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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 자신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믿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곧 아브람은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적으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아브람의 믿음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기쁘게 받아 들이셨다는 의미입니다.
축복이라는 조건에 관계 없이 하나님을 믿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을 아브람에게 기업으로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약속에 대해 아브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업으로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이까? (8절). 여기에 소개된 아브람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의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기쁘게 여기시고 나를 의롭다 여기시고 제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 하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실진대, 그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증표를 제게 보여주실 수 없겠습니까?” 라는 의미입니다. 증표를 원하는 아브람의 요구에 하나님은 불쾌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브람이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람 시대에 성취될 약속이 아니라 먼 훗날(4대 후)에야 이루어질 약속이었기에 아브람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증표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언약 성취의 확실성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증표로써 언약 체결 의식을 제시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9절).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는 이유는 아브람 당시에 그것들이 제사 의식의 제물로 주로 사용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년살이 동물을 제물로 선택한 이유는 삼년이 되게 되면 동물은 원숙히 성장하고 힘이 왕성하기 때문입니다 (참조: 요한 웨슬리 창세기 강해).
아침 일찍 일어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의식에 사용할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라는 게 아브람의 삶의 모토가 아닙니까? 물론 순간순간 실수하기도 하지만 아브람의 삶 전체를 평가해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살려 노력했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의 삶의 여정 역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라는 모토 속에 진행되어지길 원하는게 나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희망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믿음을 가지려면 상황(조건)에 관계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아브람은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했습니다. “취하다”는 것은 “제물로 잡아 죽이다”는 의미지요. 제물로 사용할 동물을 잡아 죽인 후 아브람은 칼로써 암소, 암염소, 수양을 절반씩 나누었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절반씩 나누진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제물을 이렇게 준비했던 이유는 아브람 당시 언약 체결 의식을 행할 때 짐승 종류는 절반씩 나누었지만 새 종류는 창자만 빼내고 정렬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짐승은 둘로 나눌만큼 부피가 충분히 크지만 새는 둘로 나누기엔 부피가 너무 작지 않습니까? 아브람은 절반씩 나눈 짐승 고기를 두 줄로 배치해 놓았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이쪽과 저쪽에다 놓았습니다. 제물이 일목요연하게 두 줄로 배치된 셈이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이 제물을 일목요연하게 두 줄로 배치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물을 태워서 그 향기를 올려드리는 번제라면 잡은 고기를 일목요연하게 두 줄로 배열해 놓을 이유가 없겠지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현재 아브람이 준비하고 있는 의식은 언약 체결을 위한 것입니다. 아브람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중요한 언약을 체결할 때 특정한 짐승(혹은 짐승들)을 잡아 그 고기를 양쪽으로 나눈 후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나누어진 고기 사이를 통과했습니다. 만약 언약 체결 의식 후 어느 누구든지 언약을 파기하면 둘로 나누어진 짐승처럼 대가를 치루겠다는 결의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Rabbi Solomon Jarchi).
언약을 파기하는 자가 받게 될 엄한 처벌(대가)에 대한 생각(사상)은 아브람 시대에만 관행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동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예는 마태복음 24:45-51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화에 의하면, 머나먼 곳으로 떠났던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 충성스런 종에게는 칭찬이 주어지지만 주인이 없는 동안 자기 뜻대로 주인의 것을 악용했던 종은 심한 매질을 당하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실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4:51). “엄히 때리고” 라고 개역성경에 번역된 구절을 NIV는 “He will cut him to pieces” 라고 번역하고 있고, KJV는 “And [He] shall cut him asunder”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NIV나 KJV이나 같은 해석을 하고 있는데, 직역 해석하면, “주인이 악한 종을 두 조각낼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이 예화의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에서 행한 우리 삶에 대한 판결의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살아간 자들은 충성된 자들이라 칭찬 받으며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 자들은 악한 종이라 책망 받으며 그의 삶의 응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만약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재판석 앞에 서 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판결을 받게 될까요?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을까요? 아니면 악한 종이라 책망 받으며 죽임 당한 곧 영원한 지옥불로 떨어지게 될까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라 하는 것들, 곧 시간, 재물, 재능은 모두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 하나님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지금 무엇하고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고기를 양쪽으로 잘 정돈해 놓은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약 체결 의식을 행하실지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선별하여 잡아 죽인 후 둘로 나누어야 할 짐승 고기는 둘로 나누고 깨끗이 씻어놓고 새 종류 고기는 내장을 빼낸 후 깨끗하게 씻어 배열해 놓기까지 몇 시간 걸렸을 것입니다. 정성껏 제물을 준비해 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아브람의 마음은 무척 설랬을 겁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약 체결 의식에 하나님께서 언약 체결자로 친히 임하시는 사건이 무척 기대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람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임재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니 나타나는 것도 가슴 태우는데 공중을 배회하는 솔개들마저 정성껏 준비해 둔 제물을 쪼아먹으로 달려듭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솔개들을 내쫓습니다 (11절). 저녁 늦게까지 하나님과 대화하고 아침 일찍부터 제물 준비하느라 수고했기에 아브람의 육신은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의 임재가 더디 나타남에 따라 아브람은 더욱 지쳐갔고, 끊임없이 날아드는 솔개들은 아브람의 육신을 거의 K.O 패 당할 지경으로 몰아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친 아브람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언젠가 어느 곳에서 무척 지쳐 있는 아브람이 힘들게 솔개를 쫓아내고 있는 성화를 본 적 있습니다. 정말로 지쳐 있는 아브람을 너무나 실감나게 잘 그려놓았더군요.
언약 체결을 위해 임하시는 하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제물을 정성껏 준비했던 아브람. 정성껏 준비한 제물이 솔개들로 말미암아 오염되지 않도록 솔개를 내쫓는 아브람. 우리는 바로 그러한 아브람을 보면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오늘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오늘 본문이 알려주고 있는 아브람의 제사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예배를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의 제물로 올려드리게 될 우리 자신을 정결케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시간에 우리를 향해 몰려드는 솔개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솔개들이란 예배를 방해하는 내적, 외적 요소들이겠지요. 세상 생각과 염려, 헛된 공상, 질투와 시기심, 분쟁과 싸움 기타 등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예배)를 방해하지요. 제물에 솔개가 닿지 못하도록 내쫓고 또 내쫓았던 아브람처럼, 우리에게 임하는 수없이 많은 영적 솔개를 내쫓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는 예배를 방해하는 솔개들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셀룰러 폰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예배만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예배 역시 방해하지요. 예배 드리러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전 셀룰러 폰은 꺼두는 것이 예의이겠지요.
언약 체결을 위해 임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다 그만 아브람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 아브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피곤했겠습니까? 아브람은 피곤함으로 인해 몰려드는 잠을 내쫓기 위해 수고했지만, 인간의 정신력 한계에 이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는 간혹 (?) 설교 시간에 조는 분들을 보게 되면, “얼마나 피곤했으면 주무실까? 잠을 물리치려 노력하지만 정신력 한계까지 이르렀기에 주무시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주무시는 분이 계시지요. 그런 분은 예배를 방해하는 잠의 솔개를 내쫓아야 합니다. 정 졸리거들랑 “미안합니다” 하면서 고개를 앞뒤로 흔들지 말고, 일어나 뒤쪽으로 가서 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현명합니다. 앉아서 조는 예배보다는 서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테니까요.
아브람은 예배를 방해하는 솔개를 내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솔개를 내쫓기 위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 하더니” (12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게 생각해 볼 단어가 있는데, “깊이 잠든” 라는 말입니다. “깊이 잠든”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타르데마인데 “깊은 잠(a deep sleep)”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성경에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오늘 본문 12절과 창세기 2:21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바로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바는 아브람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타르데마 곧 “깊은 잠”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보면 죽습니다. 비록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믿음의 사람이지만 아브람 역시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을 뵙기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시고 뒷 모습만 약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어느 인간이라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형체를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는 계시됩니다. 실로 거룩하시고 신비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방법대로 언약체결의 현장에 임하시기에 아브람을 깊은 잠 속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보게 됨으로써 죽게 되는 상황으로부터 아브람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깊은 잠 속에 빠져든 아브람은 잠 중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12절). 그리고 아브람은 400년 동안 아브람 자신의 후손이 타인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큰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기 위해 돌아오게 될 것과 아브람 자신은 장수하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서산의 해가 떨어진지 오래되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데 갑자기 연기 나는 풀무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나타나더니 갈라놓은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더라” (17절).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라진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언약 체결을 마치신 것입니다. 그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결코 파기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던 중 바로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두 눈을 감고 양손을 쳐들며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내가 확신할 수 있도록 바로 이런 증표를 보여주시다니. . .” 외치며 아브람의 두 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언약을 친히 만들어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 제시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행하십니다.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와도 언약을 맺기 원하십니다. 예배는 언약체결을 위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 무엇보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예배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올려 두십시오. 예배가 삶의 구심점이 되도록 하십시오. 예배를 위해 살아간다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예배에 성공해야 인생이 성공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 자신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믿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곧 아브람은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적으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아브람의 믿음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기쁘게 받아 들이셨다는 의미입니다.
축복이라는 조건에 관계 없이 하나님을 믿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가나안 땅을 아브람에게 기업으로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약속에 대해 아브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업으로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이까? (8절). 여기에 소개된 아브람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의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기쁘게 여기시고 나를 의롭다 여기시고 제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 하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실진대, 그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증표를 제게 보여주실 수 없겠습니까?” 라는 의미입니다. 증표를 원하는 아브람의 요구에 하나님은 불쾌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브람이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람 시대에 성취될 약속이 아니라 먼 훗날(4대 후)에야 이루어질 약속이었기에 아브람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구체적인 증표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언약 성취의 확실성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증표로써 언약 체결 의식을 제시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9절).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는 이유는 아브람 당시에 그것들이 제사 의식의 제물로 주로 사용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년살이 동물을 제물로 선택한 이유는 삼년이 되게 되면 동물은 원숙히 성장하고 힘이 왕성하기 때문입니다 (참조: 요한 웨슬리 창세기 강해).
아침 일찍 일어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의식에 사용할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라는 게 아브람의 삶의 모토가 아닙니까? 물론 순간순간 실수하기도 하지만 아브람의 삶 전체를 평가해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살려 노력했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의 삶의 여정 역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라는 모토 속에 진행되어지길 원하는게 나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희망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믿음을 가지려면 상황(조건)에 관계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아브람은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했습니다. “취하다”는 것은 “제물로 잡아 죽이다”는 의미지요. 제물로 사용할 동물을 잡아 죽인 후 아브람은 칼로써 암소, 암염소, 수양을 절반씩 나누었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절반씩 나누진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제물을 이렇게 준비했던 이유는 아브람 당시 언약 체결 의식을 행할 때 짐승 종류는 절반씩 나누었지만 새 종류는 창자만 빼내고 정렬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짐승은 둘로 나눌만큼 부피가 충분히 크지만 새는 둘로 나누기엔 부피가 너무 작지 않습니까? 아브람은 절반씩 나눈 짐승 고기를 두 줄로 배치해 놓았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이쪽과 저쪽에다 놓았습니다. 제물이 일목요연하게 두 줄로 배치된 셈이지요.
그렇다면 아브람이 제물을 일목요연하게 두 줄로 배치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물을 태워서 그 향기를 올려드리는 번제라면 잡은 고기를 일목요연하게 두 줄로 배열해 놓을 이유가 없겠지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현재 아브람이 준비하고 있는 의식은 언약 체결을 위한 것입니다. 아브람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중요한 언약을 체결할 때 특정한 짐승(혹은 짐승들)을 잡아 그 고기를 양쪽으로 나눈 후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나누어진 고기 사이를 통과했습니다. 만약 언약 체결 의식 후 어느 누구든지 언약을 파기하면 둘로 나누어진 짐승처럼 대가를 치루겠다는 결의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Rabbi Solomon Jarchi).
언약을 파기하는 자가 받게 될 엄한 처벌(대가)에 대한 생각(사상)은 아브람 시대에만 관행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동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예는 마태복음 24:45-51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화에 의하면, 머나먼 곳으로 떠났던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 충성스런 종에게는 칭찬이 주어지지만 주인이 없는 동안 자기 뜻대로 주인의 것을 악용했던 종은 심한 매질을 당하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실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4:51). “엄히 때리고” 라고 개역성경에 번역된 구절을 NIV는 “He will cut him to pieces” 라고 번역하고 있고, KJV는 “And [He] shall cut him asunder”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NIV나 KJV이나 같은 해석을 하고 있는데, 직역 해석하면, “주인이 악한 종을 두 조각낼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이 예화의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에서 행한 우리 삶에 대한 판결의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살아간 자들은 충성된 자들이라 칭찬 받으며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 자들은 악한 종이라 책망 받으며 그의 삶의 응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만약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재판석 앞에 서 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판결을 받게 될까요?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을까요? 아니면 악한 종이라 책망 받으며 죽임 당한 곧 영원한 지옥불로 떨어지게 될까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라 하는 것들, 곧 시간, 재물, 재능은 모두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 하나님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지금 무엇하고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고기를 양쪽으로 잘 정돈해 놓은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약 체결 의식을 행하실지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제물로 사용할 짐승을 선별하여 잡아 죽인 후 둘로 나누어야 할 짐승 고기는 둘로 나누고 깨끗이 씻어놓고 새 종류 고기는 내장을 빼낸 후 깨끗하게 씻어 배열해 놓기까지 몇 시간 걸렸을 것입니다. 정성껏 제물을 준비해 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아브람의 마음은 무척 설랬을 겁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약 체결 의식에 하나님께서 언약 체결자로 친히 임하시는 사건이 무척 기대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람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임재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니 나타나는 것도 가슴 태우는데 공중을 배회하는 솔개들마저 정성껏 준비해 둔 제물을 쪼아먹으로 달려듭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솔개들을 내쫓습니다 (11절). 저녁 늦게까지 하나님과 대화하고 아침 일찍부터 제물 준비하느라 수고했기에 아브람의 육신은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의 임재가 더디 나타남에 따라 아브람은 더욱 지쳐갔고, 끊임없이 날아드는 솔개들은 아브람의 육신을 거의 K.O 패 당할 지경으로 몰아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친 아브람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언젠가 어느 곳에서 무척 지쳐 있는 아브람이 힘들게 솔개를 쫓아내고 있는 성화를 본 적 있습니다. 정말로 지쳐 있는 아브람을 너무나 실감나게 잘 그려놓았더군요.
언약 체결을 위해 임하시는 하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제물을 정성껏 준비했던 아브람. 정성껏 준비한 제물이 솔개들로 말미암아 오염되지 않도록 솔개를 내쫓는 아브람. 우리는 바로 그러한 아브람을 보면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오늘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오늘 본문이 알려주고 있는 아브람의 제사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예배를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의 제물로 올려드리게 될 우리 자신을 정결케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시간에 우리를 향해 몰려드는 솔개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솔개들이란 예배를 방해하는 내적, 외적 요소들이겠지요. 세상 생각과 염려, 헛된 공상, 질투와 시기심, 분쟁과 싸움 기타 등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예배)를 방해하지요. 제물에 솔개가 닿지 못하도록 내쫓고 또 내쫓았던 아브람처럼, 우리에게 임하는 수없이 많은 영적 솔개를 내쫓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는 예배를 방해하는 솔개들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셀룰러 폰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예배만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예배 역시 방해하지요. 예배 드리러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전 셀룰러 폰은 꺼두는 것이 예의이겠지요.
언약 체결을 위해 임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다 그만 아브람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 아브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피곤했겠습니까? 아브람은 피곤함으로 인해 몰려드는 잠을 내쫓기 위해 수고했지만, 인간의 정신력 한계에 이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는 간혹 (?) 설교 시간에 조는 분들을 보게 되면, “얼마나 피곤했으면 주무실까? 잠을 물리치려 노력하지만 정신력 한계까지 이르렀기에 주무시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주무시는 분이 계시지요. 그런 분은 예배를 방해하는 잠의 솔개를 내쫓아야 합니다. 정 졸리거들랑 “미안합니다” 하면서 고개를 앞뒤로 흔들지 말고, 일어나 뒤쪽으로 가서 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현명합니다. 앉아서 조는 예배보다는 서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테니까요.
아브람은 예배를 방해하는 솔개를 내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솔개를 내쫓기 위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 하더니” (12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게 생각해 볼 단어가 있는데, “깊이 잠든” 라는 말입니다. “깊이 잠든”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타르데마인데 “깊은 잠(a deep sleep)”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성경에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오늘 본문 12절과 창세기 2:21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바로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바는 아브람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타르데마 곧 “깊은 잠”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보면 죽습니다. 비록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믿음의 사람이지만 아브람 역시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을 뵙기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시고 뒷 모습만 약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어느 인간이라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형체를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는 계시됩니다. 실로 거룩하시고 신비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방법대로 언약체결의 현장에 임하시기에 아브람을 깊은 잠 속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보게 됨으로써 죽게 되는 상황으로부터 아브람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깊은 잠 속에 빠져든 아브람은 잠 중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12절). 그리고 아브람은 400년 동안 아브람 자신의 후손이 타인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큰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기 위해 돌아오게 될 것과 아브람 자신은 장수하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서산의 해가 떨어진지 오래되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데 갑자기 연기 나는 풀무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나타나더니 갈라놓은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더라” (17절).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라진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언약 체결을 마치신 것입니다. 그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결코 파기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던 중 바로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두 눈을 감고 양손을 쳐들며 “할렐루야!”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내가 확신할 수 있도록 바로 이런 증표를 보여주시다니. . .” 외치며 아브람의 두 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언약을 친히 만들어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 제시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행하십니다.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와도 언약을 맺기 원하십니다. 예배는 언약체결을 위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 무엇보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예배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올려 두십시오. 예배가 삶의 구심점이 되도록 하십시오. 예배를 위해 살아간다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예배에 성공해야 인생이 성공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