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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창세기 15:12-21 (2003년 10월 26일 주일예배)
“너하고 나는 친구 되어서 사이 좋게 지내자. 새끼 손가락 고리 걸고 꼭꼭 약속해.” 어렸을 때 많이 불렀던 동요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약속할 때 새끼 손가락을 사용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질문을 받은 후) 새끼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비해 고리가 걸기가 쉬워서 입니다.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손가락을 내밀어 상대방의 것과 거는 것은 아무래도 새끼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불편하지 않습니까? (썰렁?)
오늘 본문에 보면, 새끼 손가락 거는 것보다 한층 엄숙한 언약 체결 의식이 소개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수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양쪽으로 일목요연하게 나누어 배열하도록 하신 후 저녁 늦은 시간에 횃불 형상으로 자신을 현현하시면서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실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된 언약 체결 의식이었지요.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을 통하여 아브람에게 허락해 주신 언약을 반드시 지켜 이루어주실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시는 엄숙한 의식을 행하시면서까지 반드시 이루어주겠노라 아브람에게 들려주신 언약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식이 너무 엄숙하고 숨막힐만하기에 특별히 대단한 사람과 대단한 일을 이루기 위한 의식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으로 막상 그 언약의 뚜껑을 열어보노라면 너무 실망스러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언약이 타인의 나라에서 실로 오랫 동안 종살이 하고 있는 참으로 무능한 한 백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무려 400년 이상 타국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백성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겠다 하신 언약의 선물이란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이란 죄악이 관영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눈 앞에
둔 저주 받은 땅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서 타국에서 400년 이상이나 종살이 하고 있는 힘 없는 백성에게 죄악이 관영해서 결국 심판 받을 땅을 주겠다는 언약인데, 그 언약을 위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굳이 그토록 엄숙한 언약 체결 의식을 친히 행하실 이유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 할수록 오늘 본문에 소개된 언약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본문이 독자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교훈이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매력이 느껴지는 첫째 요소는 위에서 아래로 조건없이 주어진 언약의 특징이 너무 잘 설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언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노라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7절). 그리고 그 약속이 말 뿐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 체결 의식을 친히 제의하셨고, 결국 그 언약 체결 현장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7절).
17절 말씀에 의하면, 아브람은 관찰자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약의 확실성을 증명해 주실 것인지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브람은 언약 체결 의식에서 의식에 사용될 제물은 준비했지만 하나님과 함께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언약은 오직 하나님만이 친히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람에게, 아니 400년 후에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에게 이루어질 언약 성취에 대해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언약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취해 주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제시해주신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방적으로 주어진 언약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약속대로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중에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주어진 언약 가운데 가장 큰 언약은 창세기 3:15에 제시된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언약”일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언약”은 아담의 죄악으로 인해 타락한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자를 보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아담은 자신을 두르고 있는 죽음의 저주를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낼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빛을 제시하셨는데, 그 빛이 바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의 죄악의 사슬을 아담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듯, 우리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악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버릴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죄악과 죽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은 우리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진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아브람이 언약 체결 의식에 동참할 수 없었듯, 우리는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힘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죄인이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사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죄인에게 있어서 최선은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을 잘 받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언약 성취는 오직 그 언약을 만드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도록 하시고 그에게 인류의 모든 죄악의 짐을 짊어지도록 하시며 짊어진 죄악을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루도록 하셨습니다.
언약을 제시하시고 언약 체결 의식을 통해 언약의 확실성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아브람이 믿고 그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던 아브람처럼, 우리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언약을 제정하시고, 그 언약을 독생자 아들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언약이 성취 되었음을 믿는 자에겐 구원이 임합니다.
오늘 본문의 언약에 매력을 느끼는 둘째 요소는 하나님의 언약이 아무 것도 내놓으라 할 게 없는 백성에게 주어졌고, 그 언약이 바로 그들을 위해 성취된다는 점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수혜자는 이스라엘 백성인, 언약이 성취될 당시에 그들은 400년 동안 (엄밀히 계산해보면 430년)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노예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특별한 존재이기에 주어진 게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값없이 우리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은혜(카리스)라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제 잘 났다 뽐낼 게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자에게도 이런 은혜를 내려주시다니요. . .” 고백하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게 옳습니다.
나는 과거에 본문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면 아브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기 굳이 그가 죽고 난 이후 40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도록 하셨을까?” 생각하며 몹시 못마땅해 했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16절)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말입니다. 허락해 주실 땅이라면 약속해 주신 그 당시에 곧바로 허락해 주시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생각이라 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당장에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당장에 이루어지길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짜증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바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시간대가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이루어주고자 하는 시간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본문의 언약에 내가 매력을 느끼는 셋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자신의 시간대에 맞게 이루어가십니다. 가나안 땅을 아브람에게 기업으로 얻도록 하겠노라 약속하셨을 때, 그 약속은 아브람 당시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400년 후에 그의 후손에게 이루어질 것이라 계획하시고, 계획된 시간대에 약속을 이루셨던 것처럼.
400년이라는 오랜 기다림의 기간은 아브람의 자손 곧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낮아져야 했습니다. 훗날에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질책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수도 없지 듣지 않습니까? 그들은 낮아져도 철저히 낮아져야 했습니다. 종처럼 낮아져야 했습니다. 아니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종이 되어야 주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으니까요. 종이 되어야 주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도구가 되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고백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듯 싶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뜻이 앞서 버립니다. 자존심 상하거나 무시 받는다 싶으면 헌신을 즉시 중단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은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와 세상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자기 자신이 포기된만큼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또한 그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언약에 매력을 느끼는 넷째 요소는 심판이 임할 땅이 아브람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물론 그 땅에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입니다 (16절). “관영한”(히 솨렘)는 말은 “완전한, 충만한”이라는 뜻인데, 그 땅에 죄악이 퍼질대로 퍼져 있어서 선함이나 의로움은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심판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아브람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으로 얻을 땅은 저주받은 땅, 심판 받을 땅, 희망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관영한 죄악으로 인해 심판받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해 주셨을까요? 가나안 땅 말고도 수없이 많은 땅이 이 세상에 있는데 말입니다. 가나안 땅보다 토질이 좋은 땅이 얼마든지 주변에 널려 있었는데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듣기에 이상할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아브람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신 이유는 그 땅이 죄악으로 인해 심판 받을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나안 땅은 그곳에 살고 있던 족속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란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터미네이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치유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땅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죄악으로 관영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되는 땅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땅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만한 땅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람(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노라 약속하신 것에서 충분히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맡기면서 그 땅이 치유받기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으로 관영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뒤덮고 있던 죄악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죄악을 쫓아내는 길은 죄악의 불러온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것이자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원주민들을 죽여 그 땅을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원주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원주민을 가나안 땅에서 몰아낸 이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 땅 위에서 살던 백성의 삶이 풍요로웠고, 기쁨이 넘쳤으며, 행복했습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 누리는 백성의 즐거움을 세상 만국에 전파해야 했습니다. 물론 입술로의 전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누리는 그들의 풍요로운 삶으로써 전파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의 언약을 믿는 백성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을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로 말미암아 이 땅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되는 땅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땅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만한 땅으로 변화되기 원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언약을 믿고 구원 받은 우리에게 맡겨진 곳입니다. 우리는 할 일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을 치유하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할 일이 많습니다. 이 땅을 치유하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가운데 있는 죄악을 청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죄악을 청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긋나 있는 생각과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실 것입니다. 행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토록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풍요롭고 행복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하며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된 구원의 언약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입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을 치유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까? 여러분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이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서 하나님께로 나아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