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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규목사 (광주중앙교회)
오늘은 전국 교회가 지키는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배 후에 국화꽃 축제일이면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밤 예배 시간에는 해마다 지키는 가족 찬양의 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 시간 여기 세 가지 내용을 바탕으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함께 따라서 합시다. ''인생이 무엇인가’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첫째: 마땅히 개혁해야 할 인생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천주교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종교 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486주년을 맞는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당시 루터의 표어가 무엇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외치면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고 했고 믿음 생활은 항상 개혁하는 생활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대게 인생들은 말합니다. 인생은 쾌락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이팔 청춘에 구가하는 젊은이들의 구호입니다. 인생은 물질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인생의 핸들을 지옥을 향해도 좋다는 황금 만능 주의자들의 구호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권세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권세의 맛을 알게된 정치인들의 넋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인생이 무엇입니까? 본문 욥기서가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벌레 인생, 구더기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다 인생이 이 모양 되었을까요? 본래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와를 향해서 어찌했습니까?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이는 인류 최초의 남자가 최초의 여자에게 최초로 고백했던 사랑의 서사시입니다. 그런데 나중 형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나이다’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인 그 여인이 원망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은 그렇게 못하지만 학생 시절에는 제가 책을 많이 읽곤 했습니다. 한권 읽고 제목 쓰고 한권 읽고 제목 쓰고 재미있었습니다. 272번째 읽은 책이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카프카의 ‘변증’이라고 하는 책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변신하여 벌레가 됩니다. 대화 상실 인간상실 이런 비극적인 것을 묘사해놓은 내용인데 감명이 깊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벌레 인생입니다. 구더기 인생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주일에 개혁해야 될 것 많이 있습니다. 물론 종교가 개혁되어야 하고 교회가 개혁해야 하고 그리고 사상이 개혁이 되고 지저분한 윤리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 그 자체입니다. 인생이 개혁되어야 정치가 개혁되고 교육이 개혁되고 경제가 개혁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 모두의 사고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어렵다, 안된다, 하지 말자 이러한 사고는 망국병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 ''No'' 이것을 ''Yes''로 바꾸어야 합니다. ''No''를 뒤집어서 ''on''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can not''을 변혁시켜야 하고 개혁시키기 위해서 ''not''를 사정없이 빼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I can do''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란은 그 껍질을 깨지 않고 병아리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일을 개혁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원리입니다. 이 시간 자기라는 고집의 껍질을 깹시다. ‘나’, ‘나’, ‘나’라는 욕심과 오만의 껍데기를 벗겨 봅시다. 우리 모두는 새 성전에서 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과감해야 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대담해야 합니다. 인생은 과감하게 인생은 대담하게 주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구정물을 비우지 않고야 어찌 새 물을 담을 수 있습니까? 물론 내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해야 하고 또 바울이 말한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방법을 개혁하고 믿음으로 사고를 개혁하고 믿음으로 인생을 새롭게 새 출발하는 우리 모두 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둘째, 국화꽃 모습으로 사는 인생
오늘 국화꽃 축제의 날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온 교회가 국화꽃으로 아름답게 단장되었고 국화꽃 향기가 온 교회에 그윽합니다. 그야말로 국화꽃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저는 서정주 시인이 읊조린 국화 옆에서를 무척 좋아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꽃,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청순합니까? 국화꽃 꽃말은 여럿입니다. 그 중, 환희, 만남을 들 수 있습니다. 모두 모두가 국화꽃을 구경하면서 마음에 기뻐하고, 만남의 광장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국화꽃은 가을의 계절 속에서 꽃중의 꽃이요 그 향기는 너무도 그윽하기만 합니다. 결코 시들 줄 모르는 꽃이요 그 아름다움을 365일 오래도록 간직하리라는 의지의 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생의 모습입니다. 정말 이팔 청춘은 국화꽃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국화꽃은 인생의 부자된 모습이요 권세 잡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는 양귀비의 미모를 닮은 미인들과 여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흘 붉을 꽃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도 말합니다. 인생은 ‘만추의 낙엽이라 꽃과 열매는 다 떨어지고 시들음과 낡음만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절) 예수님 없이는 인생의 모든 영화도 무너질 바벨탑이요 천만금의 부자 인생도 잠깐 있다가 시들어버릴 박 넝쿨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마치 국화꽃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겉보기에 매우 아름답습니다. 깨끗합니다. 싱싱합니다. 화려합니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무수한 벌레가 있습니다. 더럽습니다. 추합니다. 그리고 몇날 가지 못합니다. 잎은 시들어 버리고 꽃망울은 남김없이 떨어질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벌레인생이요 구더기 인생입니다. 마침내 그 권세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그 영혼은 국화꽃처럼 화무십일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절규했습니다. ‘인생의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구나’(욥 7:6절) 바울도 절규했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내랴’(롬 7:24절)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로 소이다’(딤전 1:15절)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 누가 슬픔 알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괴롭고 슬픈 인생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도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마11:28절) 돈 없는 자도 올 것이요 슬픔 당한 자도 올 것이요 괴로움 당한 인생도 올 것이라 또 물으십니다. 여기 국화꽃 축제가 있으니 어서 오라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죄로 말미암아 찌들은 인생을 개혁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리고의 문제 인물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소문난 도둑놈이요 매국노였습니다. 양심도 없고 인격도 없고 매너도 없었습니다. 존경에 대해서는 무일푼 인생이요 신뢰에 대해서는 낙제인생입니다. 이름만 번드르한 세리장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운수대통한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그 인생이 깨졌습니다. 개혁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의 텃밭이 달라졌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새로워졌습니다. ‘만일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로 갚겠나이다’(눅 19:8절)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나이다''(눅 19:8절)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열번 달라져야 합니다. 날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죄 많은 한 여인을 보십시오 그의 삶이 걸레처럼 지저분했고 냄새났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고 지금 있는 남편은 가짜입니다. 날마다 물 길러 왔으나 그 물이 그의 목마름을 해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더니 현모 양처가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갔습니다. 어디로 갔습니다. 화정동이 부족한지라 풍향지구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나의 마음속의 미움을 개혁합시다. 나의 심령 속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같은 투정을 개혁합시다. 나의 불신을 개혁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들이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여 자문자답합시다. 내 인생의 삶속에 외식이 없습니까? 옹졸하고 폐쇄적인 사고 방식은 없습니까? 회칠한 무덤 같은 것,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의 마음같은 것들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모든 것들이 과감하게 깨져야 합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입산수도해서 말입니까? 교양이나 윤리강좌를 통해서 말입니까? 아닙니다. 까만 까마귀는 하이타이로 씻는 다고 하얀 비둘기 되지 않습니다. 인생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작심삼초입니다.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야 합니다.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어렸을 적에 광주 중앙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3학년 때 일인데 “마음을 보는 꽃”이라는 동화가 있는데 그것을 연극으로 꾸몄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임금님이 많은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는데 마음을 보는 꽃입니다. 잘 키워오는 자에게 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려한 꽃들을, 정말 국화꽃처럼 아름다운 꽃들을 가지고 임금님 행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꽃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도 피어나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울기까지도 합니다. 그런데 꽃은 피우지 못한 채 그대로 화분을 들고 대회가운데 끼어서 머리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행사하면서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 꽃 없는 화분 앞에서는 임금님이 얼굴이 밝아지면서 ‘저 아이를 부르라’ 그래서 부름을 당했는데 결국 상은 내가 받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임금님이 주신 꽃은 꽃을 피우는 꽃씨가 아니라 쇠로 만든 작은 씨앗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꽃이 필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을 보는 꽃입니다. 옛날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오늘 아름다운 국화 송이 송이를 구경하면서 스스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날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기쁨이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셋째, 주님을 찬양해야할 인생
오늘밤은 가족 찬양의 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과학자의 중요한 A. B. C가 있습니다. 그것은 atom, bacteria, chemistry입니다. 성도에게도 중요한 A. B. C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요, 또 하나는 찬양이고 또 하나는 말씀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과 실라를 가둔 옥중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밤을 기대해 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절) 우리에게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자본입니다. 자산입니다. 바탕입니다. 방법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천국 가는 신령한 비행기라고 생각합니다. 비행기 없이 공중에 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비행기 타지 않고서는 천국갈 인생이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천국 갑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울어도 못합니다. 힘써도 못합니다. 하나도 못합니다. ♬믿으면 가겠네♬ 바로 이것입니다. 장차 예배하는 성도들 중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믿음으로 천국갈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한 시인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5달라만 내면 되는데 10달라를 냈습니다. 왜 두사람 몫을 내느냐고 사공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답입니다. 나는 비록 혼자 탔지만 내 마음가운데 예수님과 같이 탔기 때문에 두 사람 값을 지불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미담입니까? 믿음은 강을 건널 때도 예수님과 함께 함이요 믿음은 산을 넘을 때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것입니다. 믿음은 충장로 거리에서 쇼핑을 하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슬플 때도 함께 하지만 즐거운 때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또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소용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 누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절)할 수 있습니까? 믿음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원로 목사님이신 정규오 목사님께서 제게 붓글씨로 예쁘게 ‘아마 오늘이나’이란 글씨를 써서 주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제 가정 벽에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아마 오늘이나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재림하실 때 어떻게 재림하신다고 했습니까? ‘먼저 간 많은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광신대에서 종말론을 강의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 성도 중에는 아마 나의 어머니도 함께 재림하실 때 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숙연해 지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많은 먼저 간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신다는데 그 가운데 제 어머니가 끼여서 온다는 생각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는데 우리는 진정 믿음이 있는가? 나는 영적 매너리즘에 빠져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믿음생활에 개혁해야 될 것은 없는가 나의 심령은 국화꽃처럼 아름다우며 내 가정에는 가족찬양이 있는가? 왜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나의 기쁨, 예수님은 나의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날마다 찬양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편134:1-3절)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묻고 싶지 않습니까? 나의 믿음이 무엇인가 묻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을 찬양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리듬 있는 기도입니다. 찬양은 꿈속에서도 부를 성도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13:1절) 또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시150:3절)고 했습니다. 또 ‘성소를 향하여 너의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34:2절)고 했습니다. 다함께 손을 높이 들고 찬송가 14장 1절을 다 같이 부릅시다. ♬구세주를 아는 이들 찬송하고 찬송하세 맘과 뜻과 힘 다하여 경배 드리세 아멘♬ 아멘
오늘은 전국 교회가 지키는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배 후에 국화꽃 축제일이면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밤 예배 시간에는 해마다 지키는 가족 찬양의 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 시간 여기 세 가지 내용을 바탕으로 인생의 의미를 터득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함께 따라서 합시다. ''인생이 무엇인가’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첫째: 마땅히 개혁해야 할 인생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천주교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종교 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486주년을 맞는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당시 루터의 표어가 무엇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외치면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고 했고 믿음 생활은 항상 개혁하는 생활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대게 인생들은 말합니다. 인생은 쾌락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이팔 청춘에 구가하는 젊은이들의 구호입니다. 인생은 물질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인생의 핸들을 지옥을 향해도 좋다는 황금 만능 주의자들의 구호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권세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는 권세의 맛을 알게된 정치인들의 넋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인생이 무엇입니까? 본문 욥기서가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벌레 인생, 구더기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다 인생이 이 모양 되었을까요? 본래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와를 향해서 어찌했습니까?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이는 인류 최초의 남자가 최초의 여자에게 최초로 고백했던 사랑의 서사시입니다. 그런데 나중 형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나이다’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인 그 여인이 원망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은 그렇게 못하지만 학생 시절에는 제가 책을 많이 읽곤 했습니다. 한권 읽고 제목 쓰고 한권 읽고 제목 쓰고 재미있었습니다. 272번째 읽은 책이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카프카의 ‘변증’이라고 하는 책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변신하여 벌레가 됩니다. 대화 상실 인간상실 이런 비극적인 것을 묘사해놓은 내용인데 감명이 깊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벌레 인생입니다. 구더기 인생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주일에 개혁해야 될 것 많이 있습니다. 물론 종교가 개혁되어야 하고 교회가 개혁해야 하고 그리고 사상이 개혁이 되고 지저분한 윤리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 그 자체입니다. 인생이 개혁되어야 정치가 개혁되고 교육이 개혁되고 경제가 개혁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 모두의 사고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어렵다, 안된다, 하지 말자 이러한 사고는 망국병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 ''No'' 이것을 ''Yes''로 바꾸어야 합니다. ''No''를 뒤집어서 ''on''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can not''을 변혁시켜야 하고 개혁시키기 위해서 ''not''를 사정없이 빼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I can do''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란은 그 껍질을 깨지 않고 병아리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일을 개혁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원리입니다. 이 시간 자기라는 고집의 껍질을 깹시다. ‘나’, ‘나’, ‘나’라는 욕심과 오만의 껍데기를 벗겨 봅시다. 우리 모두는 새 성전에서 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과감해야 하고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대담해야 합니다. 인생은 과감하게 인생은 대담하게 주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구정물을 비우지 않고야 어찌 새 물을 담을 수 있습니까? 물론 내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해야 하고 또 바울이 말한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방법을 개혁하고 믿음으로 사고를 개혁하고 믿음으로 인생을 새롭게 새 출발하는 우리 모두 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둘째, 국화꽃 모습으로 사는 인생
오늘 국화꽃 축제의 날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온 교회가 국화꽃으로 아름답게 단장되었고 국화꽃 향기가 온 교회에 그윽합니다. 그야말로 국화꽃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저는 서정주 시인이 읊조린 국화 옆에서를 무척 좋아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꽃,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청순합니까? 국화꽃 꽃말은 여럿입니다. 그 중, 환희, 만남을 들 수 있습니다. 모두 모두가 국화꽃을 구경하면서 마음에 기뻐하고, 만남의 광장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국화꽃은 가을의 계절 속에서 꽃중의 꽃이요 그 향기는 너무도 그윽하기만 합니다. 결코 시들 줄 모르는 꽃이요 그 아름다움을 365일 오래도록 간직하리라는 의지의 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생의 모습입니다. 정말 이팔 청춘은 국화꽃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국화꽃은 인생의 부자된 모습이요 권세 잡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는 양귀비의 미모를 닮은 미인들과 여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흘 붉을 꽃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도 말합니다. 인생은 ‘만추의 낙엽이라 꽃과 열매는 다 떨어지고 시들음과 낡음만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절) 예수님 없이는 인생의 모든 영화도 무너질 바벨탑이요 천만금의 부자 인생도 잠깐 있다가 시들어버릴 박 넝쿨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마치 국화꽃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겉보기에 매우 아름답습니다. 깨끗합니다. 싱싱합니다. 화려합니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무수한 벌레가 있습니다. 더럽습니다. 추합니다. 그리고 몇날 가지 못합니다. 잎은 시들어 버리고 꽃망울은 남김없이 떨어질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람이 아닙니다. 벌레인생이요 구더기 인생입니다. 마침내 그 권세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그 영혼은 국화꽃처럼 화무십일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절규했습니다. ‘인생의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구나’(욥 7:6절) 바울도 절규했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내랴’(롬 7:24절)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로 소이다’(딤전 1:15절)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 누가 슬픔 알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괴롭고 슬픈 인생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도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마11:28절) 돈 없는 자도 올 것이요 슬픔 당한 자도 올 것이요 괴로움 당한 인생도 올 것이라 또 물으십니다. 여기 국화꽃 축제가 있으니 어서 오라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죄로 말미암아 찌들은 인생을 개혁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리고의 문제 인물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소문난 도둑놈이요 매국노였습니다. 양심도 없고 인격도 없고 매너도 없었습니다. 존경에 대해서는 무일푼 인생이요 신뢰에 대해서는 낙제인생입니다. 이름만 번드르한 세리장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운수대통한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그 인생이 깨졌습니다. 개혁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의 텃밭이 달라졌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새로워졌습니다. ‘만일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로 갚겠나이다’(눅 19:8절)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나이다''(눅 19:8절)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열번 달라져야 합니다. 날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죄 많은 한 여인을 보십시오 그의 삶이 걸레처럼 지저분했고 냄새났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고 지금 있는 남편은 가짜입니다. 날마다 물 길러 왔으나 그 물이 그의 목마름을 해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더니 현모 양처가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갔습니다. 어디로 갔습니다. 화정동이 부족한지라 풍향지구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나의 마음속의 미움을 개혁합시다. 나의 심령 속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같은 투정을 개혁합시다. 나의 불신을 개혁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들이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여 자문자답합시다. 내 인생의 삶속에 외식이 없습니까? 옹졸하고 폐쇄적인 사고 방식은 없습니까? 회칠한 무덤 같은 것,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의 마음같은 것들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모든 것들이 과감하게 깨져야 합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입산수도해서 말입니까? 교양이나 윤리강좌를 통해서 말입니까? 아닙니다. 까만 까마귀는 하이타이로 씻는 다고 하얀 비둘기 되지 않습니다. 인생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작심삼초입니다.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야 합니다.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어렸을 적에 광주 중앙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3학년 때 일인데 “마음을 보는 꽃”이라는 동화가 있는데 그것을 연극으로 꾸몄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임금님이 많은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는데 마음을 보는 꽃입니다. 잘 키워오는 자에게 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려한 꽃들을, 정말 국화꽃처럼 아름다운 꽃들을 가지고 임금님 행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꽃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도 피어나지 않습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울기까지도 합니다. 그런데 꽃은 피우지 못한 채 그대로 화분을 들고 대회가운데 끼어서 머리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행사하면서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 꽃 없는 화분 앞에서는 임금님이 얼굴이 밝아지면서 ‘저 아이를 부르라’ 그래서 부름을 당했는데 결국 상은 내가 받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임금님이 주신 꽃은 꽃을 피우는 꽃씨가 아니라 쇠로 만든 작은 씨앗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꽃이 필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을 보는 꽃입니다. 옛날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오늘 아름다운 국화 송이 송이를 구경하면서 스스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날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기쁨이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셋째, 주님을 찬양해야할 인생
오늘밤은 가족 찬양의 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과학자의 중요한 A. B. C가 있습니다. 그것은 atom, bacteria, chemistry입니다. 성도에게도 중요한 A. B. C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요, 또 하나는 찬양이고 또 하나는 말씀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과 실라를 가둔 옥중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밤을 기대해 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절) 우리에게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자본입니다. 자산입니다. 바탕입니다. 방법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천국 가는 신령한 비행기라고 생각합니다. 비행기 없이 공중에 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비행기 타지 않고서는 천국갈 인생이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천국 갑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울어도 못합니다. 힘써도 못합니다. 하나도 못합니다. ♬믿으면 가겠네♬ 바로 이것입니다. 장차 예배하는 성도들 중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믿음으로 천국갈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한 시인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5달라만 내면 되는데 10달라를 냈습니다. 왜 두사람 몫을 내느냐고 사공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답입니다. 나는 비록 혼자 탔지만 내 마음가운데 예수님과 같이 탔기 때문에 두 사람 값을 지불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미담입니까? 믿음은 강을 건널 때도 예수님과 함께 함이요 믿음은 산을 넘을 때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것입니다. 믿음은 충장로 거리에서 쇼핑을 하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슬플 때도 함께 하지만 즐거운 때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또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소용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 누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절)할 수 있습니까? 믿음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원로 목사님이신 정규오 목사님께서 제게 붓글씨로 예쁘게 ‘아마 오늘이나’이란 글씨를 써서 주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제 가정 벽에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아마 오늘이나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재림하실 때 어떻게 재림하신다고 했습니까? ‘먼저 간 많은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광신대에서 종말론을 강의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 성도 중에는 아마 나의 어머니도 함께 재림하실 때 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숙연해 지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많은 먼저 간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신다는데 그 가운데 제 어머니가 끼여서 온다는 생각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는데 우리는 진정 믿음이 있는가? 나는 영적 매너리즘에 빠져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믿음생활에 개혁해야 될 것은 없는가 나의 심령은 국화꽃처럼 아름다우며 내 가정에는 가족찬양이 있는가? 왜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나의 기쁨, 예수님은 나의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날마다 찬양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편134:1-3절)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묻고 싶지 않습니까? 나의 믿음이 무엇인가 묻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을 찬양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리듬 있는 기도입니다. 찬양은 꿈속에서도 부를 성도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13:1절) 또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시150:3절)고 했습니다. 또 ‘성소를 향하여 너의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34:2절)고 했습니다. 다함께 손을 높이 들고 찬송가 14장 1절을 다 같이 부릅시다. ♬구세주를 아는 이들 찬송하고 찬송하세 맘과 뜻과 힘 다하여 경배 드리세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