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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연합감리교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책을 읽고 있다고 가정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마도 수많은 소떼와 양떼 그리고 약대떼가 큰 무리를 이루어 길을 진행하고
있는 것과 그 큰 가축떼를 몰고 있는 많은 종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차에 타고 있는 늙은 부부 내외와 그들의 아들뻘 되어 보이는 남자와 그의 식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자, 지금 여러분에게 전체의 그림이 보입니까? 그것이 보인다면, 여러분의 시선의 초점을 그 큰 행렬 가운데 주인공으로 보이는 늙은 부부의 얼굴에 맞추어보기 바랍니다.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행복한 모습입니까? 자신만만한 모습입니까? 아니! 아니라구요? 다시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들은 큰 무리의 가축떼만 이끌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금은보화가 잔뜩 들어있는 금고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여야 하는 것이 아
닙니까? 그들에게 자신만만한 모습이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구요? 그들의 어깨가 축늘어져 있다구요? 만약 여러분께서 그들의 얼굴로부터 행복한 미소보다는 초라한 아니 왠지 불행해 보이는 표정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본문의 만화를 매우 잘 보신 것입니다. 그 늙은 내외의 얼굴은 수색에 잠긴 모습일 것이고, 그들의 어깨는 축늘어져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길을 가고 있을까요? 수많은
가축떼를 이끌고 가고 있으면서. 풍부한 금과 은을 가지고 가고 있으면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들은 빈손으로 현재 그들이 걸어오고 있는 길의 반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만에 그들은 수많은 가축떼와 수많은 종들 그리고 풍부한 금과 은을 얻고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은 성공하여 금위환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늙은 내외가 깊은 수색에 잠긴 모습으로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자, 이젠 만화에서 눈을 떼고 설교자인 내게 시선을 맞추어주기 바랍니다. 그 늙은 내외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입니다. 그들은 몇 달전 가나안 전역을 찾아든 심각한 가뭄을 피하여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애굽으로 내려갔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몇 개월 후 애굽을 빠져나올 때는 수많은 가축떼와 종들 그리고 풍부한 금은보화를 손에 쥐고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브람 부부는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소개하는 거짓말 한마디로 단기간에 성공을 한손에 검어쥔 사람들입니다. 위기를 거짓말 한마디로 기회로 아주 현명하게 (?) 바꾼 인생 역전 드라마를
일구어낸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성공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많은 물질을 얻는데 두고 있습니까? 명예를 얻는데 두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성공한 사람들입니까? 스스로의 삶을 평가하면서 “나는 성공했다”고 자평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 . 재물을 모았다면 얼마나 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명예를 얻었다면 얼마나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람보다 더 얻었을까요?
세상적인 성공 기준을 삼아 아브람의 성공을 평가한다면, 그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가나안으로 다시 들어온 아브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2절). 한글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에는 2절에 “심히 (히브리 메오드)”라는 수식어가 들어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심히] 풍부하였더라.” “심히”라는 부사는 “(최상급 표현으로써) 대단히, 크게, 매우, 많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아브람이 큰 재물을 얻었다고 표현하고 있다면, 아브람은 정말로 놀랄만큼의 커다란 재물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성공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
브람을 성공했다고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성공의 기준을 결코 물질의 많고 적음에 두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축떼와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아브람은 실패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수색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무엇에 대하여 실패했다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의 관계를 포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이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내와의 부부됨의 약조를 포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패자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성공한 인생입니까?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고 있는 아브람의 귀향은 그가 애굽에서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곳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가축떼와 풍부한 금은보화를 얻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를 팔았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을 팔았습니다. 축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그가 오히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의 근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은 애굽 왕과 애굽 백성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엄청난 재앙을 만난 바로는 재앙의 근원이 자신이 후궁으로 삼고자 하는 사래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아브람의 아내였던 사래를 취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창 12:17). 바로는 급히 아브람과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애굽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과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브람의 거짓말로 인하여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장본인은 바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람에게 화풀이 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래를 사들이기 위해 아브람에게 주었던 재물을 다시 빼앗고 아브람을 빈손으로 만들어 돌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그렇게 대했다고 해도 아브람은 아무런 할말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불순종과 거짓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는 자신이 받은 엄청난 피해에 대한 대가를 아브람에게 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브람이 재발 빨리 애굽에서 나가주길 원했습니다. 왜? 바로가 성공한 아브람을 무서워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여호와라는 신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하고서 애굽에서 문제에 문제를 수없이 만들어냈던 문제아 아브람. 그는 참담한 마음으로 애굽에서 쫓겨난 후 어느 특정한 곳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향해? 3절을 읽어봅니다.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착쳤던 곳에 이르니.” 그는 벧엘을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고 많은 가나안 지역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아브람이 벧엘을 향해 갔던 것입니까? 4절 상반절을 읽어봅니다.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실패한 아브람이 벧엘을 향해 길을 갔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인생을 살아가던 과거에 자신이 쌓았던 제단이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12:8).
아브람이 벧엘로 다시 올라갔던 이유는 방치해 두었던 단을 재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문제에 문제를 만들어낸 자신을 애굽에서 지키신 여호와 하나님을 너무나 실감나게 경험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자신의 아내를 팔아 자신의 신변 안전과 풍부한 재물을 얻는 실로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앙을 바로에게 내리심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바로로부터 보호해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비록 자기 자신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사 아브람 자신과 사래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쳐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죄악이 극에 달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낙심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죄가 많아도, 비록 얼굴을 감히 들 수 없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위대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비록 실수했어도, 비록 자신의 죄악과 실수로 인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죄가 많아도,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겠다고 생각되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위대한 신앙은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갈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찬 338장 1절). 이 찬송가는 한평생을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바쳤던 챨스 웨슬리 목사님께서 쓰신 찬송시입니다. 그는 매사에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문제를 만들어내던 아브람이 벧엘에 올라가 제단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올려드렸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자신들 역시 두 손 높이 쳐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속죄제사를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주일예배는 아브람이 벧엘에서 쌓았던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애굽에서 실패했어도 다시 벧엘로 올라가는 아브람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것처럼, 비록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죄를 지었다고 해도 벧엘, 곧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의 전으로 나아와 주의 전에서 앉거들랑 두 손 높이 쳐들고 하나님을 향해 외치기 바랍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두 손 들고 벧엘로 나아온 아브람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원했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제사는 과거의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 따라 충성스럽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서약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의 죄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자신과의 깊은 영적 관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절 하반절).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거기 곧 벧엘의 제단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 불러 외쳤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브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집의 막내녀석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재빨리 도망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실수로 물이 든 컵을 카펫에 쏟게 되면 재빨리 자기 방으로 도망쳐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그리고 밖의 상황이 조용하다 싶으면 슬거머니 빠져나옵니다. 죄를 지으면 죄를 지은 당사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일 뿐더러 그의 이름조차 감히 부르지 못합니다. 애굽을 빠져나온 아브람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의 어깨는 쭉 늘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4절 하반절을 보면 그의 얼굴은 하늘을 향해 들려 있을 뿐더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리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다시 받아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고 있는 바로 이 예배가 아브람이 벧엘에서 쌓았던 제사와 같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받아주셨음을 느끼고, 감사하며, 이렇게 찬송하기 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