 해 본적이 있습니까? 나는 내 평생 꼭 한 번 마라톤에 참가해 보았습니다. 내가 참가한 마라톤은 15 km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경기였습니다. 나는 그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2 주일 정도 체력 보강 훈련을 했습니다. 평소에 타고 다니던 버스를 타지 않고 버스와 경주했습니다.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하면 버스에 올라타는 친구에게 가방을 부탁하고 버스가 출발할 때 나도 같이 출발했습니다. 나와 버스와의 경주에서 누가 이겼을까요? 만약 내가 졌다면, 자존심 강한 제가 이런 예화를 들겠습니까? 한 두번 제외하곤 내가 이겼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토록 빨리 달릴 수 있었느냐?” “와! 엄청나게 빨리 달렸겠네요!” “얼마나 빨리 달렸는데요?” 궁금해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설교 끝날 때까지 그 궁금증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느라 설교 듣지 못할 것 같아 아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은 내가 빨리 다녔던 것이 아니라 그 버스가 늦게 달렸습니다. 그 버스는 시내 버스였는데, 그 시간에는 방과 학생들을 주로 태우고 다녔습니다. 그 버스는 곳곳에서 학생들을 태우고 내려주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지요. 그래서 버스가 정차해 있을 때 나는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승리를 도와준 다른 요인 하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시골 우리 동네길은 포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커다란 버스가 빨리 달릴 수 없었습니다.
나는 2 주일간의 피눈물나는 고된 훈련(?)을 끝낸 후 본 마라톤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그 경기출발지점에는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 모두다 모여 있었습니다. 출발 신호가 내려지기가 무섭게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참가자 모두다 힘찬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비록 2 주일간의 훈련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뛰는 경험을 해 보았던지라 초반에부터 힘을 빼지 않았습니다. 뛰는 도중 수많은 참가자들을 제치고 달렸는데 내 뒤로 제쳐진 대부분의 선수들은 마라톤을 어떻게 하는 줄 몰라 초반에 힘을 너무 소비했던 분들이었습니다. 뛰는 도중 이런저런 잡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내가 우승할 수 있을까?” 초반에는 내가 우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정말로 우승을 목표로 뛰었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도중 우승에 관한 미련이 서서히 사라져 갔고,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승은 생각치 말자. 끝까지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자. 끝까지 완주하는 것을 내 자신을 위한 우승으로 삼자!”
결국 나는 결국 완주했습니다. 골인 라인이 있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스탠드에서 기다리고 있던 분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들어설 때마다 그들은 큰 박수 갈채를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도는데 기분 좋더라구요. 그리고 결승점에 도달한 후 그냥 땅바닥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지쳐서 쓰러진 이유도 있지만, 발바닥이 너무 아파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뛰는 도중 신발 속으로 조그마한 돌이 들어갔는데 차마 그 돌을 빼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빼기 위해 앉게 되면 더 이상 일어나 뛸 수 없을 것 같아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는 학우들 도움을 받아 신발을 벗고 양발을 벗었더니 발바닥 전체적으로 커다란 물집이 이곳저곳에 생겨 있었습니다. 신발 안의 조그마한 그 돌이 이러저리 굴러다니며 발바닥을 마구 상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기뻤습니다. 완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교우 여러분, 그날 몇 등으로 골인했느냐는 것은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시작은 기분 좋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원대한 꿈과 포부를 가지고. 활기찬 열정을 가지고. 하지만 달리는 중도에 하나 둘 떨어져 나갑니다. 왜? 달리는 여정이 너무 길고 힘들기에 중도에 뛰는 목적이 희박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신앙의 경주 길(이민)을 떠난 아브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 .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아브람은 기분 좋게, 활기차게, 정열적으로 믿음의 경주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을 만난 감격이 사라져 가고, 그분께서 약속하셨던 말씀이 당장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뢰도 줄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신뢰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약화된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시간이 흘러가도 자그마치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으니까. . .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인해 지쳐가는 아브람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절). 이것은 아브람이 지칠 정도로 지쳐 있는 상태였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멀고 먼 신앙의 경주에서 아브람은 지쳐 있었습니다. 처음 가졌던 포부와 이상이 식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약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오히려 이방 땅까지 가족을 이끌고 온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 주변에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횡포나 약탈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비상 간섭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힘들어 지쳐 있을 때, 이런저런 환경(사람)을 통하여 위로가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비상 간섭이었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기다리는 바에 대한 초조함이 생겨납니다. 불안감이 생겨납니다. “정말로 이루어질 것인가? 내가 헛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회의심과 불신이 생겨납니다. 이곳 토랜스에 교회를 개척한지 불과 3개월이 채 지나지 않는 내게도 불안함과 초조함이 있습니다. “과연 개척을 성공할 수 있을까? 괜한 수고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괜한 고집 부려 가족을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곤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인간인 것을. 사람이기에 초지일관 강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바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강해지고도 하고, 때로는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은 나와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약해지려는 내 자신을 기도와 말씀으로 곧바로 세우는 노력입니다. 하지만 내게 한가지 변치 않는 신뢰가 있는데, 그것은 나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좌절토록 가만 놔두지 않으실 것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들어 쓰러지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 다시 세워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곧 내 자신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실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람은 지쳐도 몹시 지쳤나 봅니다. 답답해도 몹시 답답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짜구자 하나님께 항변조로 되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내게 아직까지도 자식이 없지 않습니까? (What can you give me since I remain childless?)” (2절 상반절). 10년 전에 아브람이 후손이 큰 민족이 될 것과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될 것과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해주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믿음의 길을 떠났던 게 아닙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렇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강한 반항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What can you give me?)”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아브람의 항변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항변은 아닙니까? “하나님, 내가 지금껏 얼마나 오래 동안 기도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게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을 믿겠노라 작정하고 믿음 생활로 들어온 이후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형편이 다를 바 전혀 없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항변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고 난 이후 내 자신, 가정, 사업이 더욱 어렵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 눈이 있다면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여러분의 절망을 솔직히 말씀드리십시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십시오. 믿어지지 않는다면 믿지 못하겠다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항변의 정도가 더욱 깊어져 갑니다.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2절 하반절).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손이 될 것이니이다” (3절). 아브람의 말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옳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나는 헛된 소망을 꿈꾸지 않으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살렵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나의 상속 후계자 삼으렵니다.”
아브람의 말은 주변에서 흔히 듣는 체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노력한지 어느덧 10년, 20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젠 믿음이라는 상상 속에서 꿈과 같은 이상을 바라지 않으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살렵니다. 굳이 어렵게 살지 않으렵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 가치관을 좇으며 살아가렵니다.”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라고 체념조로 대답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4절). “아브람아, 아브람아, 아니야! 그 종은 아니야! 내가 너의 몸을 통하여 아들을 줄터인데 그 아들이야 말로 내가 네게 주겠다 10년 전에 약속했던 바로 그 후손이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끌고 당기는 하나님과 아브람의 대화를 통하여 깨닫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10년의 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인하여 허물어진 하나님에 대한 약해진 믿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아브람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람의 약해진 믿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다시 새롭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5절).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데려 나가셨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믿음의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라톤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장기간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달리는 목적을 분명히 세워놓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곧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목표점에 이르렀을 때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목적이 분명해야 장거리 마라톤을 할 수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중도에 쓰러지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달리는 목적을 목적히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현 상태를 분명히 아뢰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믿지 못하면서 믿는 척하지 말기 바랍니다. 믿을 수 없거들랑 믿을 수 없다 고백하기 바랍니다. 믿음 있는 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의로운 척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백해야 하나님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말씀하고 있는 의로움인지 모른다면, 모른다고 해야 의로움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 주지 않겠습니까? 나는 우리 성도들이 정말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자신을 믿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세상 속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하여 자신감 있게 달려가고 있는 우리를 세상 사람들이 보고서 강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오늘 본문(창 15:1-6절)을 토대로 하여 믿음의 경주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주제이니 주변 친구들을 종용해서 함께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