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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우목사 (잠실중앙교회)
오늘은 1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마지막 언덕에 서서 멀리 다가오는 새 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나온 한 해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되돌아보면 금년 한 해도 괴로운 일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가장 좋은 비결은 한 해의 마지막을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의 준비 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듯 꿈과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오듯 인생도 마지막이 옵니다. 한 해는 후회할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후회가 용납되지 않고, 한 해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만 죽음이 올 때는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 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 해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돌아볼 때 걸핏하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불평, 원망으로 끝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다른 사람 불평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직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가,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짧은 말씀이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삶을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그 사랑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이요,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아마 이 세 가지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비단 이스라엘의 역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여기서 예외가 아니요, 우리의 한 해의 삶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2002년 한 해를 솔직하게 돌아볼 때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이 말씀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봅시다. 본문 1절에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이방 나라에서 우상 섬기며 죄악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민족은커녕 자식 하나도 두지 못했을 때, 말 그대로 어린아이와 같았을 때부터 사랑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했습니다. 구속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놀라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3절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3절은 사실상 1절 2절의 반복이요 보충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사랑과 2절에 이스라엘의 배신이 나타났는데 3절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다고, 이스라엘의 배신이 나타납니다. 3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걸음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교육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과 방편으로 훈련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팔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보호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열방의 틈바구니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니 원수들이 손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고쳤다고 했습니다. 치료하셨음을 뜻합니다. 질병에서 치료하시고 죄악에서 치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였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의 종노릇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게된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광야 같은 세상에서 비틀거리며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걸음을 가르쳐주며 인도했습니다. 많은 위험 가운데 보호하셨으며 우리가 죄 짓고 악을 행할 때는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아 돌보며 기르듯 하나님 우리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 스스로는 생명을 지탱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지나온 생애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요 하나님의 돌보아주신 표적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지만 이것만으로 한 해를 정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사랑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제 다시 이스라엘의 배신을 살펴보십시다. 2절을 보십시다.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저토록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배반했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생각되는데 이것은 사실이요, 또한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선지자가 부를수록 점점 멀리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까이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 저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부르면 부를수록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는 젊은이가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에는 다녔지만 그동안 술을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위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지난날을 회개했습니다. 술을 끊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했고, 수술을 받기 전에는 온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수술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 의사는 회복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6개 월 간은 의사의 지시대로 식사를 해야 한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수술 경과가 좋아 한 달만에 퇴원을 했습니다. 회복이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정말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제법 소화도 되었습니다. 두 달이 되던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술자리에 따라갔습니다. 친구들이 말렸으나 한 잔만 하겠다고 고집하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조금 마셨습니다. 별탈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폭음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만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어려울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조금만 나아지면 그만 멀어집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회개했는데 조금 나아지면 다시 범죄합니다. 나아지면 나아질 수록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시다가 한국에서 교수로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 대학교수가 되는 것 굉장히 어렵습니다. 힘들게 학교에 자리를 얻고 나니 학과장과 다른 교수들이 한턱내라고 했습니다. 큰마음 먹고 한턱내겠으니 당신들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다 하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룸살롱이더랍니다. 대학교 교수들이 가는 곳이라 해서 따라가 보았더니 룸살롱이더랍니다. 이 교수님이 처음에는 분위기를 맞추려고 그냥 앉아 있었는데, 거기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경비를 지불하고는 먼저 나왔다고 합니다.
지금 보통 사람들이, 그저 죄짓는 사람들이 향락에 빠져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도층부터 시작해서 온 나라가 쾌락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날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살게 되고 나니 찾아가는 것이 전부 육체의 쾌락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 다음 우상을 섬겼습니다. 본문 2절은 그 우상은 바알이었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알이란 말은 주인 혹은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참 주인이신 하나님 대신에 나무와 구리로 아로새긴 우상을 나의 주인이라고 섬겼습니다. 하나님 그토록 저들을 사랑해주셨는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더러 내 남편이라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나야 금년 한 해 적어도 우상은 섬기지 않았다고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다. 과연 내가 한 해를 살아오면서 가장 추구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습니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선생일 때 그를 위해 내 인생을 다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적당하게 존경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해 이러하지는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중에 내어놓고 우상 섬기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 보다 돈이 먼저요 하나님 보다 내 욕심이 먼저입니다. 누가복음 12 장에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곳간에 이미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농사가 풍년이 되자 더 쌓을 곳이 없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었습니다. 마음 든든했습니다. 스스로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곡간에 곡식과 물건만 많이 쌓아두면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현대인들이 잠재된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만 많이 저축해두면, 아파트만 시세만 올라가면 마음놓고 안심하고 즐겁게 살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재물이 주인이요 재물이 우상입니다. 재물이 곧 바알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행한 대로 하나님 갚으셨으면 모든 것은 다 끝났습니다. 남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저들을 용서하셨고, 다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시 사랑과 은혜로 대해주셨습니다. 금년 한해 우리가 그러했습니다. 한 해도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 갚으셨다면 벌써 끝났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했고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덮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사랑해주셨고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여기 사람의 줄이란 올무, 올가미를 뜻합니다. 딴 길로 못 가도록 올가미를 씌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올가미는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줄로 매었습니다. 목에서 멍에를 벗겼습니다.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은 다시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금년 한 해도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받을 자격 없는 자가 받았다 하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우상을 섬겼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다시 사랑하시고 다시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는 2002년 한 해를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먼저 사랑의 줄로 이끌었습니다. 풀어놓으니 멀리 가고 풀어놓으니 도망가버립니다. 이제 사랑의 줄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 가시를 두고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무 큰 은혜를 받아 그냥 두면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로 사랑의 줄을 만들어 묶었습니다. 묶어서 겸손하게 만들었고 은혜의 세계에 머물도록 만들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올무였습니다.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조금 나아졌다하면 교만하고, 조금 튀었다하면 으시대고, 조금 높아졌다하면 오만불순해집니다. 그래서 그러하지 못하도록 묶었습니다. 건강하니 도망갑니다. 하나님 질병을 주셨습니다. 돈 있으니 도망갑니다.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줄에 묶인 것처럼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가까워지게 한 것이라면 그것이 질병이든 고통이든 사랑의 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줄이요 축복의 줄입니다.
그리고 목에서 멍에를 벗겨주셨다고 했습니다. 금년 한 해도 우리에게는 많은 멍에들이 있었습니다. 실패의 멍에 고통의 멍에, 슬픔의 멍에를 덮어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할 줄 몰라했고 때로는 절망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멍에를 벗겨주셨습니다. 못난 아들이 사고를 저지르고 나면 따라다니며 뒤처리를 하시는 아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일을 저지르고 나면 아버지는 찾아가서 사정하고 애걸하면서 뒤처리를 합니다. 체면도 위신도 말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아들의 멍에를 벗겨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금년 한해도 그렇게 우리의 멍에를 벗겨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절망적인 자리에서 건져주셨고, 그 고통스러운 짐들을 벗겨주셨습니다. 금년 한해도 하나님 우리의 멍에들을 벗겨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앞에 먹을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먹을 것을 주셨다는 말은 단순히 먹는 것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옛날에 먹는 것은 의식주 모든 것의 대표입니다. 먹을 것을 주셨다는 말은 영육간의 모든 삶을 책임지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책임져주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영적으로 다시 말해 말씀으로 먹여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북한의 성도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즈음은 탈북자들을 통해 또 다른 통로들을 통해 북한 지하 교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하 교회 성도들 단파라디오로 극동방송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이불 밑에서 혹은 비밀리에 숨어서 듣습니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릴 때 찬송은 입만 벙긋거린답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모양만 만들어 그 입을 서로 쳐다보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말로 방송으로 들은 그 말씀을 메모를 해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눕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말씀을 나눈다고 합니다. 나눈 후 메모지는 즉시로 불태워버립니다. 발각되면 목숨을 잃습니다. 실제 수많은 성도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저들은 생명을 걸어놓고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많이 들으면서 고마움이 없습니다. 말씀이 귀한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을 자유롭게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금년 한 해도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 우리를 먹여주셨습니다. 참으로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지방 신문사에서 "내일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는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유언을 미리 한 번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뭐 별의 별,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온갖 종류의 말들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모두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은 금년으로 내 생애가 마지막이라면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어떻게 생을 정리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저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은 나의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았습니다. 나의 모든 허물보다 더 큰 은혜로 하나님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002년 한 해를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고 여기 소리 높여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은혜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이 은혜를 고백하며 이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갈 때 거기 자유와 행복이 있고, 거기 영원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 은총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해의 마지막 주일에 겸손히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저버렸던 저희들의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허물을 덮으시며 다시 사랑을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 은혜로 여기가지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이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보다 복된 새해를 맞이하는 저희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1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마지막 언덕에 서서 멀리 다가오는 새 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나온 한 해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되돌아보면 금년 한 해도 괴로운 일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가장 좋은 비결은 한 해의 마지막을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의 준비 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듯 꿈과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오듯 인생도 마지막이 옵니다. 한 해는 후회할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후회가 용납되지 않고, 한 해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만 죽음이 올 때는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 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 해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돌아볼 때 걸핏하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불평, 원망으로 끝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다른 사람 불평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직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가,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짧은 말씀이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삶을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그 사랑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이요,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아마 이 세 가지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비단 이스라엘의 역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여기서 예외가 아니요, 우리의 한 해의 삶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2002년 한 해를 솔직하게 돌아볼 때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이 말씀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봅시다. 본문 1절에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이방 나라에서 우상 섬기며 죄악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민족은커녕 자식 하나도 두지 못했을 때, 말 그대로 어린아이와 같았을 때부터 사랑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했습니다. 구속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놀라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3절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3절은 사실상 1절 2절의 반복이요 보충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사랑과 2절에 이스라엘의 배신이 나타났는데 3절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다고, 이스라엘의 배신이 나타납니다. 3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걸음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교육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과 방편으로 훈련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팔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보호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열방의 틈바구니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니 원수들이 손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고쳤다고 했습니다. 치료하셨음을 뜻합니다. 질병에서 치료하시고 죄악에서 치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였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의 종노릇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게된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광야 같은 세상에서 비틀거리며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걸음을 가르쳐주며 인도했습니다. 많은 위험 가운데 보호하셨으며 우리가 죄 짓고 악을 행할 때는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아 돌보며 기르듯 하나님 우리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 스스로는 생명을 지탱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지나온 생애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요 하나님의 돌보아주신 표적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지만 이것만으로 한 해를 정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사랑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제 다시 이스라엘의 배신을 살펴보십시다. 2절을 보십시다.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저토록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배반했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생각되는데 이것은 사실이요, 또한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선지자가 부를수록 점점 멀리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까이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 저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부르면 부를수록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는 젊은이가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에는 다녔지만 그동안 술을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위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지난날을 회개했습니다. 술을 끊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했고, 수술을 받기 전에는 온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수술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 의사는 회복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6개 월 간은 의사의 지시대로 식사를 해야 한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수술 경과가 좋아 한 달만에 퇴원을 했습니다. 회복이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정말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제법 소화도 되었습니다. 두 달이 되던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술자리에 따라갔습니다. 친구들이 말렸으나 한 잔만 하겠다고 고집하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조금 마셨습니다. 별탈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폭음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만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어려울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조금만 나아지면 그만 멀어집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회개했는데 조금 나아지면 다시 범죄합니다. 나아지면 나아질 수록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시다가 한국에서 교수로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 대학교수가 되는 것 굉장히 어렵습니다. 힘들게 학교에 자리를 얻고 나니 학과장과 다른 교수들이 한턱내라고 했습니다. 큰마음 먹고 한턱내겠으니 당신들 원하는 곳으로 가십시다 하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룸살롱이더랍니다. 대학교 교수들이 가는 곳이라 해서 따라가 보았더니 룸살롱이더랍니다. 이 교수님이 처음에는 분위기를 맞추려고 그냥 앉아 있었는데, 거기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경비를 지불하고는 먼저 나왔다고 합니다.
지금 보통 사람들이, 그저 죄짓는 사람들이 향락에 빠져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도층부터 시작해서 온 나라가 쾌락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날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살게 되고 나니 찾아가는 것이 전부 육체의 쾌락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 다음 우상을 섬겼습니다. 본문 2절은 그 우상은 바알이었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알이란 말은 주인 혹은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참 주인이신 하나님 대신에 나무와 구리로 아로새긴 우상을 나의 주인이라고 섬겼습니다. 하나님 그토록 저들을 사랑해주셨는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더러 내 남편이라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나야 금년 한 해 적어도 우상은 섬기지 않았다고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다. 과연 내가 한 해를 살아오면서 가장 추구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습니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선생일 때 그를 위해 내 인생을 다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적당하게 존경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해 이러하지는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중에 내어놓고 우상 섬기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 보다 돈이 먼저요 하나님 보다 내 욕심이 먼저입니다. 누가복음 12 장에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곳간에 이미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농사가 풍년이 되자 더 쌓을 곳이 없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었습니다. 마음 든든했습니다. 스스로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곡간에 곡식과 물건만 많이 쌓아두면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가 바로 현대인들이 잠재된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만 많이 저축해두면, 아파트만 시세만 올라가면 마음놓고 안심하고 즐겁게 살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재물이 주인이요 재물이 우상입니다. 재물이 곧 바알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행한 대로 하나님 갚으셨으면 모든 것은 다 끝났습니다. 남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저들을 용서하셨고, 다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시 사랑과 은혜로 대해주셨습니다. 금년 한해 우리가 그러했습니다. 한 해도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 갚으셨다면 벌써 끝났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했고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덮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사랑해주셨고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여기 사람의 줄이란 올무, 올가미를 뜻합니다. 딴 길로 못 가도록 올가미를 씌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올가미는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줄로 매었습니다. 목에서 멍에를 벗겼습니다.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한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은 다시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금년 한 해도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받을 자격 없는 자가 받았다 하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우상을 섬겼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다시 사랑하시고 다시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은총으로 우리는 2002년 한 해를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먼저 사랑의 줄로 이끌었습니다. 풀어놓으니 멀리 가고 풀어놓으니 도망가버립니다. 이제 사랑의 줄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 가시를 두고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무 큰 은혜를 받아 그냥 두면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로 사랑의 줄을 만들어 묶었습니다. 묶어서 겸손하게 만들었고 은혜의 세계에 머물도록 만들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올무였습니다.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조금 나아졌다하면 교만하고, 조금 튀었다하면 으시대고, 조금 높아졌다하면 오만불순해집니다. 그래서 그러하지 못하도록 묶었습니다. 건강하니 도망갑니다. 하나님 질병을 주셨습니다. 돈 있으니 도망갑니다.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줄에 묶인 것처럼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가까워지게 한 것이라면 그것이 질병이든 고통이든 사랑의 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줄이요 축복의 줄입니다.
그리고 목에서 멍에를 벗겨주셨다고 했습니다. 금년 한 해도 우리에게는 많은 멍에들이 있었습니다. 실패의 멍에 고통의 멍에, 슬픔의 멍에를 덮어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할 줄 몰라했고 때로는 절망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멍에를 벗겨주셨습니다. 못난 아들이 사고를 저지르고 나면 따라다니며 뒤처리를 하시는 아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일을 저지르고 나면 아버지는 찾아가서 사정하고 애걸하면서 뒤처리를 합니다. 체면도 위신도 말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아들의 멍에를 벗겨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금년 한해도 그렇게 우리의 멍에를 벗겨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절망적인 자리에서 건져주셨고, 그 고통스러운 짐들을 벗겨주셨습니다. 금년 한해도 하나님 우리의 멍에들을 벗겨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앞에 먹을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먹을 것을 주셨다는 말은 단순히 먹는 것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옛날에 먹는 것은 의식주 모든 것의 대표입니다. 먹을 것을 주셨다는 말은 영육간의 모든 삶을 책임지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책임져주셨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영적으로 다시 말해 말씀으로 먹여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북한의 성도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즈음은 탈북자들을 통해 또 다른 통로들을 통해 북한 지하 교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지하 교회 성도들 단파라디오로 극동방송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이불 밑에서 혹은 비밀리에 숨어서 듣습니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릴 때 찬송은 입만 벙긋거린답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모양만 만들어 그 입을 서로 쳐다보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말로 방송으로 들은 그 말씀을 메모를 해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눕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말씀을 나눈다고 합니다. 나눈 후 메모지는 즉시로 불태워버립니다. 발각되면 목숨을 잃습니다. 실제 수많은 성도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저들은 생명을 걸어놓고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많이 들으면서 고마움이 없습니다. 말씀이 귀한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을 자유롭게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금년 한 해도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 우리를 먹여주셨습니다. 참으로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지방 신문사에서 "내일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는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유언을 미리 한 번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뭐 별의 별,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온갖 종류의 말들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모두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은 금년으로 내 생애가 마지막이라면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어떻게 생을 정리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저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은 나의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았습니다. 나의 모든 허물보다 더 큰 은혜로 하나님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002년 한 해를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고 여기 소리 높여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은혜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이 은혜를 고백하며 이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갈 때 거기 자유와 행복이 있고, 거기 영원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 은총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해의 마지막 주일에 겸손히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저버렸던 저희들의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허물을 덮으시며 다시 사랑을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 은혜로 여기가지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이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보다 복된 새해를 맞이하는 저희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