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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87
지난 주 설교에서는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 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나는 너의 방패요” 라는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 보았고, 오늘 설교 시간에는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을 살펴 보며 은혜의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얻고자 하기에 신앙 생활 하십니까? 무엇을 얻으려 그토록 힘든 신앙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 편하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이 땅의 삶을 즐길 수 있을 텐데. . . 신앙인으로 살아가기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어떤 분은 “나는 나의 신앙생활의 수고에 대한 대가(상급)를 주께서 주실 것을 믿기에 신앙생활 합니다” 라고 대답할는지 모릅니다. 솔직한 답변이라 믿습니다. 솔직히 내 자신 역시 나의 수고의 대가(상급)를 주님으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대가(상급)를 기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구약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위에 따라 갚아주시는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나는 주께서 가라고 하시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무슨 악한 일을 하여서,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도 아니하였다. 주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지켰으며, 주의 모든 법규를 내가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 앞에서 나는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나 스스로를 지켰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의롭게 산다고 하여 나에게 상을 주시며, 나의 손이 깨끗하다고 하여 나에게 상을 주셨다.” (시 18:21-24. 표준 새번역 성경).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말과 행위에 대한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대가(상급)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12에 나오는 산상보훈은 이런 가르침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께서도 삶의 행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고전 3:8). 사도 요한은 신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행위에 대한 하나님께서 지불해 주시는 대가에 관해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가겠다.”
이렇게 보면, 이 땅에서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대가(상급)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는 대가(상급)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자손 번영의 축복? 넓은 땅을 받는 축복? 이름이 높임 받는 축복? 사업의 번영?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러한 기대는 그릇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기대심은 믿음의 조상 아브람 역시 갖고 있었음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손의 축복, 땅의 축복 (사업 번영의 축복), 명예의 축복,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상급이었습니다. 좀더 본문과 가깝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축복이 아브람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할 상급(축복)을 바라며 살아가는 아브람에게 어느날 이상 중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나는 지극히 큰 너의 상급이니라.” 이 말씀을 내놓으라 하는 한글 번역본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내가]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공동번역). “네가 받을 보상은 매우 크다” (표준 새번역). “내가 네게 큰 상을 베풀겠다”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은 상급 주시는 분이시다 (God is a rewarder)”는 개념이 번역가들의 머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이 오늘 본문 말씀을 깊게 묵상하던 중 깨달은 바는 위의 번역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뜻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앙의 행위에 대해 상급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을 아브람에게 주셨던 바로 그날 밤에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I am your reward).”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I am your rewarder”라는 말씀과 “I am your reward”라는 말씀은 서로 분리해 놓고 보았을 때 성서적으로 둘 다 맞습니다. 하지만 문맥 속에서는 각자가 담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에게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God of rewarder)”로 받아 들여지기 보다는 “아브람이 평생 기대할 상급 그 자체(reward itself)”로 받아 들여지길 받길 원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빠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내 아들 녀석이 선물 들고 들어오는 아빠를 기대하며 반겨주길 원치 않습니다. 아빠의 손에 선물이 들려 있던 없든 상관없이 아빠가 들어오시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잽싸게 달려나와 나의 품으로 뛰어 들어주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원하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상급을 기다리기 보다 하나님 자신을 기다려 주길 원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조건없이 기다려지고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되고 싶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상급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환영 받지 않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하나님으로 환영 받기 원하십니다.
어린 아기일 적에는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야 자신이 부모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아기가 성장하게 되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인 자신에게 무엇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이기에 사랑하는 겁니다.
연인들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기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겁니다. 그 연인들이 사랑하며 기대하는 것은 어떤 물질이나 이익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사랑과 희생의 최고의 대가(상급)는 남자에게 있어서는 여자 이고 여자에게 있어서는 남자 그 자체입니다. 그 이상의 그 이하의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 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된 사랑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람을 정말 깊은 사랑의 관계 속으로 인도하고 싶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와도 맺어보지 못했던 아주 깊은 사귐을 아브람과 나누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하란에서 또다시 불러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아가면서도 자신에게 주셔야 할 축복(상급)만을 계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축복이 더디 오니까 지쳐서 이젠 하나님에 대한 신뢰마저 식어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아브람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워 하시며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I am your reward)”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I am your exceedingly great reward)” 라는 표현까지 굳이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나 자신 보다 너를 위해 더 큰 상급은 없다. 나는 너가 기대할 가장 최고의 상급이다. 이것을 알아다오!” 하시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삶을 사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수고가 남달랐습니다. 그의 삶의 초점은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릴까?”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려고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따로 기도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전도하러 다니시며 몸이 몹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삶의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이 땅에서 천국 복음 전파하시고 결국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땅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밤낮 수고하면서도 한번도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했기에 아버지의 뜻을 대신 이루어 드리고자 열심을 내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그토록 열심히 수고하면서 수고에 대한 대가로 기대했던 것은 오직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 자체였습니다.
나는 지난 주간 “아브람아, 아브람아,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을 기대하며 수고했던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직 어리구나! 나는 아직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며 살아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앞으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까 기대하며 헌신하기 보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헌신의 삶을 살아야 겠다. 하나님을 나의 수고의 이유이자 대가로 삼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나는 만족하겠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을 기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살다가 왔습니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살아가겠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가(상급)를 기대하는 헌신과 수고는 때론 낙심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대가(상급)가 주어지지 않을 때 헌신과 수고 때문에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이 헌신과 수고의 모든 대가이시기에 헌신하고 수고한다면, 우리의 헌신과 수고는 계속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등산을 아는 사람은 땀 흘리며 오르고 있는 산이 좋아서 산을 타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그 사람 역시 자기 건강을 위하여, 혹은 정상 정복의 환희를 얻기 위하여 산을 올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산을 사랑하게 된 이후엔 산이 좋아서 산을 오르는 겁니다. 그런 경지에 든 등산가를 “산사람” 이라고 부릅니다. “산사람!” 어떤 의미입니까? “산+사람”인데, “산과 하나 된 사람”이라는 의미이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이라는 말인데, “삶의 목적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맞추어져 있는 사람,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조건 없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희생이 참된 희생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희생이 있을 때 참된 관계성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신앙생활의 기쁨이란 오직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그러한 신앙의 기쁨으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그 깊은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고백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바랄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는 고백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 고백을 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복음성가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Wes. Sutton 작곡, 인터콥 작시 번역)를 부르면서 지극히 큰 상급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해보기 바랍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묵상 기도가 끝날 무렵 조용한 목소리로 청중에게 읽어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이 이방 땅으로 포로되어 잡혀가는 암흑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하고 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민족이 기대할 모든 것임을 깨닫고서 예레미야애가 3장 24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는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러하기에 주께 내 희망을 건다.’”
지난 주 설교에서는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 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나는 너의 방패요” 라는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 보았고, 오늘 설교 시간에는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말씀을 살펴 보며 은혜의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얻고자 하기에 신앙 생활 하십니까? 무엇을 얻으려 그토록 힘든 신앙의 길을 걷고 계십니까?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 편하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이 땅의 삶을 즐길 수 있을 텐데. . . 신앙인으로 살아가기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어떤 분은 “나는 나의 신앙생활의 수고에 대한 대가(상급)를 주께서 주실 것을 믿기에 신앙생활 합니다” 라고 대답할는지 모릅니다. 솔직한 답변이라 믿습니다. 솔직히 내 자신 역시 나의 수고의 대가(상급)를 주님으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대가(상급)를 기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구약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위에 따라 갚아주시는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나는 주께서 가라고 하시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무슨 악한 일을 하여서,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도 아니하였다. 주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지켰으며, 주의 모든 법규를 내가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 앞에서 나는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나 스스로를 지켰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의롭게 산다고 하여 나에게 상을 주시며, 나의 손이 깨끗하다고 하여 나에게 상을 주셨다.” (시 18:21-24. 표준 새번역 성경).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말과 행위에 대한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대가(상급)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12에 나오는 산상보훈은 이런 가르침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께서도 삶의 행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고전 3:8). 사도 요한은 신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행위에 대한 하나님께서 지불해 주시는 대가에 관해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가겠다.”
이렇게 보면, 이 땅에서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대가(상급)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는 대가(상급)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자손 번영의 축복? 넓은 땅을 받는 축복? 이름이 높임 받는 축복? 사업의 번영?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러한 기대는 그릇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기대심은 믿음의 조상 아브람 역시 갖고 있었음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손의 축복, 땅의 축복 (사업 번영의 축복), 명예의 축복,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상급이었습니다. 좀더 본문과 가깝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축복이 아브람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할 상급(축복)을 바라며 살아가는 아브람에게 어느날 이상 중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나는 지극히 큰 너의 상급이니라.” 이 말씀을 내놓으라 하는 한글 번역본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내가]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공동번역). “네가 받을 보상은 매우 크다” (표준 새번역). “내가 네게 큰 상을 베풀겠다”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은 상급 주시는 분이시다 (God is a rewarder)”는 개념이 번역가들의 머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이 오늘 본문 말씀을 깊게 묵상하던 중 깨달은 바는 위의 번역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뜻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앙의 행위에 대해 상급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을 아브람에게 주셨던 바로 그날 밤에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I am your reward).”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I am your rewarder”라는 말씀과 “I am your reward”라는 말씀은 서로 분리해 놓고 보았을 때 성서적으로 둘 다 맞습니다. 하지만 문맥 속에서는 각자가 담고 있는 의미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에게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God of rewarder)”로 받아 들여지기 보다는 “아브람이 평생 기대할 상급 그 자체(reward itself)”로 받아 들여지길 받길 원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빠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내 아들 녀석이 선물 들고 들어오는 아빠를 기대하며 반겨주길 원치 않습니다. 아빠의 손에 선물이 들려 있던 없든 상관없이 아빠가 들어오시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잽싸게 달려나와 나의 품으로 뛰어 들어주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원하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상급을 기다리기 보다 하나님 자신을 기다려 주길 원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조건없이 기다려지고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되고 싶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상급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환영 받지 않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하나님으로 환영 받기 원하십니다.
어린 아기일 적에는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야 자신이 부모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아기가 성장하게 되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인 자신에게 무엇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이기에 사랑하는 겁니다.
연인들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기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겁니다. 그 연인들이 사랑하며 기대하는 것은 어떤 물질이나 이익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사랑과 희생의 최고의 대가(상급)는 남자에게 있어서는 여자 이고 여자에게 있어서는 남자 그 자체입니다. 그 이상의 그 이하의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 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된 사랑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람을 정말 깊은 사랑의 관계 속으로 인도하고 싶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와도 맺어보지 못했던 아주 깊은 사귐을 아브람과 나누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하란에서 또다시 불러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아가면서도 자신에게 주셔야 할 축복(상급)만을 계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축복이 더디 오니까 지쳐서 이젠 하나님에 대한 신뢰마저 식어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아브람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워 하시며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I am your reward)”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I am your exceedingly great reward)” 라는 표현까지 굳이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나 자신 보다 너를 위해 더 큰 상급은 없다. 나는 너가 기대할 가장 최고의 상급이다. 이것을 알아다오!” 하시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삶을 사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수고가 남달랐습니다. 그의 삶의 초점은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릴까?”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려고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따로 기도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전도하러 다니시며 몸이 몹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삶의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이 땅에서 천국 복음 전파하시고 결국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땅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밤낮 수고하면서도 한번도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했기에 아버지의 뜻을 대신 이루어 드리고자 열심을 내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그토록 열심히 수고하면서 수고에 대한 대가로 기대했던 것은 오직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 자체였습니다.
나는 지난 주간 “아브람아, 아브람아,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을 기대하며 수고했던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직 어리구나! 나는 아직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며 살아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앞으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까 기대하며 헌신하기 보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헌신의 삶을 살아야 겠다. 하나님을 나의 수고의 이유이자 대가로 삼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나는 만족하겠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을 기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살다가 왔습니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살아가겠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가(상급)를 기대하는 헌신과 수고는 때론 낙심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대가(상급)가 주어지지 않을 때 헌신과 수고 때문에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이 헌신과 수고의 모든 대가이시기에 헌신하고 수고한다면, 우리의 헌신과 수고는 계속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등산을 아는 사람은 땀 흘리며 오르고 있는 산이 좋아서 산을 타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 전에는 그 사람 역시 자기 건강을 위하여, 혹은 정상 정복의 환희를 얻기 위하여 산을 올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산을 사랑하게 된 이후엔 산이 좋아서 산을 오르는 겁니다. 그런 경지에 든 등산가를 “산사람” 이라고 부릅니다. “산사람!” 어떤 의미입니까? “산+사람”인데, “산과 하나 된 사람”이라는 의미이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이라는 말인데, “삶의 목적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맞추어져 있는 사람,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조건 없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희생이 참된 희생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희생이 있을 때 참된 관계성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신앙생활의 기쁨이란 오직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그러한 신앙의 기쁨으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그 깊은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고백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나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다. 하나님은 내가 바랄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는 고백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 고백을 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복음성가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Wes. Sutton 작곡, 인터콥 작시 번역)를 부르면서 지극히 큰 상급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해보기 바랍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묵상 기도가 끝날 무렵 조용한 목소리로 청중에게 읽어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이 이방 땅으로 포로되어 잡혀가는 암흑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하고 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민족이 기대할 모든 것임을 깨닫고서 예레미야애가 3장 24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는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러하기에 주께 내 희망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