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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세 가지 유혹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사탄에게서 받으신 ‘시험’ 또는 ‘유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해 마가는 간단히 사실만 전하지만 마태와 누가는 유혹의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께서 사탄에게 받으신 ‘시험’ 또는 ‘유혹’이라고 부릅니다. ‘시험’과 ‘유혹’은 같은 것일까요?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굳이 구별하자면 ‘시험’은 한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가 여부를 알아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면 ‘유혹’은 그가 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것을 사용하는가 여부를 알아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을 갖고 그를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시험과 유혹을 이런 식으로 구별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시험을 받았다기보다는 유혹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하신 후였으므로 심신이 매우 곤고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유혹자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돌로 빵을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예수님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고 굶주린 상태였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유혹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유혹이기보다는 일반적인 물질주의의 유혹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그래서 아무리 빵이 중요하다고 해도, 당장 먹을 빵 한 개가 없어서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해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당장 빵을 주어야 합니다. 당장 굶주려 죽을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빵은 주지 않고 일장 연설을 하는 일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빵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굶어죽기를 면한다면 빵 이상의 것을 추구해야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무조건 빵을 먼저 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진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라고 말씀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유혹자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습니다.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이 널 떨어져 죽게 내버려 두시겠느냐? 천사라도 보내 구해주겠지.” 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특별대우 받아야 한다는 착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착각과 기대는 누구나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니 어떻게 해주시겠지 하는 기대, 곤경에 그냥 버려두시지는 않겠지 하는 희망을 갖기가 쉽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로 기막히게 적절했습니다.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사실 이런 태도는 하느님을 떠보고 시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럴 때 거론되는 하느님의 사랑은 단지 구실일 따름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느님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그냥 두는가 아니면 구해주는가 보자.’ 라는 심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은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엿장수가 가위를 몇 번 치는가가 엿장수 맘대로인 것처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도 ‘하느님 맘대로’ 인 것 같아 섭섭하기 그지없지만 이런 신앙이 자리 잡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것 가지고 하느님을 시험해보려는 욕심이 인간에게는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평준화’는 싫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해봐야 되겠다는 욕심입니다.
대결과 유혹에 맞서 싸운 삶
마지막 유혹은, 유혹자가 예수님을 높은 산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세상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고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통째로 주겠답니다! 세상의 작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다 주겠답니다! 다만 자기에게 절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사탄, 제까짓 것이 뭔데 세상을 주겠다 말겠다 해! 건방진 녀석.’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이원론’이라는 것인데, 당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는 세상이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이 세상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천년왕국을 이루시겠지만 그 전까지 얼마 동안은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은 적어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는 대단히 큰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까짓 절쯤 못하겠습니까! 세상 전부는커녕 그 일부만 준다 해도 절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다 바치겠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까짓 절쯤이야!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지 않았느냐?” 라는 말씀으로 마지막 유혹도 뿌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를 옳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까짓 것이 무엇인데 세상을 준다고 해? 세상은 오직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데.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련다.” 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만일 내가 네게 절을 하면 세상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네게 절하지 않겠다. 비록 세상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하느님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겠다.” 는 뜻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때야 사탄이 물러갔습니다. 마태는 사탄이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고 했지만 누가는 “사탄이 다음 기회를 노리고 물러갔다.” 적고 했습니다. 마태는 유혹은 끝났다고 봤고 누가는 유혹이 일단은 종료됐지만 곧 다시 찾아오리라고 보았습니다. 마태보다는 누가가 더 옳았던 것 같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예수님 생애 내내 그분 곁에 바싹 붙어 다니면서 호시탐탐 유혹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사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유혹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대결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제국의 지배자들과 힘으로 맞서서 대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궁극적인 대결 상대는 사탄이었고 사탄의 유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 가운데 사탄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했던 마지막 유혹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유혹을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라는 대답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 대답은 십계명 중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섞어놓은 것 같은 말씀입니다. 이 대답에는 하느님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어느 신의 형상에게도 경배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명하셨을까?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그것이 주어진 시대상을 감안하면 정말 수수께끼 같은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해서 고대 중동지방 그 어느 종교에도 이런 종류의 계명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믿는 신의 형상을 멋지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신의 형상이 얼마나 크고 멋지고 화려한가가 신에 대한 존경과 믿음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은 그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남들은 다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들려고 안달을 했는데 왜 유독 야훼 하느님만은 그것을 금지하셨을까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그 어디에도 우상을 만들지도, 거기 절하지도 말아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만들지 말라는 명령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유도 모른 채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도 않고 거기 절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유를 알면 계명을 지키기가 더 수월해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도 거기 절하지도 말라는 계명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니 계명을 지키기도 어렵고 궁금증도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계명이 주어지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몇몇 예언자들과 지혜문학이 왜 우상에게 절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5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시편 중에는 지혜문학적인 요소가 강한 시편이 있는데 이 시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상은 금이나 은 덩어리, 사람들이 손재간을 부린 것,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에는 숨기마저 없는 것들
이런 것을 만들고 의지하는 자들은 그 우상의 꼴이 되리라.
이와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 40장, 44장, 46장과 하박국 2장 등 여러 곳에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쓸모가 없는 물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사람들이 손재간을 부려 만든 것이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그 절반은 땔감으로 쓰고 나머지 절반은 우상을 만드는 데 쓰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우상에 무슨 힘이 있다고 어리석게 거기 절을 하느냐고 백성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하박국도 “화를 입으리라! 나뭇조각을 보고 ‘일어나십시오’ 하며 말 못하는 돌멩이를 보고 ‘그만 주무십시오’ 하는 자들아, 그런 것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말이냐? 금과 은으로 싸고 꾸몄지만 가슴에는 숨기도 없는 것, 그런 우상을 새겨 무슨 덕이라도 볼 성싶으냐? 말 못하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무슨 이익이라도 볼 성싶으냐?” 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나 하박국이나 지혜문학은 모두 인간의 건전한 이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상의 제작과 숭배를 금지하면서 그 이유를 밝혀주시지 않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밝혀주지 않은 바로 그 이유를 나름대로 찾아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은 사람이 손으로 빚어서 만들어낸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길 마음을 없애지 않으면
자,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됐습니까? 이제 우상숭배 문제는 모두 해결됐습니까? 나무를 깎아 만들었거나 쇠붙이를 녹여 만든 우상을 모두 태워버리거나 없애버리면 사람은 우상을 섬기지 않게 될까요? 손으로 만든 우상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하느님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원인, 그 궁극적인 원동력을 없애 버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우상들만 불태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언자와 지혜문학이 말하는 대로 우상은 물건에 불과합니다. 거기 무슨 힘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상을 빚어내는 것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곧 욕심입니다. 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욕심을 없애지 않는다면 손으로 만든 우상을 불태운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빌어 무엇을 소유하겠다는 욕망을 없애지 못한다면 비록 형태를 갖고 있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우상숭배자입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날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어떤 형상에게 절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우상숭배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대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대결과 긴장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한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받아주실까 여부를 궁금해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영혼 깊은 곳에 하느님에 대한 묵직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뢰는 묵직하므로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신뢰 깊은 기도에 비하면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내 맘에 맞게 응답해주셔야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믿음은 얼마나 얕고 천합니까! 하느님이 날 사랑한다면 내 기도를 들어줘야 한다고 믿기 전에 내가 드리는 기도가 정말 드릴만한 기도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사탄은 군중들의 입을 빌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만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내려와 보라.” 예수님은 침묵으로써 이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탄에게 절하면 세상의 절반이라도 얻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을 얻는다고 성취되지 않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사탄에게 절하고 권세를 잡았다고 성취되지 않고 사람의 ‘영혼’을 감화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세 가지 유혹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사탄에게서 받으신 ‘시험’ 또는 ‘유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해 마가는 간단히 사실만 전하지만 마태와 누가는 유혹의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께서 사탄에게 받으신 ‘시험’ 또는 ‘유혹’이라고 부릅니다. ‘시험’과 ‘유혹’은 같은 것일까요?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굳이 구별하자면 ‘시험’은 한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가 여부를 알아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면 ‘유혹’은 그가 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것을 사용하는가 여부를 알아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을 갖고 그를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시험과 유혹을 이런 식으로 구별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시험을 받았다기보다는 유혹을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하신 후였으므로 심신이 매우 곤고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유혹자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돌로 빵을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예수님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고 굶주린 상태였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유혹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유혹이기보다는 일반적인 물질주의의 유혹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그래서 아무리 빵이 중요하다고 해도, 당장 먹을 빵 한 개가 없어서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해도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당장 빵을 주어야 합니다. 당장 굶주려 죽을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빵은 주지 않고 일장 연설을 하는 일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빵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굶어죽기를 면한다면 빵 이상의 것을 추구해야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무조건 빵을 먼저 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진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라고 말씀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유혹자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습니다.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이 널 떨어져 죽게 내버려 두시겠느냐? 천사라도 보내 구해주겠지.” 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특별대우 받아야 한다는 착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착각과 기대는 누구나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니 어떻게 해주시겠지 하는 기대, 곤경에 그냥 버려두시지는 않겠지 하는 희망을 갖기가 쉽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로 기막히게 적절했습니다.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사실 이런 태도는 하느님을 떠보고 시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럴 때 거론되는 하느님의 사랑은 단지 구실일 따름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느님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그냥 두는가 아니면 구해주는가 보자.’ 라는 심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은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엿장수가 가위를 몇 번 치는가가 엿장수 맘대로인 것처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도 ‘하느님 맘대로’ 인 것 같아 섭섭하기 그지없지만 이런 신앙이 자리 잡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것 가지고 하느님을 시험해보려는 욕심이 인간에게는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평준화’는 싫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해봐야 되겠다는 욕심입니다.
대결과 유혹에 맞서 싸운 삶
마지막 유혹은, 유혹자가 예수님을 높은 산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세상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고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통째로 주겠답니다! 세상의 작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다 주겠답니다! 다만 자기에게 절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사탄, 제까짓 것이 뭔데 세상을 주겠다 말겠다 해! 건방진 녀석.’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이원론’이라는 것인데, 당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는 세상이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이 세상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천년왕국을 이루시겠지만 그 전까지 얼마 동안은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은 적어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는 대단히 큰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까짓 절쯤 못하겠습니까! 세상 전부는커녕 그 일부만 준다 해도 절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다 바치겠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까짓 절쯤이야!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지 않았느냐?” 라는 말씀으로 마지막 유혹도 뿌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를 옳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까짓 것이 무엇인데 세상을 준다고 해? 세상은 오직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데.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련다.” 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만일 내가 네게 절을 하면 세상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네게 절하지 않겠다. 비록 세상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하느님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겠다.” 는 뜻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때야 사탄이 물러갔습니다. 마태는 사탄이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고 했지만 누가는 “사탄이 다음 기회를 노리고 물러갔다.” 적고 했습니다. 마태는 유혹은 끝났다고 봤고 누가는 유혹이 일단은 종료됐지만 곧 다시 찾아오리라고 보았습니다. 마태보다는 누가가 더 옳았던 것 같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예수님 생애 내내 그분 곁에 바싹 붙어 다니면서 호시탐탐 유혹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사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유혹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대결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제국의 지배자들과 힘으로 맞서서 대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궁극적인 대결 상대는 사탄이었고 사탄의 유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 가운데 사탄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했던 마지막 유혹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유혹을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라는 대답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 대답은 십계명 중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섞어놓은 것 같은 말씀입니다. 이 대답에는 하느님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어느 신의 형상에게도 경배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명하셨을까?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그것이 주어진 시대상을 감안하면 정말 수수께끼 같은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해서 고대 중동지방 그 어느 종교에도 이런 종류의 계명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믿는 신의 형상을 멋지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신의 형상이 얼마나 크고 멋지고 화려한가가 신에 대한 존경과 믿음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은 그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남들은 다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들려고 안달을 했는데 왜 유독 야훼 하느님만은 그것을 금지하셨을까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그 어디에도 우상을 만들지도, 거기 절하지도 말아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만들지 말라는 명령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유도 모른 채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도 않고 거기 절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유를 알면 계명을 지키기가 더 수월해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도 거기 절하지도 말라는 계명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니 계명을 지키기도 어렵고 궁금증도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계명이 주어지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몇몇 예언자들과 지혜문학이 왜 우상에게 절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5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시편 중에는 지혜문학적인 요소가 강한 시편이 있는데 이 시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상은 금이나 은 덩어리, 사람들이 손재간을 부린 것,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에는 숨기마저 없는 것들
이런 것을 만들고 의지하는 자들은 그 우상의 꼴이 되리라.
이와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 40장, 44장, 46장과 하박국 2장 등 여러 곳에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쓸모가 없는 물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사람들이 손재간을 부려 만든 것이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그 절반은 땔감으로 쓰고 나머지 절반은 우상을 만드는 데 쓰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우상에 무슨 힘이 있다고 어리석게 거기 절을 하느냐고 백성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하박국도 “화를 입으리라! 나뭇조각을 보고 ‘일어나십시오’ 하며 말 못하는 돌멩이를 보고 ‘그만 주무십시오’ 하는 자들아, 그런 것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말이냐? 금과 은으로 싸고 꾸몄지만 가슴에는 숨기도 없는 것, 그런 우상을 새겨 무슨 덕이라도 볼 성싶으냐? 말 못하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무슨 이익이라도 볼 성싶으냐?” 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나 하박국이나 지혜문학은 모두 인간의 건전한 이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상의 제작과 숭배를 금지하면서 그 이유를 밝혀주시지 않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밝혀주지 않은 바로 그 이유를 나름대로 찾아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은 사람이 손으로 빚어서 만들어낸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길 마음을 없애지 않으면
자,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됐습니까? 이제 우상숭배 문제는 모두 해결됐습니까? 나무를 깎아 만들었거나 쇠붙이를 녹여 만든 우상을 모두 태워버리거나 없애버리면 사람은 우상을 섬기지 않게 될까요? 손으로 만든 우상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하느님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원인, 그 궁극적인 원동력을 없애 버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우상들만 불태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언자와 지혜문학이 말하는 대로 우상은 물건에 불과합니다. 거기 무슨 힘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상을 빚어내는 것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곧 욕심입니다. 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욕심을 없애지 않는다면 손으로 만든 우상을 불태운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빌어 무엇을 소유하겠다는 욕망을 없애지 못한다면 비록 형태를 갖고 있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우상숭배자입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날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어떤 형상에게 절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우상숭배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대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대결과 긴장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한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받아주실까 여부를 궁금해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영혼 깊은 곳에 하느님에 대한 묵직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뢰는 묵직하므로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신뢰 깊은 기도에 비하면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내 맘에 맞게 응답해주셔야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믿음은 얼마나 얕고 천합니까! 하느님이 날 사랑한다면 내 기도를 들어줘야 한다고 믿기 전에 내가 드리는 기도가 정말 드릴만한 기도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사탄은 군중들의 입을 빌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만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내려와 보라.” 예수님은 침묵으로써 이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탄에게 절하면 세상의 절반이라도 얻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을 얻는다고 성취되지 않습니다. 인류의 구원은 사탄에게 절하고 권세를 잡았다고 성취되지 않고 사람의 ‘영혼’을 감화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