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62
분류 |
---|
윤대영목사 (관악교회)
신앙생활을 순례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면 신앙생활이란 밖으로의 순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자기에로의 순례이며, 안으로의 순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을 하나님께 나와서 얻는 것보다는 어떤 일을 해서 기뻐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요, 누구를 지배하려고 하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와 경건하게 늘 연습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보고 고쳐주려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고 타인의 실수를 보아 내가 오히려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이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궁극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오셔서 행한 첫 번째 설교의 주제가 마음이었을 까? 왜 마음에 관해서 설교 하셨을 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이란 순진한 마음을 말합니다. 순진한 마음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때에는 장가를 일찍이 드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는 7살에 장가를 드셨습니다. 사돈댁에 가서 상객으로 며칠 유하게 되고 대접을 잘 받습니다. 꼬마 신랑은 낮 시간에는 신부의 사랑을 받고 동네 친구와 사귀면서 잘 보냈습니다만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어머니가 보고 싶고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고 자기를 데리고 온 할아버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사랑채로 뛰어가면 할아버지의 지팡이가 놓여있습니다.
"아! 할아버지가 계시는구나."
그는 별이 가득한 밤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할아버지는 사돈댁에 조금이라도 폐를 덜 끼치려고 지팡이만 남기고 이미 본가로 가셨습니다. 순진한 꼬마 신랑은 할아버지의 상징을 보고 할아버지를 보고 지냈던 것입니다. 마음이 순진한 사람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마음이 순진한 사람은 황혼에 지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그릴 수 있습니다. 허들어지게 피어있는 야생화 중에서 한 꽃잎 속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 그리고 하나님이 이토록 아름답게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의 역사를 찾아보고 또한 감사합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 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됩니다. 천둥이 치려고 하면 두 무릎을 꿇고 생애의 지은 죄를 낱낱이 발굴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자녀가 감기라 도 들면 혹 내가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것을 드리지 않은 것은 없는가 겸손하게 자기를 성찰하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에 약간의 상처가 나면 ''아! 하나님, 내가 어느 누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 상처를 생각해 내서 그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순 진한 마음을 가졌기에 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살기 때문에 언제나 정직하기를 원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살기에 그는 언제나 자기의 뜻대로 운행치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내가 이 땅에 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 을 내가 주님을 다시 만날 때 그대로 보여드리기 위해서 노심초사 항 상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보는 것은 초월의 세계로 올라가서 어떤 무리 가 상상하는 힘이다 생각하는 어떤 모습을 보려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닙니다.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 혹은 구별된 어떤 이상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주술적인 몸짓, 신을 향한 고행, 그리고 뿐만 아니라 바깥으로 향한 그야말로 처절한 수고스러운 여행은 오히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탕자가 먼 타국 을 갔다고 하신 말씀처럼 자기가 ''신은 이럴 것이다'' 생각하며 자기의 어떤 신 관념을 바라보며 이를 얻기 위하여 계속 먼 곳으로 여행하는 일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면 예수님을 만날 줄 알지만 그는 오히려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처럼 안으로의 순례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항상 주님 곁에 있고 하나님 품에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더 불어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편의 어느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계신다. 그러기에 음부에까지 하나님은 계신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한 숟가락의 밥을 퍼서 아 오묘하시다. 이 무기물을 내가 먹는다고 해서 어찌 우주와 똑같은 몸이 생장하고 활동 할 수 있을까? 이는 결코 무기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무엇인가 하도록 하시는 능력에 의한 나의 삶이 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순진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품에 늘 안겨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시를 되뇌어 봅니다. 나의 귀에 조종이 울리는 날/ 하늘엔 회색구름이 드리우고/ 나는 홀로 조용한 방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오직 그분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 영원에로 향한 여행은/ 오직 그분의 손을 잡고/ 기쁜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
여러분 순진한 사람은 순진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하나 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이 내미는 손을 잡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계수나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토끼 두 마리도 있습니다. 달은 가지 않는 것을 알지요, 구름이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달이 간다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친구의 어깨에 두 팔을 뻗쳐 올려서 어깨동무해서 즐거운 동요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은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갖는 특권일 것입니다. 어느 날 골목길에 빨간 일원짜리가 펄펄 날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원만 있으면 눈깔사탕 스무 개를 살 수 있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눈깔사탕을 입에 넣으면 그는 잔치가 벌어지지요, 그 소중한 일원, 그는 줍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 일원을 다시 찾아올 이웃을 생각하고, 그냥 두고 지나쳐 버려 걸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그 소년이 자라서 오랜 세월 지난 후에 그 골목에 서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 꾸깃꾸깃 접어온 쪽지를 펴면서
"아! 앞산 덕분이야 앞산이 나를 도왔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의로 부도를 내고 수많은 사람에게 줘야할 돈을 훔쳐 그 목록을 적어서 자기가 많이 소유 함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마음은 거추장스럽다.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까만 보자기에 싸서 어둠침침한 곳에 처넣어 버리자. 유배시켜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자.'' 이 때부터 몸은 나비가 되고 그리고 시대에 부르는 바람에 흩날리다가 폭풍이 불면 떨어져 어느 구석에 놓여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 위를 짓밟고 지나가는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깨끗한 마음, 이것은 순진한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깨끗한 마음은 바로 주인을 한 분으로 섬기는 마음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물질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구도자가 쓴 무소유라고 하는 책을 저는 참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여러분 정녕 무소유가 가능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마음을 비울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결코 마음은 비워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소유하지 말고 소유하라."
말씀하십니다. 의미 있는 것을 소유하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느 날 어느 동네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 내주고 그의 심령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귀신이 나가서 동서남북을 방황하다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련 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가 살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깨끗이 청소되어 있습니다. 아! 역시 내가 살던 곳이 좋구나. 귀신은 다른 귀신을 불러모아서 그 마음 속에 들어가 춤을 추고, 잡담을 하고, 어지럽히고, 얼마나 더럽게 했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가 이전보다 더 못하게 되었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비우신다고요, 마음을 비울 수 없습니다. 웃는 내 마음속에 주인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주를 만드셨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매 진정 우리의 참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한 바로 성령 충만한 이것이 바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어느 날 그 구도자 가 쓴 무소유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나에게 그 책을 소개받은 청년은 내가 생각하지 못하던 다른 부분 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라. 그분은 친구로부터 난 하나를 얻었다. 난 한 분을 얻어서 집에 두었다 가 그가 먼길을 순례하다가 생각해 보니 내 가난을 가졌다는 것이 불편하구나. 물을 주지 않아서 혹 마르면 어떻게 할까? 혹 죽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된 만큼 난 한 분도 갖지 않으려는 그분이 얼마나 존경스럽냐는 나의 말에 그 청년은 이렇게 답합니다.
"목사님, 목사님 생각은 그렇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그분 구도자가 지식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지 글을 쓰므로 말미암아 그를 존경하게 됨으로 그는 존경을 한 몸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는 인기가 좋아서 많은 사람의 인기를 그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불자에 의해서 100억이 넘는 재산을 기증을 받고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는데 어찌 그게 무소유 한 것입니까?"
정녕 이 땅에 무소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누가 과연 소유하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다 관리하다가 떠나가는 인생인데 그가 가진 그 관리권이나 인기나 지식이나 존경은 어느 누가 가진 것보다 더 값진 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 청년의 의문도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마음을 비울 수 없고 우리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는 내 마음속에 주님을 모셔드리고 그 분 한 분만 섬기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축복이 가득하게 실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만드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만 사랑하게 했을까? 예수님은 왜 간음의 이유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사람이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는 인생이 불행해져서 제명대로 살지 못한다고 연구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혼해서 홀로 사는 사람은 수명이 짧아져 10년-8년 일찍 죽는다고 합니다. 일찍 죽는다고만 보지 마세요. 그의 살아가는 삶은 죽지 못해 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사랑 받는 것보다는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에게 사랑 받으면 그 사랑이 몇 곱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가 그 사랑을 포기하고 또 다른 사랑을 하면 그 날부터 사랑은 온대간 대 없이 사라집니다. 그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갖고 싶은 욕망이 그의 영혼을 갈증나게 해서 마치 바다에 표류하는 어부가 바닷물을 퍼먹는 것 같은 그런 인생의 수고를 하다가 생애를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적으로 화제작이 되었던 이런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에 막달라 마리아는 간판을 내걸고 좋지 못한 일, 즉 몸을 파는 일을 했다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들어가셔서 천국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떠나셨습니다. 얼마나 지났던가 그가 궁금해서 예수님이 다시 방문해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마리아야 너는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니?"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는 말합니다.
"주님!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 후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사 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남편이 있느냐?"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입니다. 왜 예수님은 남편 이 몇이냐고 묻지 않고 남편이 있느냐고 물었을까? 사랑, 하나의 사랑 을 사랑치 않고 많은 사랑을 하다가 결국은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그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는 드디어 주님으로부터 한 모금 물을 마시기를 당하는데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다. 그는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즉 내가 지금부터 정녕 사랑할 분을 만났다. 사마리아 여인은 큰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만약 예수 한 분을 정녕 주인으로 섬긴다면 깨끗한 심령이요, 그리고 정녕 여러분의 심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심령일 것입니다.
또한 깨끗한 마음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날 자기밖에 모르는 부자가 유대 교사인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랍비는 그를 이끌고 창문에 가서 밖을 보게 했습니다. 밖을 보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네, 내 이웃을 보았습니다."
랍비는 그를 다시 거울 앞에 세웠습니다.
"지금 무엇이 보이는가?"
"예, 지금 나 홀로 보입니다."
그렇다, 창도 거울도 같은 유리다. 그러나 거 울은 뒤에 수은을 발라서 덧입혀져 있다. 너의 마음이 더럽혀져 있으면 너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웃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심령이 깨끗한 사람만이 이웃이 보여지고 이웃이 보여지면 사랑하고 파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명하게 들어내는 예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1:22절에 기록하기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깨끗한 영혼은 사랑하고 파지기 에 피차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미운 마음은 더러운 마음입니다. 더러운 마음은 남의 잘못이 자꾸만 보입니다. 여러분, 혹시 남의 잘못이 보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웃의 티가 보입니까? 그것은 마음에 들보 같은 창, 피부의 병이 낫기 때문에 여러분 그래서 이웃의 티가 보이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이 보이거든 내 심령에 병난 줄 알고 여러분의 마음을 잘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이란 안으로의 순례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다해도 여러분은 악한 세상을 깨끗케 하려는 생각을 마십시오. 내 자신이 깨끗해지면 세상은 깨끗해지고 세상은 선한 세상으로 바뀝니다. 4.19는 5.16을 낳고, 5.16은 무서운 군인들을 낳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저마다 그들이 말하기를 세상을 바꿔놓겠다는 횃불을 들고나선 사람이 아닙니까? 칼 막스, 그의 이론을 들어서 세계를 낙 원 같은 세상, 유토피아를 만들겠다 고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며 세계를 그야말로 균등하게 분배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아프리카와 북부와 아시아와 이 땅 조국에도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그러나 공산주의는 온대간대 없고 오히려 자본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이 통치하는 지구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제 가진 자가 하나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를 가지고 그는 이렇게 왜 칩니다.
"세계화, 그리고 능력 있는 자만이 사는 사회, 능력위주의 사회, 마치 저 동물들이 만들어 놓은 먹이사슬 같은 구조를 만들어 가는 오늘의 사회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약육강식의 윤리가 가장 합리적이라는 시장경제의 이념을 주장하는 이러한 사회를 누가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이 모두가 다 세상을 선하게 만들겠다고 나선 영적 사람들, 마음은 결코 깨끗지 못하고 자기의 욕구만 강한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깨끗하면 사랑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십니다. 타인을 향한 저주는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내 영혼에 파편으로 박혀 나를 영원히 아프게 합니다. 타인을 향하여 정죄하지만 그 사람은 정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죄로 내가 정죄함을 받아 일생동안 영혼에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형제를 판단 아닌 판단으로 그에게는 판단 받지 않습니다. 그 판단은 오히려 나에게로 돌아와 깊숙이 상처를 내어서 내 영혼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겨놓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주님 오실 때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깨끗한 심령, 마음밖에 내어놓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12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내가 천국에 갈 때 그때에는 하나님과 나와 함께 얼싸안고 찬양을 부르며 그분의 무릎에 눕기도 하고, 그분의 목에 목마를 타기도 하고, 그리고 그분의 등에 업혀서 마음껏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비결, 그것은 성령의 역사 안에 보혈의 피를 믿고 회개하는 길입니다. 회개하면 보혈이 여러분을 깨끗케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주님이신 성령을 모십시오. 성령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선물로 주셔서 여러분 로 하여금 이 땅에 복된 생애를 사는 주인으로 삼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순례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면 신앙생활이란 밖으로의 순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자기에로의 순례이며, 안으로의 순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을 하나님께 나와서 얻는 것보다는 어떤 일을 해서 기뻐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요, 누구를 지배하려고 하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와 경건하게 늘 연습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보고 고쳐주려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고 타인의 실수를 보아 내가 오히려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이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의 궁극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오셔서 행한 첫 번째 설교의 주제가 마음이었을 까? 왜 마음에 관해서 설교 하셨을 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이란 순진한 마음을 말합니다. 순진한 마음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때에는 장가를 일찍이 드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는 7살에 장가를 드셨습니다. 사돈댁에 가서 상객으로 며칠 유하게 되고 대접을 잘 받습니다. 꼬마 신랑은 낮 시간에는 신부의 사랑을 받고 동네 친구와 사귀면서 잘 보냈습니다만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어머니가 보고 싶고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고 자기를 데리고 온 할아버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사랑채로 뛰어가면 할아버지의 지팡이가 놓여있습니다.
"아! 할아버지가 계시는구나."
그는 별이 가득한 밤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할아버지는 사돈댁에 조금이라도 폐를 덜 끼치려고 지팡이만 남기고 이미 본가로 가셨습니다. 순진한 꼬마 신랑은 할아버지의 상징을 보고 할아버지를 보고 지냈던 것입니다. 마음이 순진한 사람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마음이 순진한 사람은 황혼에 지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그릴 수 있습니다. 허들어지게 피어있는 야생화 중에서 한 꽃잎 속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 그리고 하나님이 이토록 아름답게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의 역사를 찾아보고 또한 감사합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 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됩니다. 천둥이 치려고 하면 두 무릎을 꿇고 생애의 지은 죄를 낱낱이 발굴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자녀가 감기라 도 들면 혹 내가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것을 드리지 않은 것은 없는가 겸손하게 자기를 성찰하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에 약간의 상처가 나면 ''아! 하나님, 내가 어느 누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 상처를 생각해 내서 그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순 진한 마음을 가졌기에 복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살기 때문에 언제나 정직하기를 원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살기에 그는 언제나 자기의 뜻대로 운행치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내가 이 땅에 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 을 내가 주님을 다시 만날 때 그대로 보여드리기 위해서 노심초사 항 상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보는 것은 초월의 세계로 올라가서 어떤 무리 가 상상하는 힘이다 생각하는 어떤 모습을 보려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닙니다.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 혹은 구별된 어떤 이상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주술적인 몸짓, 신을 향한 고행, 그리고 뿐만 아니라 바깥으로 향한 그야말로 처절한 수고스러운 여행은 오히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탕자가 먼 타국 을 갔다고 하신 말씀처럼 자기가 ''신은 이럴 것이다'' 생각하며 자기의 어떤 신 관념을 바라보며 이를 얻기 위하여 계속 먼 곳으로 여행하는 일은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면 예수님을 만날 줄 알지만 그는 오히려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처럼 안으로의 순례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항상 주님 곁에 있고 하나님 품에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더 불어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편의 어느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계신다. 그러기에 음부에까지 하나님은 계신다."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한 숟가락의 밥을 퍼서 아 오묘하시다. 이 무기물을 내가 먹는다고 해서 어찌 우주와 똑같은 몸이 생장하고 활동 할 수 있을까? 이는 결코 무기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무엇인가 하도록 하시는 능력에 의한 나의 삶이 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순진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품에 늘 안겨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시를 되뇌어 봅니다. 나의 귀에 조종이 울리는 날/ 하늘엔 회색구름이 드리우고/ 나는 홀로 조용한 방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오직 그분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 영원에로 향한 여행은/ 오직 그분의 손을 잡고/ 기쁜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
여러분 순진한 사람은 순진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하나 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이 내미는 손을 잡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계수나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토끼 두 마리도 있습니다. 달은 가지 않는 것을 알지요, 구름이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달이 간다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친구의 어깨에 두 팔을 뻗쳐 올려서 어깨동무해서 즐거운 동요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은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갖는 특권일 것입니다. 어느 날 골목길에 빨간 일원짜리가 펄펄 날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원만 있으면 눈깔사탕 스무 개를 살 수 있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눈깔사탕을 입에 넣으면 그는 잔치가 벌어지지요, 그 소중한 일원, 그는 줍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 일원을 다시 찾아올 이웃을 생각하고, 그냥 두고 지나쳐 버려 걸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그 소년이 자라서 오랜 세월 지난 후에 그 골목에 서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 꾸깃꾸깃 접어온 쪽지를 펴면서
"아! 앞산 덕분이야 앞산이 나를 도왔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의로 부도를 내고 수많은 사람에게 줘야할 돈을 훔쳐 그 목록을 적어서 자기가 많이 소유 함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마음은 거추장스럽다.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까만 보자기에 싸서 어둠침침한 곳에 처넣어 버리자. 유배시켜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자.'' 이 때부터 몸은 나비가 되고 그리고 시대에 부르는 바람에 흩날리다가 폭풍이 불면 떨어져 어느 구석에 놓여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 위를 짓밟고 지나가는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깨끗한 마음, 이것은 순진한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깨끗한 마음은 바로 주인을 한 분으로 섬기는 마음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물질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구도자가 쓴 무소유라고 하는 책을 저는 참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여러분 정녕 무소유가 가능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마음을 비울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결코 마음은 비워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소유하지 말고 소유하라."
말씀하십니다. 의미 있는 것을 소유하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느 날 어느 동네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 내주고 그의 심령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귀신이 나가서 동서남북을 방황하다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련 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가 살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깨끗이 청소되어 있습니다. 아! 역시 내가 살던 곳이 좋구나. 귀신은 다른 귀신을 불러모아서 그 마음 속에 들어가 춤을 추고, 잡담을 하고, 어지럽히고, 얼마나 더럽게 했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가 이전보다 더 못하게 되었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비우신다고요, 마음을 비울 수 없습니다. 웃는 내 마음속에 주인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주를 만드셨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매 진정 우리의 참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한 바로 성령 충만한 이것이 바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어느 날 그 구도자 가 쓴 무소유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나에게 그 책을 소개받은 청년은 내가 생각하지 못하던 다른 부분 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라. 그분은 친구로부터 난 하나를 얻었다. 난 한 분을 얻어서 집에 두었다 가 그가 먼길을 순례하다가 생각해 보니 내 가난을 가졌다는 것이 불편하구나. 물을 주지 않아서 혹 마르면 어떻게 할까? 혹 죽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된 만큼 난 한 분도 갖지 않으려는 그분이 얼마나 존경스럽냐는 나의 말에 그 청년은 이렇게 답합니다.
"목사님, 목사님 생각은 그렇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그분 구도자가 지식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지 글을 쓰므로 말미암아 그를 존경하게 됨으로 그는 존경을 한 몸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는 인기가 좋아서 많은 사람의 인기를 그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불자에 의해서 100억이 넘는 재산을 기증을 받고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는데 어찌 그게 무소유 한 것입니까?"
정녕 이 땅에 무소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누가 과연 소유하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다 관리하다가 떠나가는 인생인데 그가 가진 그 관리권이나 인기나 지식이나 존경은 어느 누가 가진 것보다 더 값진 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 청년의 의문도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마음을 비울 수 없고 우리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는 내 마음속에 주님을 모셔드리고 그 분 한 분만 섬기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축복이 가득하게 실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만드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만 사랑하게 했을까? 예수님은 왜 간음의 이유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사람이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는 인생이 불행해져서 제명대로 살지 못한다고 연구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혼해서 홀로 사는 사람은 수명이 짧아져 10년-8년 일찍 죽는다고 합니다. 일찍 죽는다고만 보지 마세요. 그의 살아가는 삶은 죽지 못해 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사랑 받는 것보다는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에게 사랑 받으면 그 사랑이 몇 곱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가 그 사랑을 포기하고 또 다른 사랑을 하면 그 날부터 사랑은 온대간 대 없이 사라집니다. 그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갖고 싶은 욕망이 그의 영혼을 갈증나게 해서 마치 바다에 표류하는 어부가 바닷물을 퍼먹는 것 같은 그런 인생의 수고를 하다가 생애를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적으로 화제작이 되었던 이런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에 막달라 마리아는 간판을 내걸고 좋지 못한 일, 즉 몸을 파는 일을 했다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들어가셔서 천국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떠나셨습니다. 얼마나 지났던가 그가 궁금해서 예수님이 다시 방문해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마리아야 너는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니?"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는 말합니다.
"주님!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 후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은 사 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남편이 있느냐?"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입니다. 왜 예수님은 남편 이 몇이냐고 묻지 않고 남편이 있느냐고 물었을까? 사랑, 하나의 사랑 을 사랑치 않고 많은 사랑을 하다가 결국은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그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는 드디어 주님으로부터 한 모금 물을 마시기를 당하는데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다. 그는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즉 내가 지금부터 정녕 사랑할 분을 만났다. 사마리아 여인은 큰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만약 예수 한 분을 정녕 주인으로 섬긴다면 깨끗한 심령이요, 그리고 정녕 여러분의 심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심령일 것입니다.
또한 깨끗한 마음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날 자기밖에 모르는 부자가 유대 교사인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랍비는 그를 이끌고 창문에 가서 밖을 보게 했습니다. 밖을 보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네, 내 이웃을 보았습니다."
랍비는 그를 다시 거울 앞에 세웠습니다.
"지금 무엇이 보이는가?"
"예, 지금 나 홀로 보입니다."
그렇다, 창도 거울도 같은 유리다. 그러나 거 울은 뒤에 수은을 발라서 덧입혀져 있다. 너의 마음이 더럽혀져 있으면 너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웃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심령이 깨끗한 사람만이 이웃이 보여지고 이웃이 보여지면 사랑하고 파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명하게 들어내는 예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1:22절에 기록하기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깨끗한 영혼은 사랑하고 파지기 에 피차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미운 마음은 더러운 마음입니다. 더러운 마음은 남의 잘못이 자꾸만 보입니다. 여러분, 혹시 남의 잘못이 보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웃의 티가 보입니까? 그것은 마음에 들보 같은 창, 피부의 병이 낫기 때문에 여러분 그래서 이웃의 티가 보이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이 보이거든 내 심령에 병난 줄 알고 여러분의 마음을 잘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이란 안으로의 순례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다해도 여러분은 악한 세상을 깨끗케 하려는 생각을 마십시오. 내 자신이 깨끗해지면 세상은 깨끗해지고 세상은 선한 세상으로 바뀝니다. 4.19는 5.16을 낳고, 5.16은 무서운 군인들을 낳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저마다 그들이 말하기를 세상을 바꿔놓겠다는 횃불을 들고나선 사람이 아닙니까? 칼 막스, 그의 이론을 들어서 세계를 낙 원 같은 세상, 유토피아를 만들겠다 고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며 세계를 그야말로 균등하게 분배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이 아프리카와 북부와 아시아와 이 땅 조국에도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그러나 공산주의는 온대간대 없고 오히려 자본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이 통치하는 지구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제 가진 자가 하나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를 가지고 그는 이렇게 왜 칩니다.
"세계화, 그리고 능력 있는 자만이 사는 사회, 능력위주의 사회, 마치 저 동물들이 만들어 놓은 먹이사슬 같은 구조를 만들어 가는 오늘의 사회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약육강식의 윤리가 가장 합리적이라는 시장경제의 이념을 주장하는 이러한 사회를 누가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이 모두가 다 세상을 선하게 만들겠다고 나선 영적 사람들, 마음은 결코 깨끗지 못하고 자기의 욕구만 강한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깨끗하면 사랑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십니다. 타인을 향한 저주는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내 영혼에 파편으로 박혀 나를 영원히 아프게 합니다. 타인을 향하여 정죄하지만 그 사람은 정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죄로 내가 정죄함을 받아 일생동안 영혼에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형제를 판단 아닌 판단으로 그에게는 판단 받지 않습니다. 그 판단은 오히려 나에게로 돌아와 깊숙이 상처를 내어서 내 영혼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겨놓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주님 오실 때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깨끗한 심령, 마음밖에 내어놓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12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내가 천국에 갈 때 그때에는 하나님과 나와 함께 얼싸안고 찬양을 부르며 그분의 무릎에 눕기도 하고, 그분의 목에 목마를 타기도 하고, 그리고 그분의 등에 업혀서 마음껏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비결, 그것은 성령의 역사 안에 보혈의 피를 믿고 회개하는 길입니다. 회개하면 보혈이 여러분을 깨끗케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주님이신 성령을 모십시오. 성령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선물로 주셔서 여러분 로 하여금 이 땅에 복된 생애를 사는 주인으로 삼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