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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철랑목사 (부천동광교회)
어떤 시골 장터에 서커스단이 들어와서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한 소년이 구경은 하고 싶은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개구멍으로 들어가다가 감시원에게 들켰습니다. “어디로 머리를 처박고 들어오는 거야!” 얻어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 궁리 끝에 좋은 생각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는 엉덩이부터 들여놓았습니다. 감시원이 보고 달려오더니 “얘야 거기는 문이 아니야 그리 나가면 안돼. 이리 들어와” 하고 끌어들였습니다. 소년은 버젖이 앉아 서커스구경을 잘 했습니다. 기발한 생각이이 아닙니까? 그 나름대로 창의력입니다. 영국의 명문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종교학 시험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 날 시험 문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기적에 담기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서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시험시간이 거의 끝나는데도 한 학생은 한자도 쓰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험 감독이 다가가서 답안지를 곧 걷을 테니 무슨 말이라도 쓰라고 재촉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학생은 펜을 들어 한 줄로 썼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그 학생이 나중에 영국 최고의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이런입니다. 그의 창의력이 위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새 창조 신앙으로 부흥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창조란 가만히 정지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여호와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쉴새없이 무엇인가 되어 가는 자” 라는 뜻입니다. 창조적 신앙이란, 이미 완성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미완성에서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하신 말씀처럼 정신, 감정, 생각이 날마다 새롭게 갱신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창조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라’라는 말인데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런 원료도 없이 재료를 만드신 것입니다. 둘째는 ‘아사’라는 말입니다. 이미 있는 재료로 더욱더 나은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흙이라는 재료로 인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섯째, ‘야찰’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존재를 창조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 존재를 만들 때 쓰인 말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구두쇠로 소문난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유언 하셨습니다. “절대로 장례식 비용을 많이 들이지 말라”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자녀들과 친척들이 모여서 장례식을 치르는 문제를 의논하는데, 이구동성으로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대하게 하기로 결정하자 눈을 감았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그럼 나 안 죽는다. 안 죽어” 그랬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뼈들에게 말씀을 대언할 때 모두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생기는 생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원초적인 에너지입니다. 생기가 들어가서 죽은 자를 살려 낸 것입니다. 창조적 신앙으로 부흥한다는 것은 고목 나무에서 싹이 나듯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다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성이 변하고 삶과 행위가 새로워진 사람을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 첫째는 회개입니다. 인간은 참회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짐승도 잘못을 저지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본능적인 반응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하신 대상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합니다.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새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둘째는 새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지성과 의지가 일하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옴으로 새 마음을 갖게 됩니다. 지성 의지 판단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나은 상태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창조적 신앙부흥입니다. “새 영을 너희에게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겔36:26) 하신 하나님이 창조적 신앙으로 살려주시길 원합니다.
생산적 신앙으로 부흥해야 합니다.
생산(生産)이란 새끼를 낳는 것을 말합니다. 경제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만들어 내거나 증가시키는 것을 생산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생산성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2절)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운행이란 히브리어로 ‘라히프’인데, 그 말은 “새가 소중히 알을 품다”라는 뜻입니다. 새가 새 생명의 탄생을 열망하면서 알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은 생산성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영적 자녀를 생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이혼율은 급증하고 출산율은 급감하고 수명은 자꾸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노인의 나라로 전락할 것 같습니다.
국가 경제도 그렇습니다. 6.25가 끝나고 난 후 우리나라는 농경 사회였고 교육과 경제는 엉망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철저한 산업 사회로 전환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여 영국이 250년 걸리고 미국이나 독일 프랑스가 80년에서 100년에 걸쳐서 이룩한 경제 개발을 3,40년 만에 해냈습니다.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한강의 기적이었습니다.
40년전 만해도 한국에는 기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많아졌습니다. 정보통신 반도체, IT업종이 국가 경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자동차, 조선, 철강업 등이 효자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184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의 산업은 세계에서 일류였습니다. 기술개발 면에서도 최고였습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기술면에서 단연 앞서가던 영국인이 기술자를 경멸한 것입니다. 영국이 경제적으로 퇴보한 것은 기술자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세계 경제를 언제까지 지배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중국과 인도가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제권이 곧 중국으로 인도로 넘어갈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에서 이공계 지망생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불길한 징조입니다. 생산활동이 둔화되면 경제는 몰락하고 맙니다. 머리 좋은 학생들이 법대 나와서 판검사나 되고 이어서 정치를 한다면 우리의 미래 산업은 어찌 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뜻있는 기업들이 이공계를 살리자고 팔을 걷었습니다. 삼성전자는 70%를 이공계로 채우겠다고 합니다. 기업들이 이공계 학생에게 장학금과 취업을 보장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전도하지 않아서입니다. 지금도 전도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올 한해 100명 전도하겠다고 약속한 분도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아이가 둘인데 또 하나 임신을 했답니다. -당신들은 뭣들 하는거요! 아이라도 낳으라고!- 119전도 운동, 우리 모두 한사람 책임지고 전도합시다. 부흥이여 내게 오라! 하고 부흥이 와서 “나 여기 있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에너지 신앙으로 부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3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하시며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열 번이나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말씀은 창조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하나님의 말씀은 곧 능력 ‘power’입니다. 행위 ‘Action’입니다. 창조하실 때 말씀하시듯이 지금도 권고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회복해야 할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에너지로 받아 활용하는 일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떡을 먹듯이 말씀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어부로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았으나 전혀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변에 오셔서 그의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배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 는 밤이 새도록 수고했으나 잡은 것은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깊은 데에 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이 힘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에너지로 작용한 것입니다. 말씀의 힘으로 다시 그물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빛이 존재하라는 명령입니다.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열이요 불입니다(사44:16, 사31:9). 여기서 말하는 빛은 에너지원입니다. 정력이요 힘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빛은 하나님의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태양 에너지는 지구의 모든 생물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태양 에너지가 지구에 도달하는 것은 백억분의 3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나 도달할까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에너지를 활용해야 능력 있는 삶을 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 와서 말씀을 듣고 나면 내가 돌멩이를 던지면 달에 떨어질 것만 같은 스릴을 느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여 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 하리이다”(시73:28). 하나님의 에너지가 여러분의 심장에 주입되도록 하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힘, 놀라운 파워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하셨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로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은 반드시 해산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고통을 즐겁게 감수할 때 창조적 신앙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4절) 창조적 신앙 부흥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입니다. 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다. ''베리 굳(very good)''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적합성이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히브리어 좋았다는 말은 “위대하다” 는 의미입니다. “놀랍다”는 뜻입니다. “완벽하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창조적 신앙으로 부흥하시기 바랍니다. 살아나고 깨어나고 걷고 뛰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모든 은사를 일으켜 100%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시골 장터에 서커스단이 들어와서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한 소년이 구경은 하고 싶은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개구멍으로 들어가다가 감시원에게 들켰습니다. “어디로 머리를 처박고 들어오는 거야!” 얻어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 궁리 끝에 좋은 생각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는 엉덩이부터 들여놓았습니다. 감시원이 보고 달려오더니 “얘야 거기는 문이 아니야 그리 나가면 안돼. 이리 들어와” 하고 끌어들였습니다. 소년은 버젖이 앉아 서커스구경을 잘 했습니다. 기발한 생각이이 아닙니까? 그 나름대로 창의력입니다. 영국의 명문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종교학 시험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 날 시험 문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기적에 담기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서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시험시간이 거의 끝나는데도 한 학생은 한자도 쓰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험 감독이 다가가서 답안지를 곧 걷을 테니 무슨 말이라도 쓰라고 재촉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학생은 펜을 들어 한 줄로 썼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그 학생이 나중에 영국 최고의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이런입니다. 그의 창의력이 위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새 창조 신앙으로 부흥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창조란 가만히 정지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여호와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쉴새없이 무엇인가 되어 가는 자” 라는 뜻입니다. 창조적 신앙이란, 이미 완성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미완성에서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하신 말씀처럼 정신, 감정, 생각이 날마다 새롭게 갱신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창조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라’라는 말인데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런 원료도 없이 재료를 만드신 것입니다. 둘째는 ‘아사’라는 말입니다. 이미 있는 재료로 더욱더 나은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흙이라는 재료로 인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섯째, ‘야찰’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존재를 창조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 존재를 만들 때 쓰인 말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구두쇠로 소문난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유언 하셨습니다. “절대로 장례식 비용을 많이 들이지 말라”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자녀들과 친척들이 모여서 장례식을 치르는 문제를 의논하는데, 이구동성으로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대하게 하기로 결정하자 눈을 감았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그럼 나 안 죽는다. 안 죽어” 그랬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뼈들에게 말씀을 대언할 때 모두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생기는 생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원초적인 에너지입니다. 생기가 들어가서 죽은 자를 살려 낸 것입니다. 창조적 신앙으로 부흥한다는 것은 고목 나무에서 싹이 나듯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다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성이 변하고 삶과 행위가 새로워진 사람을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 첫째는 회개입니다. 인간은 참회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짐승도 잘못을 저지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본능적인 반응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하신 대상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합니다.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새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둘째는 새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지성과 의지가 일하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옴으로 새 마음을 갖게 됩니다. 지성 의지 판단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나은 상태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창조적 신앙부흥입니다. “새 영을 너희에게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겔36:26) 하신 하나님이 창조적 신앙으로 살려주시길 원합니다.
생산적 신앙으로 부흥해야 합니다.
생산(生産)이란 새끼를 낳는 것을 말합니다. 경제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만들어 내거나 증가시키는 것을 생산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생산성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2절)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운행이란 히브리어로 ‘라히프’인데, 그 말은 “새가 소중히 알을 품다”라는 뜻입니다. 새가 새 생명의 탄생을 열망하면서 알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은 생산성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영적 자녀를 생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이혼율은 급증하고 출산율은 급감하고 수명은 자꾸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노인의 나라로 전락할 것 같습니다.
국가 경제도 그렇습니다. 6.25가 끝나고 난 후 우리나라는 농경 사회였고 교육과 경제는 엉망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철저한 산업 사회로 전환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여 영국이 250년 걸리고 미국이나 독일 프랑스가 80년에서 100년에 걸쳐서 이룩한 경제 개발을 3,40년 만에 해냈습니다.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한강의 기적이었습니다.
40년전 만해도 한국에는 기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많아졌습니다. 정보통신 반도체, IT업종이 국가 경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자동차, 조선, 철강업 등이 효자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184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의 산업은 세계에서 일류였습니다. 기술개발 면에서도 최고였습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기술면에서 단연 앞서가던 영국인이 기술자를 경멸한 것입니다. 영국이 경제적으로 퇴보한 것은 기술자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세계 경제를 언제까지 지배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중국과 인도가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제권이 곧 중국으로 인도로 넘어갈는지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에서 이공계 지망생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불길한 징조입니다. 생산활동이 둔화되면 경제는 몰락하고 맙니다. 머리 좋은 학생들이 법대 나와서 판검사나 되고 이어서 정치를 한다면 우리의 미래 산업은 어찌 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뜻있는 기업들이 이공계를 살리자고 팔을 걷었습니다. 삼성전자는 70%를 이공계로 채우겠다고 합니다. 기업들이 이공계 학생에게 장학금과 취업을 보장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전도하지 않아서입니다. 지금도 전도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올 한해 100명 전도하겠다고 약속한 분도 있습니다. 김목사님은 아이가 둘인데 또 하나 임신을 했답니다. -당신들은 뭣들 하는거요! 아이라도 낳으라고!- 119전도 운동, 우리 모두 한사람 책임지고 전도합시다. 부흥이여 내게 오라! 하고 부흥이 와서 “나 여기 있소”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에너지 신앙으로 부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3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하시며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열 번이나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말씀은 창조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하나님의 말씀은 곧 능력 ‘power’입니다. 행위 ‘Action’입니다. 창조하실 때 말씀하시듯이 지금도 권고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회복해야 할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에너지로 받아 활용하는 일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떡을 먹듯이 말씀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어부로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았으나 전혀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변에 오셔서 그의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배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나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 는 밤이 새도록 수고했으나 잡은 것은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깊은 데에 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이 힘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에너지로 작용한 것입니다. 말씀의 힘으로 다시 그물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빛이 존재하라는 명령입니다.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열이요 불입니다(사44:16, 사31:9). 여기서 말하는 빛은 에너지원입니다. 정력이요 힘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빛은 하나님의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태양 에너지는 지구의 모든 생물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태양 에너지가 지구에 도달하는 것은 백억분의 3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에너지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나 도달할까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에너지를 활용해야 능력 있는 삶을 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 와서 말씀을 듣고 나면 내가 돌멩이를 던지면 달에 떨어질 것만 같은 스릴을 느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여 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 하리이다”(시73:28). 하나님의 에너지가 여러분의 심장에 주입되도록 하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힘, 놀라운 파워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하셨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말로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은 반드시 해산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고통을 즐겁게 감수할 때 창조적 신앙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4절) 창조적 신앙 부흥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입니다. 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다. ''베리 굳(very good)''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적합성이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히브리어 좋았다는 말은 “위대하다” 는 의미입니다. “놀랍다”는 뜻입니다. “완벽하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창조적 신앙으로 부흥하시기 바랍니다. 살아나고 깨어나고 걷고 뛰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모든 은사를 일으켜 100% 활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