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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여기에 신약교회의 원시적 표본이 있다. 그것은 복음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세례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고, 사랑으로 행동하며, 모든 종류의 친교로 연합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John Wesley, Notes, 411). 이것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께서 영국사회를 복음으로 성화시켜가던 감리교 신앙 공동체의 존재 목적(mission statement)을 설명한 것입니다. 감리교우들이 모여 있는 신앙 공동체를 신약성서에 기록된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운영하길 원했던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그 당시 감리교 신앙 공동체의 교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성도의 교제를 경험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짐을 지기 시작하였고, 자연히 서로를 위해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날마다 더욱더 친밀해지자 서로 더욱더 지극한 사랑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되었다” (John Wesley, The Works VIII, 254).
목회자로서 이런 글을 읽노라면, 내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그래. 바로 이 모습이야!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야! 이런 이상적인성도의 교제는 현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이야!” 라고 외치게 됩니다. 나는 요한 웨슬리 목사께서 서술하셨던 초대 감리교 신앙 공동체와 같은 교회를 바로 이 교회에서 여기 모인 성도들과 함께 이루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성서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성도의 교제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헌신자들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돌아온 즉시 복음 증거 사역을 본격적으로 펼치십니다. 가정, 회당, 산과 들 그리고 해변가.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면서 함께 그 꿈을 이루어갈 사람들을 찾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자신의 가슴에 있는 꿈에 동참할 사람들을 부르는 말씀으로써 예수의 꿈에 헌신할 자의 취할 자세에 관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꿈에 동참하려면, 꿈으로의 초대에 즉각적인 회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듣자마자 안드레와 시몬, 야고보와 요한은 “곧, 그 즉시” 그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0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도 누구누구처럼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 사람처럼 생을 의미 있게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나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고서 미래의 그 언젠가 혹시나 다가올지도 모르는 행운의 순간(시간)에 자신의 가슴에 피어오른 꿈을 접어버립니다. 하지만 가슴에 피어오르는 꿈은 미래에 다가올 시간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즉시 그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어찌 나 같은 사람이” 또는 “그런 일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와 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가슴에 피어오른 꿈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겸손한 사람 혹은 현실을 정확히 읽고 현실에 긍정적인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특별한 일은 특별한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다”는 논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성경에 의하면, 특별한 일은 특별한 사람에게나 맡겨지지 않고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매우 특별한 일을 자신들에게 맡겨진 소명으로 받아들여 이루어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특별한 업무(일)는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낸다”는 의미인데, 이 얼마나 큰 과업입니까? 무지무지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탄의 손아귀에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쟁을 치루겠다는 것인데, 얼마나 대단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아주 특별한 사람, 특별한 재능과 권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나 시도해 볼 일이야!”라고 말할만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바로 그 엄청난 과업을 이루어내기 위해 예수께서 지목하여 부르셨던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아니 너무나도 배운 것 없으며,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갈릴리 촌 동네 어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8절). 이 구절에서 특별히 “저희는 어부라”는 말씀이 왠지 큰 의미를 담고 내게 들려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던 어부말입니다. 어부 시몬, 안드레,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자신들의 현실을 보지 아니하고 예수의 부르심으로 즉시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태어나기로 유명한 어느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을 배출해낸 그 동네를 찾았습니다. 어느날 어느 관광객이 그 동네 입구에 서 있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자 이렇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혹이 이곳이 OOO가 태어난 곳이 맞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 .”라고 화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관광객이 다른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그러면 혹시 OOO한 분이 태어난 곳이 맞죠?” 라고 다시 묻자 그 할아버지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이곳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기들이 태어났을 뿐입니다.”
위의 예화는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 하나 비범한 재능과 비밀을 안고 태어난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빈 손으로 발가벗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힘써 살아가느냐에 따라 걸어온 발자국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지금으로부터 두세 달 전에 일어났던 사고 이야기입니다. 라스베가스의 미라지 카지노 호텔(Mirage Casino Hotel)에서 신기에 가까운 “Siegfried & Roy’s Royal White Tigers”라는 쇼를 펼치며 세인의 사랑을 받았던 Roy라는 마법사가 자신과 함께 쇼를 펼치던 백호(white tiger)에게 목이 물려 거의 죽음의 상태까지 들어간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하시죠? 항상 주인의 지시에 절대 순종하며 쇼를 펼치던 백호가 그 날따라 어떤 계기로 주인의 목을 물고 질질 끌고 다녀야 했는지에 관한 설명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을 듣고 난 이후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목을 물고 다녔던 그 광대와 같던 호랑이는 백호였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길드려진 얌전한 애완 동물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백호의 기질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백호가 넓은 초원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그 호랑이는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다니며 마음껏 자신의 용맹을 자랑했을 백호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Roy라는 한 사람의 애완 동물이 된 이후 그는 Roy의 지시에 따라 쇼나 하고 다니는 광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맡게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한정해 버리는 오류를 범치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특별한 업무를 이루어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떠한 꿈을 꾸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운명이라는 연약한 말로 자신의 한계를 좁히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가능한 크게 꾸고 그 꿈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힘써 살아가면서 굴직한 발자국을 남기는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의 꿈에 동참하려면, 아끼던 것들을 과감히 포기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네 명의 갈릴리 촌 동네 어부들은 사람을 낚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물, 배, 아비”를 버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물, 배, 아비”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기에 그들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들을 뒤로 남겨두고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조나단 리빙스턴(Jonathan Livingston)이라는 한 마리의 갈매기가 하늘의 창공을 쏜살같이 차고 올라가다 갑자기 한쪽의 날개짓을 멈춥니다. 그러면 균형감각을 잃고 밑으로 곤두박질합니다. 때론 곤두박질한 곳이 바위이기도 합니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딛고 일어선 갈매기 조나단은 또다시 창공으로 치솓아 오릅니다. 어떤 동료들은 그를 안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동료들은 자신을 해하는 미친 짓이라고 혀를 내두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지는 걱정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줍니다. “존. 너는 왜 다른 동료들처럼 될 수 없는 거니? 다른 동료들처럼 낮게 날다가 고기를 잡아먹지 않니? 너는 이젠 뼈와 깃털밖에 남지 않았지 않니. . .”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충고해 줍니다. “요나단, 배우려 수고하려면 고기 잡기 위해 물 속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는 법을 배워라. 너가 배워야 할 것은 고기 잡는 법이다.” 하지만 갈매기 조나단은 또다시 창공을 향해 치솓아 오르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빨리 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빨리 날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너무나 많아!”
무엇인가를 포기하려면 먼저 얻고자 하는 것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얻고자 하는 것의 가치를 깨달은만큼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망과 헌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깨달은 만큼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기존에 아끼던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포기해야 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면 “지금껏 내가 아끼고 있는 것이 앞으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깊게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그들이 기존에 사용하던 그물을 버려야 했습니다. 지금껏 고기를 잡던 그물로는 사람을 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에 사용하던 그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결단입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의문도 일게 될 것입니다. 또한 “평소에 하던 대로 살아가지. 왜 그리 사서 고생하려 하나?”하는 말을 주변 사람들, 특별히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듣게 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얻고자 하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러한 소리까지 넘어설 수 있을 겁니다.
셋째, 예수의 꿈에 동참하려면,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아다니며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그물을 얽는 법, 그물을 내리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낚아야 할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새로 배우는 과정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낚아 올리고자 하는 영혼에 관해 배워야 합니다. 왜 영혼 구원이 필요한지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낚을 영혼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 구원은 결코 쉽지 않으며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얻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영혼을 낚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이 실로 많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그와 함께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영혼 구원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을 외치며 자신이 만든 그물을 사용하는 전도자들이 실로 많습니다. 나 역시 그러한 부류의 하나였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경험, 나의 지식으로 그물을 만들어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예수님을 좇고자 합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그물을 얽으셨는지, 어느 곳에 또한 어떻게 그물을 던지셨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좇는다는 말은 성경을 깊게 배우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그물 얽는 법, 그물 던지는 법을 잘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매듭짓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기 바랍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 라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초대에 우리가 아멘으로 화답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가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기 바랍니다. 예수를 좇아가면 됩니다. 좇아가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능숙한 영혼 낚는 어부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어떤 나라에 단 2%가 자기 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증거로 소수의 일본의 크리스천들이 일본 사회에 미치고 있는 긍정적 영향을 소개합니다. 2%의 교우들이 이 교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면, 이 교회는 그 꿈으로 인해 아름다운 미래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 도시의 2%의 한인 크리스천들이 이 도시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해 꿈을 갖고 있다면, 이 도시의 한인 사회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도시의 2%의 크리스천들이 이 도시에 대한 꿈을 갖고 있다면, 이 도시는 예수의 복음으로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꿈을 품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소수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당신이 바로 그 소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신약교회의 원시적 표본이 있다. 그것은 복음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세례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고, 사랑으로 행동하며, 모든 종류의 친교로 연합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John Wesley, Notes, 411). 이것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께서 영국사회를 복음으로 성화시켜가던 감리교 신앙 공동체의 존재 목적(mission statement)을 설명한 것입니다. 감리교우들이 모여 있는 신앙 공동체를 신약성서에 기록된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운영하길 원했던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그 당시 감리교 신앙 공동체의 교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성도의 교제를 경험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짐을 지기 시작하였고, 자연히 서로를 위해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날마다 더욱더 친밀해지자 서로 더욱더 지극한 사랑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게 되었다” (John Wesley, The Works VIII, 254).
목회자로서 이런 글을 읽노라면, 내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그래. 바로 이 모습이야!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야! 이런 이상적인성도의 교제는 현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이야!” 라고 외치게 됩니다. 나는 요한 웨슬리 목사께서 서술하셨던 초대 감리교 신앙 공동체와 같은 교회를 바로 이 교회에서 여기 모인 성도들과 함께 이루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성서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성도의 교제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헌신자들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돌아온 즉시 복음 증거 사역을 본격적으로 펼치십니다. 가정, 회당, 산과 들 그리고 해변가.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면서 함께 그 꿈을 이루어갈 사람들을 찾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자신의 가슴에 있는 꿈에 동참할 사람들을 부르는 말씀으로써 예수의 꿈에 헌신할 자의 취할 자세에 관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꿈에 동참하려면, 꿈으로의 초대에 즉각적인 회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듣자마자 안드레와 시몬, 야고보와 요한은 “곧, 그 즉시” 그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0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도 누구누구처럼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 사람처럼 생을 의미 있게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나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고서 미래의 그 언젠가 혹시나 다가올지도 모르는 행운의 순간(시간)에 자신의 가슴에 피어오른 꿈을 접어버립니다. 하지만 가슴에 피어오르는 꿈은 미래에 다가올 시간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즉시 그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어찌 나 같은 사람이” 또는 “그런 일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와 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가슴에 피어오른 꿈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겸손한 사람 혹은 현실을 정확히 읽고 현실에 긍정적인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특별한 일은 특별한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다”는 논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성경에 의하면, 특별한 일은 특별한 사람에게나 맡겨지지 않고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매우 특별한 일을 자신들에게 맡겨진 소명으로 받아들여 이루어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특별한 업무(일)는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낸다”는 의미인데, 이 얼마나 큰 과업입니까? 무지무지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탄의 손아귀에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쟁을 치루겠다는 것인데, 얼마나 대단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아주 특별한 사람, 특별한 재능과 권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나 시도해 볼 일이야!”라고 말할만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바로 그 엄청난 과업을 이루어내기 위해 예수께서 지목하여 부르셨던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아니 너무나도 배운 것 없으며,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갈릴리 촌 동네 어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8절). 이 구절에서 특별히 “저희는 어부라”는 말씀이 왠지 큰 의미를 담고 내게 들려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던 어부말입니다. 어부 시몬, 안드레,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자신들의 현실을 보지 아니하고 예수의 부르심으로 즉시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태어나기로 유명한 어느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을 배출해낸 그 동네를 찾았습니다. 어느날 어느 관광객이 그 동네 입구에 서 있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자 이렇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혹이 이곳이 OOO가 태어난 곳이 맞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 .”라고 화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관광객이 다른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그러면 혹시 OOO한 분이 태어난 곳이 맞죠?” 라고 다시 묻자 그 할아버지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이곳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기들이 태어났을 뿐입니다.”
위의 예화는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 하나 비범한 재능과 비밀을 안고 태어난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빈 손으로 발가벗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힘써 살아가느냐에 따라 걸어온 발자국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지금으로부터 두세 달 전에 일어났던 사고 이야기입니다. 라스베가스의 미라지 카지노 호텔(Mirage Casino Hotel)에서 신기에 가까운 “Siegfried & Roy’s Royal White Tigers”라는 쇼를 펼치며 세인의 사랑을 받았던 Roy라는 마법사가 자신과 함께 쇼를 펼치던 백호(white tiger)에게 목이 물려 거의 죽음의 상태까지 들어간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하시죠? 항상 주인의 지시에 절대 순종하며 쇼를 펼치던 백호가 그 날따라 어떤 계기로 주인의 목을 물고 질질 끌고 다녀야 했는지에 관한 설명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을 듣고 난 이후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목을 물고 다녔던 그 광대와 같던 호랑이는 백호였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길드려진 얌전한 애완 동물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백호의 기질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백호가 넓은 초원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그 호랑이는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다니며 마음껏 자신의 용맹을 자랑했을 백호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Roy라는 한 사람의 애완 동물이 된 이후 그는 Roy의 지시에 따라 쇼나 하고 다니는 광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맡게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한정해 버리는 오류를 범치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특별한 업무를 이루어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떠한 꿈을 꾸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운명이라는 연약한 말로 자신의 한계를 좁히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가능한 크게 꾸고 그 꿈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힘써 살아가면서 굴직한 발자국을 남기는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의 꿈에 동참하려면, 아끼던 것들을 과감히 포기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네 명의 갈릴리 촌 동네 어부들은 사람을 낚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물, 배, 아비”를 버리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물, 배, 아비”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기에 그들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들을 뒤로 남겨두고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조나단 리빙스턴(Jonathan Livingston)이라는 한 마리의 갈매기가 하늘의 창공을 쏜살같이 차고 올라가다 갑자기 한쪽의 날개짓을 멈춥니다. 그러면 균형감각을 잃고 밑으로 곤두박질합니다. 때론 곤두박질한 곳이 바위이기도 합니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딛고 일어선 갈매기 조나단은 또다시 창공으로 치솓아 오릅니다. 어떤 동료들은 그를 안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동료들은 자신을 해하는 미친 짓이라고 혀를 내두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지는 걱정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줍니다. “존. 너는 왜 다른 동료들처럼 될 수 없는 거니? 다른 동료들처럼 낮게 날다가 고기를 잡아먹지 않니? 너는 이젠 뼈와 깃털밖에 남지 않았지 않니. . .”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충고해 줍니다. “요나단, 배우려 수고하려면 고기 잡기 위해 물 속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는 법을 배워라. 너가 배워야 할 것은 고기 잡는 법이다.” 하지만 갈매기 조나단은 또다시 창공을 향해 치솓아 오르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빨리 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빨리 날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너무나 많아!”
무엇인가를 포기하려면 먼저 얻고자 하는 것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얻고자 하는 것의 가치를 깨달은만큼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망과 헌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깨달은 만큼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기존에 아끼던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포기해야 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면 “지금껏 내가 아끼고 있는 것이 앞으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깊게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그들이 기존에 사용하던 그물을 버려야 했습니다. 지금껏 고기를 잡던 그물로는 사람을 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에 사용하던 그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결단입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의문도 일게 될 것입니다. 또한 “평소에 하던 대로 살아가지. 왜 그리 사서 고생하려 하나?”하는 말을 주변 사람들, 특별히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듣게 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얻고자 하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러한 소리까지 넘어설 수 있을 겁니다.
셋째, 예수의 꿈에 동참하려면,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아다니며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그물을 얽는 법, 그물을 내리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낚아야 할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새로 배우는 과정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낚아 올리고자 하는 영혼에 관해 배워야 합니다. 왜 영혼 구원이 필요한지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낚을 영혼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 구원은 결코 쉽지 않으며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얻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영혼을 낚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이 실로 많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그와 함께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영혼 구원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을 외치며 자신이 만든 그물을 사용하는 전도자들이 실로 많습니다. 나 역시 그러한 부류의 하나였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경험, 나의 지식으로 그물을 만들어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예수님을 좇고자 합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그물을 얽으셨는지, 어느 곳에 또한 어떻게 그물을 던지셨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좇는다는 말은 성경을 깊게 배우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그물 얽는 법, 그물 던지는 법을 잘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매듭짓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기 바랍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 라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초대에 우리가 아멘으로 화답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가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기 바랍니다. 예수를 좇아가면 됩니다. 좇아가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능숙한 영혼 낚는 어부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어떤 나라에 단 2%가 자기 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증거로 소수의 일본의 크리스천들이 일본 사회에 미치고 있는 긍정적 영향을 소개합니다. 2%의 교우들이 이 교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면, 이 교회는 그 꿈으로 인해 아름다운 미래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 도시의 2%의 한인 크리스천들이 이 도시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해 꿈을 갖고 있다면, 이 도시의 한인 사회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도시의 2%의 크리스천들이 이 도시에 대한 꿈을 갖고 있다면, 이 도시는 예수의 복음으로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꿈을 품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소수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당신이 바로 그 소수가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