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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어지길 무려 10년이나 기다렸던 아브람이 기다림에 지쳐 낙심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상 중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배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아직까지 자식이 없습니다” (2절) 라고 화답했습니다. 사실은 아브람은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말씀에 동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 그리고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라고?” “도대체 그게 현재 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배가 고파 쓰려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방패이시며 지극히 큰 상급이십니다”고 전해주면 허기로 죽어가는 사람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도대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게 필요한 것은 밥이요!” 라고 대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순간적인 거부감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했던 “주 여호와여” 라는 칭호를 통해 깨달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칭호를 의도적으로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로써 천하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시는 권세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고,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곧 아브람이 이 두 가지 호칭을 더불어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천하만물을 주관하시는 절대 권능을 갖고 계시며 자신이 맺은 언약에 충실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그러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나로 하여금 큰 민족을 갖도록 하겠다 약속해 놓고선 아직까지 내게 자식 하나도 주지 않지 않았습니까?” 아브람이 기다리던 하나님은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만 하실 분이 아니라 10년 전에 맺었던 축복의 약속을 이행해 주실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기다리고 있었던 하나님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기대나 채워주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아브람과의 관계는 언약 성취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축복의 언약을 주셨고, 또한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분이셨습니다. 아브람이 언급했던 바대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 (the God of covenant) 곧 여호와 (Yahwe)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10년 전 아브람에게 축복의 약속을 주셨던 것은 사실상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불러내기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약속이 없었더라면 아브람이 주저없이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이민 여정을 떠났겠습니까?
가치 있는 대가가 구체적으로 주어져야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천당 갑니다” 혹은 “예수 믿으면 축복 받습니다” 라고 전하면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다니는 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으면 많은 분들이 “예수 믿고 천국가기 위함입니다” 혹은 “예수 믿고 축복 받기 위함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왜 그렇게 대답합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전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하심은 그 이상의 것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10년 동안 기다리도록 하신 이유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깨달아 소유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를 하나님을 제대로 깨달아 믿는 믿음의 조상으로 키워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1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큰 것을 얻는 사람으로 성숙해 가기 위해 앞으로도 15년의 시간이 더 필요로 했습니다 (아브람은 15년 후인 그의 나이 백 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인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도대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 성취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이제는 이루어지지 않을 언약을 바라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현명하게 생각해서 내 집에 있는 다메섹 사람인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나의 후사 삼겠습니다” 투정 부리는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달래십니다. “아브람아, 아니야. 엘리에셀은 내가 말한 그 후사가 아니야. 내가 주겠노라 하는 그 후사는 너의 몸을 통해 나올 것이야” (4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의 손목을 잡아 밖으로 이끌어내시며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도록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아라.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없듯이 네 자손이 이와 같이 수없이 많게 되리라” (5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변화를 성경을 통해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6절을 읽어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축복의 언약을 믿으니” 라고 적고 있지 않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 결과로써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하신 이유는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아브람을 훈련시켜 깨닫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여호와를 믿는 것과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여호와를 믿는 믿음은 조건적 믿음입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건인 축복이 임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곧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은 축복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어느날 갈릴리 지역의 수도였던 가버나움에 수많은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왔고, 어떤 이들은 먼길을 밤새 걸어서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 일찍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 들더니 묻습니다. “랍비여,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요 6:25). 아침 일찍부터 자신에게 몰려드는 무리들을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6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얼마 전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두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주실 때 그 떡과 물고기를 받아 먹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곧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혹시나 예수께서 신기한 기적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심을 가지고 좇아다닌 무리였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 허기전 배를 채워주는 예수님을 좇는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6, 27). “너희들이 진정 구해야 (찾아야) 할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예수님 자신이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신 것은 무리들로 하여금 놀라운 기적에 현혹되어 예수를 좇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히 깨달아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비록 축복의 약속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축복을 가져다 주실 여호와를 믿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조건이 붙지 않는 상태로 여호와를 믿는 아브람의 믿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 라는 말씀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구원론의 기초가 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30)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6)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3:12)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9)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8)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성경말씀은 마틴 루터 목사께서 행위를 강조하는 캐톨릭에 대항해서 피 흘리며 싸워 지킨 교리이고, 요한 웨슬리 목사께서 올더스게이트에서 회심하게 된 말씀이며, 이 말씀은 영국을 비롯하여 온 유럽과 미대륙 그리고 온 세계를 변화시켰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 그분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 되심을 깨달게 됩니다. 하나님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레미야처럼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 [나의 모든 것] 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애 3:24) 고백하게 됩니다.
끝으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라는 구절에서 “믿다”는 히브리 말 아만은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의미입니다. 곧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신뢰했다, 의지했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브람은 앞으로 삶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삶의 방패요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의 표현은 무엇입니까?
따뜻하게 입혀주어야 고맙다 하는 자가 있습니다. 빵을 먹여주어야 고맙다 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춥고 배 고픈 가운데서도 고맙다 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 성숙한 믿음을 소유한 자일까요? 누가 진정 감사하는 믿음을 소유한 자일까요? 누가 진정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의 의미를 알고 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일까요? 기적과 표적을 보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은 복 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 초조, 낙심, 절망, 질병, 가난, 재난, 끝없는 기다림 가운데서도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그분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은 더욱 더 성숙한 믿음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축복 받고 있다 싶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좋아지고, 상황이 힘들어진다 싶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는 같은 말입니다. 믿는다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뢰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어떤 처지에서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방패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지극히 큰 상급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고백은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증표입니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찬송가 102장 3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어지길 무려 10년이나 기다렸던 아브람이 기다림에 지쳐 낙심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상 중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배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아직까지 자식이 없습니다” (2절) 라고 화답했습니다. 사실은 아브람은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말씀에 동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 그리고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라고?” “도대체 그게 현재 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배가 고파 쓰려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방패이시며 지극히 큰 상급이십니다”고 전해주면 허기로 죽어가는 사람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도대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게 필요한 것은 밥이요!” 라고 대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순간적인 거부감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했던 “주 여호와여” 라는 칭호를 통해 깨달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칭호를 의도적으로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로써 천하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시는 권세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고,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곧 아브람이 이 두 가지 호칭을 더불어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천하만물을 주관하시는 절대 권능을 갖고 계시며 자신이 맺은 언약에 충실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그러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나로 하여금 큰 민족을 갖도록 하겠다 약속해 놓고선 아직까지 내게 자식 하나도 주지 않지 않았습니까?” 아브람이 기다리던 하나님은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만 하실 분이 아니라 10년 전에 맺었던 축복의 약속을 이행해 주실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기다리고 있었던 하나님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기대나 채워주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아브람과의 관계는 언약 성취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축복의 언약을 주셨고, 또한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분이셨습니다. 아브람이 언급했던 바대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 (the God of covenant) 곧 여호와 (Yahwe)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10년 전 아브람에게 축복의 약속을 주셨던 것은 사실상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불러내기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약속이 없었더라면 아브람이 주저없이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이민 여정을 떠났겠습니까?
가치 있는 대가가 구체적으로 주어져야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지만,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천당 갑니다” 혹은 “예수 믿으면 축복 받습니다” 라고 전하면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다니는 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으면 많은 분들이 “예수 믿고 천국가기 위함입니다” 혹은 “예수 믿고 축복 받기 위함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왜 그렇게 대답합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전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하심은 그 이상의 것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10년 동안 기다리도록 하신 이유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깨달아 소유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를 하나님을 제대로 깨달아 믿는 믿음의 조상으로 키워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1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큰 것을 얻는 사람으로 성숙해 가기 위해 앞으로도 15년의 시간이 더 필요로 했습니다 (아브람은 15년 후인 그의 나이 백 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인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도대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 성취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이제는 이루어지지 않을 언약을 바라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현명하게 생각해서 내 집에 있는 다메섹 사람인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나의 후사 삼겠습니다” 투정 부리는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달래십니다. “아브람아, 아니야. 엘리에셀은 내가 말한 그 후사가 아니야. 내가 주겠노라 하는 그 후사는 너의 몸을 통해 나올 것이야” (4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의 손목을 잡아 밖으로 이끌어내시며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도록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아라.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없듯이 네 자손이 이와 같이 수없이 많게 되리라” (5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변화를 성경을 통해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6절을 읽어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축복의 언약을 믿으니” 라고 적고 있지 않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 결과로써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하신 이유는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아브람을 훈련시켜 깨닫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여호와를 믿는 것과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여호와를 믿는 믿음은 조건적 믿음입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건인 축복이 임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곧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은 축복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어느날 갈릴리 지역의 수도였던 가버나움에 수많은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왔고, 어떤 이들은 먼길을 밤새 걸어서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 일찍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 들더니 묻습니다. “랍비여,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요 6:25). 아침 일찍부터 자신에게 몰려드는 무리들을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6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얼마 전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두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주실 때 그 떡과 물고기를 받아 먹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곧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혹시나 예수께서 신기한 기적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심을 가지고 좇아다닌 무리였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 허기전 배를 채워주는 예수님을 좇는 무리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6, 27). “너희들이 진정 구해야 (찾아야) 할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예수님 자신이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신 것은 무리들로 하여금 놀라운 기적에 현혹되어 예수를 좇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히 깨달아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비록 축복의 약속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축복을 가져다 주실 여호와를 믿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조건이 붙지 않는 상태로 여호와를 믿는 아브람의 믿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 라는 말씀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구원론의 기초가 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30)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6)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3:12)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9)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8)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성경말씀은 마틴 루터 목사께서 행위를 강조하는 캐톨릭에 대항해서 피 흘리며 싸워 지킨 교리이고, 요한 웨슬리 목사께서 올더스게이트에서 회심하게 된 말씀이며, 이 말씀은 영국을 비롯하여 온 유럽과 미대륙 그리고 온 세계를 변화시켰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 그분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 되심을 깨달게 됩니다. 하나님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레미야처럼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 [나의 모든 것] 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애 3:24) 고백하게 됩니다.
끝으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라는 구절에서 “믿다”는 히브리 말 아만은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의미입니다. 곧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신뢰했다, 의지했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브람은 앞으로 삶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삶의 방패요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의 표현은 무엇입니까?
따뜻하게 입혀주어야 고맙다 하는 자가 있습니다. 빵을 먹여주어야 고맙다 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춥고 배 고픈 가운데서도 고맙다 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 성숙한 믿음을 소유한 자일까요? 누가 진정 감사하는 믿음을 소유한 자일까요? 누가 진정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의 의미를 알고 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일까요? 기적과 표적을 보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은 복 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 초조, 낙심, 절망, 질병, 가난, 재난, 끝없는 기다림 가운데서도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그분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은 더욱 더 성숙한 믿음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축복 받고 있다 싶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좋아지고, 상황이 힘들어진다 싶으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는 같은 말입니다. 믿는다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뢰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어떤 처지에서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방패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지극히 큰 상급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고백은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증표입니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찬송가 102장 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