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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강조하는 전도서
지난 주일에 전도서가 가르치는 지혜 가운데 하나가 ‘때를 분별하는 지혜’라고 말씀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 때가 있고 말씀하기를 중단하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병든 사람을 고치며 표징을 보여야 할 때가 있고 그러지 않아야 할 때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말하지 말고 침묵해야 하는 시간과 기적을 일으키지도, 표징을 보이지도 말아야 하는 시간은 ‘수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수난의 시간이 점점 다가옴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오기 전에, 곧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 낮의 해가 있을 때 열심히 일하자고 제자들을 독려하셨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 제자들을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터인데 그때가 되면 금식하며 슬피 애곡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시간은 수난의 때였습니다.
전도서가 ‘시간’과 관련해서 가르치는 또 하나의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과거와 현재, 미래 중 ‘현재라는 시간의 재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은 기억의 집합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좋고 아름다운 기억이든 나쁘고 추한 기억이든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기억이란 집합소에 간직되고 보관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지나치게 강해서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현재를 회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거로 숨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미래’라는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한편으로 기대와 희망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지나간 시간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도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현재’라는 시간을 강조합니다. 과거나 미래보다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전도서가 ‘carpe diem!’ 곧 ‘오늘을 즐겨라!’고 가르치는 책으로 생각해왔습니다. ‘carpe diem’이란 말은 라틴어로 ‘오늘을 붙잡아라!’ (seize the day), ‘오늘을 즐겨라’ (enjoy the present)란 뜻을 갖습니다. 물론 전도서가 무제한의 쾌락을 가르치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분명히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영화(榮華)가 현재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전도서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인간의 지혜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에 하느님께서 주신 네 몫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시인은 예수님을 ‘괴로웠던 사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괴로움이 얼마나 컸습니까. 오늘 읽은 마태복음 27장 32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당했던 육체적인 괴로움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미 기력이 쇠해질 대로 쇠해진 예수님에게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께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쓸개를 탄 포도주는 진통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거절하셨다는 말은 당신께서 당해야 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피하거나 경감하려 하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멜 깁스의 영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당하셨던 육체적인 고통은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만 읽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극한의 고문을 당하셨으니 예수께서 느끼셨을 육체적인 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조롱을 받으셨고 모욕을 당하셨으니 그에 따른 정신적인 괴로움 또한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말고.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보시라지.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이런 예수님을 가리켜서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조롱을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예수님더러 ‘행복한 예수’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갈가리 찢겨져 너덜너덜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예수더러 ‘행복한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과거’에 권능을 갖고 기적을 행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쳤던 예수님도 아니고, ‘미래’에 수천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왕이 되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도 아니고, ‘지금’ 초라하게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더러 ‘행복한 예수’랍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때로 “예수님을 닮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보고 그렇게 기도했는지 깊이 따져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권능을 떨치시는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왕처럼 군림하는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사람마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습니다. 전도서가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태어나는 일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는 전도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에는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전도서는 단지 사람은 하느님께서 분깃으로 주신 행복을 누리라고만 가르칩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느님은 무엇을 이루려고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나를 통해 하시고 싶은 일이 무엇이기에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전도서는 이런 물음을 묻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모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제한된 지식과 지혜로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겠습니까. 다 알 수도 없고 또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왜 내가 세상에 보내졌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내진 목적을 이루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그 일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저는 무신론과 유신론이 근본적으로 여기서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이나 유신론은 머릿속에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는 ‘이론’이나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하느님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내용은 ‘나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졌다.’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못하고 사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들만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들만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냄 받은 사람이요 다 소명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보내진 목적을 과거에 이미 이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루겠다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내진 목적을 이뤄야 할 시간은 ‘현재’입니다.
‘왕년에’ 무슨 일을 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어떤 하느님의 일을 성취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직은 먹고 사느라고 아무런 여유도 없어 하느님이 나를 보내신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도 말하지도 마십시오. 언제가 됐든 먹고 살만큼 여건이 갖춰지면 그때 가서 하느님께서 날 부르신 뜻을 이루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말들은 결국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 일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그렇게 강조했던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노래했던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진 목적을 이루고 계셨으므로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으므로 더 이상 십자가에 달려 계시지 않다는 뜻입니다. 반면 가톨릭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려 있습니다. 전에는 이것이 제게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까지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아놓을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늘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해도 십자가는 늘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버트 해리의 ‘지금 하십시오’ 라는 제목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런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렐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강조하는 전도서
지난 주일에 전도서가 가르치는 지혜 가운데 하나가 ‘때를 분별하는 지혜’라고 말씀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 때가 있고 말씀하기를 중단하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병든 사람을 고치며 표징을 보여야 할 때가 있고 그러지 않아야 할 때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말하지 말고 침묵해야 하는 시간과 기적을 일으키지도, 표징을 보이지도 말아야 하는 시간은 ‘수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수난의 시간이 점점 다가옴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오기 전에, 곧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 낮의 해가 있을 때 열심히 일하자고 제자들을 독려하셨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 제자들을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터인데 그때가 되면 금식하며 슬피 애곡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시간은 수난의 때였습니다.
전도서가 ‘시간’과 관련해서 가르치는 또 하나의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과거와 현재, 미래 중 ‘현재라는 시간의 재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은 기억의 집합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좋고 아름다운 기억이든 나쁘고 추한 기억이든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기억이란 집합소에 간직되고 보관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지나치게 강해서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현재를 회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거로 숨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미래’라는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한편으로 기대와 희망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지나간 시간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도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현재’라는 시간을 강조합니다. 과거나 미래보다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전도서가 ‘carpe diem!’ 곧 ‘오늘을 즐겨라!’고 가르치는 책으로 생각해왔습니다. ‘carpe diem’이란 말은 라틴어로 ‘오늘을 붙잡아라!’ (seize the day), ‘오늘을 즐겨라’ (enjoy the present)란 뜻을 갖습니다. 물론 전도서가 무제한의 쾌락을 가르치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분명히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영화(榮華)가 현재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전도서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인간의 지혜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에 하느님께서 주신 네 몫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시인은 예수님을 ‘괴로웠던 사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괴로움이 얼마나 컸습니까. 오늘 읽은 마태복음 27장 32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당했던 육체적인 괴로움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미 기력이 쇠해질 대로 쇠해진 예수님에게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께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쓸개를 탄 포도주는 진통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거절하셨다는 말은 당신께서 당해야 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피하거나 경감하려 하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멜 깁스의 영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당하셨던 육체적인 고통은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만 읽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극한의 고문을 당하셨으니 예수께서 느끼셨을 육체적인 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조롱을 받으셨고 모욕을 당하셨으니 그에 따른 정신적인 괴로움 또한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말고.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보시라지.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이런 예수님을 가리켜서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조롱을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예수님더러 ‘행복한 예수’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갈가리 찢겨져 너덜너덜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예수더러 ‘행복한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과거’에 권능을 갖고 기적을 행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쳤던 예수님도 아니고, ‘미래’에 수천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왕이 되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도 아니고, ‘지금’ 초라하게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더러 ‘행복한 예수’랍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때로 “예수님을 닮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보고 그렇게 기도했는지 깊이 따져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권능을 떨치시는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왕처럼 군림하는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사람마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습니다. 전도서가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태어나는 일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는 전도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에는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전도서는 단지 사람은 하느님께서 분깃으로 주신 행복을 누리라고만 가르칩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느님은 무엇을 이루려고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나를 통해 하시고 싶은 일이 무엇이기에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전도서는 이런 물음을 묻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모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제한된 지식과 지혜로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겠습니까. 다 알 수도 없고 또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왜 내가 세상에 보내졌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내진 목적을 이루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그 일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저는 무신론과 유신론이 근본적으로 여기서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이나 유신론은 머릿속에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는 ‘이론’이나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하느님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내용은 ‘나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졌다.’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못하고 사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들만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들만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냄 받은 사람이요 다 소명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보내진 목적을 과거에 이미 이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루겠다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내진 목적을 이뤄야 할 시간은 ‘현재’입니다.
‘왕년에’ 무슨 일을 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어떤 하느님의 일을 성취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직은 먹고 사느라고 아무런 여유도 없어 하느님이 나를 보내신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도 말하지도 마십시오. 언제가 됐든 먹고 살만큼 여건이 갖춰지면 그때 가서 하느님께서 날 부르신 뜻을 이루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말들은 결국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 일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그렇게 강조했던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노래했던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진 목적을 이루고 계셨으므로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으므로 더 이상 십자가에 달려 계시지 않다는 뜻입니다. 반면 가톨릭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려 있습니다. 전에는 이것이 제게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까지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아놓을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늘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해도 십자가는 늘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버트 해리의 ‘지금 하십시오’ 라는 제목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런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렐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