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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목사 (인천순복음교회)
오늘은 5월 첫 주 성찬주일입니다. 또 오늘은 2003년도 예수님 부활주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더 귀한 것은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이제 내일은 5월 5일, 2003년도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 어린이는 부모들에게 큰 기쁨, 또 즐거움이요, 행복이요, 보람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3살 때까지 그 삶이 부모에게 일평생 할 효는 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가정의 기쁨입니다. 또 어린이는 나라의 희망이요, 또 가정의 기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화를 낸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를 잘 내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언제 화를 내셨느냐? 마가복음 10장 13절로 14절 상반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이를 만져주기를 바라고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좀 피곤하시다고, 힘드시다고 그들을 꾸짖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되게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신할 때도 화를 내지 아니하셨습니다(막 10:26-52).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는 소경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을 때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화를 내지 아니하셨습니다(막 10:13-14). 또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죽이자고 사람들이 선동할 때도 화내지 아니하셨습니다(요 8:1-11). 그런데 예수님은 화를 내신 것입니다. 언제?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을 때 그것을 보고 분히 여겼다, 그랬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가 제자들처럼 어린이가 예수께 가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린이도 천하보다 귀한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 하반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오늘 귀한 날, 이 시간 성경적인 어린이 양육법에 대해 알아봄으로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가정의 어린이뿐이 아니라, 예수 안 믿는 가정의 어린 아이도, 우리가 사는 인천의 어린 아이뿐 아니라 이 대한민국 어린 아이, 또 대한민국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저 북한 땅 어린 아이, 이라크 땅 어린 아이, 전 세계의 모든 족속, 모든 나라의 어린 아이가 다 예수께로 가게 해주고, 그래서 그들이 모두가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예수 아이로 키워주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사랑하자
첫째로, 어린이를 “사랑하자.”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자.”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사랑으로 태어났습니다. 또 어린이는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어린 아이에게 먹는 것은 젖뿐이 아닙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사랑,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사랑 없는 젖은 어린 아이에게 배탈이 납니다. 몸이 병듭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먹이는 엄마의 젖은 그 어린 아기에게 영양입니다. 힘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럴 겁니다. “아이고, 목사님, 나는 우리 자녀 사랑하는데요.” 네, 사랑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사랑할 줄을 모른다, 그 말입니다. 과잉보호가 사랑인 줄 압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물질을 많이 주는 것이 사랑이냐?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과잉보호만 사랑이냐? 아니다, 그 말입니다. 물질만 해도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엄마의 사랑이 뭘까? 부모의 사랑이 뭘까? 부모의 손길, 손길. 어린 아이에게는 뭐가 필요합니까? 엄마의 손이 자주 가야 합니다. 손이 자주 가야 합니다. 이 손은 사랑입니다. 손은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손은 참 아주 어떻게 보면 신기한 것입니다. 고무장갑 끼고 만든 반찬보다 고무장갑 안 끼고 만든 반찬이 맛있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그 손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랑 맛, 있습니다. 사랑 맛, 있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엄마의 손이 많이 가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녀의 이름을 부르고, 함께 놀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이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돈 벌어서 자녀들 학원비 내준다는 핑계로, 여러 가지 핑계로, 자녀 이름 불러주지 못하고, 함께 놀아주지 못하고,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다면,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부르고, 가까이 하고, 안아줘야 할 것입니다. 바쁜 엄마들, 바쁜 아빠들, 정말로 하루에 몇 번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불러 주냐, 그 말입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가까이 해 주냐, 그 말입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안아 주냐,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바쁘세요? 우리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누가복음 18장 16절 상반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그랬습니다. 또 마가복음 10장 16절 상반절에 보니까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랬습니다.
또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 자녀를 어떻게 키우느냐?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할 때, 그 자녀에게 물질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과잉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줘야 한다, 그 말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무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그, 말이 잘 안 통하는 떠듬떠듬하는 말도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두가 다 명령입니다. 절대자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우리 함께 감사하자.” 효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효도하라”, “부모 공경하라”, 그 말만이 아니라, “우리 함께 효도하자”, “우리 함께 부모와 어른들을 공경하자”, “우리 함께 해보자.” 열 번 하라는 것보다 한번 함께 하자 그럴 때, 어린 아이들이, 학생들이 더 많이 따라오고 실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보세요. 현대인의 성경, 번역성경을 보면 마태복음 18장 10절 상반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업신여기는 게 아니다. 명령만 하는 게 아니다. 인격적으로 대해줘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가져온 소년을 작다고 무시하지 아니했습니다. 먹여야 할 사람들은 남자만 5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입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가져온 소년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받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귀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지고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 그 많은 사람, 먹을 사람에 비교하면 아주 작지만 그것을 작다고 무시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께 축사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가 늙고 병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 하나만 들려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눈을 감은 채 말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테네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말라. 그것을 물려받을 어린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으라.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고귀한 교훈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사랑해야 합니다.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둘째, 가르치자
두 번째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가르치자”, “가르치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성경 66권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핵심적인 것 6가지가 뭡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라.”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또 두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효를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가정을 사랑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천국 나라가 있고 조국 나라가 있습니다. 자기 조국 나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을 사랑할 것을, 애국할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연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사람을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할 것을 가르쳐줘야 돼요.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과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라. 봉사를 가르쳐줘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죄악 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지를 너무나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남북한 다 합쳐봐야 그 면적이 22만 평방 km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한에 4천 6백만 국민이 삽니다. 북한에 2천 3백만 동포가 삽니다. 미국이나, 뭐 중국이나, 저 독일이나 큰 나라에 비교하면, 그 면적이나 인구가 너무나 작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 음란, 자살, 도박 등 인터넷 유해 사이트 수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두 번째로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음란 메일은 무작위로 발송되어서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된 것을 끊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이냐? 오직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그 길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아무리 걱정한다고 되겠습니까? 그게 되지 않아요. 어떻게 되느냐? 예수를 믿게 하고, 성령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말씀대로 살 것을 가르쳐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물리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되되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면, 누구처럼? 요셉처럼 유혹이 와도 유혹을 뿌리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면 인생을 실패 당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함께 이 세상을 물리치며 능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착각하는 것입니다. 벌써 엄마가, 산모가 아기를 잉태했을 때부터 태교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려주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 제일 좋은 교육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젖 먹을 때, 엄마 품에 안고 젖을 먹으면서 자장가 불러주는 대신에 찬송가를 불러주고, 그리고 흥얼대기 전에 기도하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서양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빌어먹게 하려면 재산을 남겨주고 자식을 성공시키려면 신앙과 신념을 넣어 주라.”
자녀는 부모의 말로 자라는 것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새벽기도, 철야예배, 주일예배에 틀림없이 주일성수 하는 것으로, 그 뿐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감사헌금도, 선교헌금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배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전도도 가르치고, 기도도 가르치고,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 중에 무엇도 가르쳐야 합니까? 헌금을 바르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꼭 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운 자녀들은 주일성수를 잘 합니다. 새벽기도 잘 합니다. 철야기도 잘 합니다. 가정예배 드립니다. 구역예배 드립니다. 틀림없이 헌금도 합니다. 십일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본 자녀는 반드시 신앙으로 자랍니다. 틀림없이 부모 속 썩이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성경적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성 어거스틴은, 20대까지는 허랑방탕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모니카가 기도했습니다. 그 어거스틴이 자기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 어머니는 눈물 흘리며 기도를 합니다.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내 아들 어거스틴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내 아들 어거스틴을 불쌍히 보아주옵소서.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해주시옵소서.” 어머니 그 모니카가 울며 기도합니다. 통회하며 기도합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를 합니다. 그 어거스틴이 본 어머니는 항상 기도합니다. 결정적일 때, 그가 회심할 때, 무엇을 보고 회심했습니까? 어머니의 기도한 모습을 보고 “가자. 우리 어머니가 나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이렇게 살 게 아니다. 나 이제 가자.” 그리고 회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가정의 품으로, 어머니 품으로 돌아와서 결국은 기독교를 세계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많은 저서와 많은 기록으로, 그래서 그 한 일이 너무 귀하니까 어거스틴을 말할 때, 그냥 “어거스틴” 그러지 않습니다. “성 어거스틴”, 성자의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한 일을 맡았던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겨야만 자기 자녀들을 매우 뛰어나게 기르게 된다” 그랬습니다. 또 어느 교육자, 심리학자의 말입니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다만 문제 있는 부모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문제 있는 자녀가 많다. 문제 있는 어린 아이가 많다. 청소년이 문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합니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문제 있는 청소년은 없다. 다만 문제 있는 부모만 있을 뿐이다.” 부모가 문제일 때, 자녀가 문제인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문제일 때, 청소년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셋째, 축복하자
세 번째, 어린이를 “축복하자.”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축복하자”, “어린이를 축복하자.” 그렇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축복하신 예는 딱 두 군데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어린이를 축복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6절에 보니까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나는 성경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우리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안았다, 그랬습니다. 그들 위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안수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자녀들을 안아줘야 합니다. 그들 머리에 손을 얹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많이 자녀를 안아주셨습니까? 얼마나 많이 자녀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주셨습니까? 오늘 깊이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나는 바쁘잖아요. 직장이 바쁘잖아요. 사업이 바쁘잖아요. 돈 벌기 바쁘잖아요.” 엄마들도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럴 시간 없어요. 쟤들 학원비 대려고 파출부 가야 돼요.” “나도 공장에 가서 일해요. 너무 바빠요.” “나도 식당에 가서 일해요. 너무 피곤해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 다 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자녀를 안아주는 것입니다. 손을 얹어주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위인들은 자녀의 미래를 항상 축복했습니다.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20절로 2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아브라함은 이삭을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장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세워졌느냐? 그 부모가 자녀들에게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선민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부모가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렇습니다. 어떤 대리자이냐? 축복권 대리자, 말씀권 대리자, 훈육권 대리자, 신앙전수권 대리자입니다. 축복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축복하는 권세입니다. 말씀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권세입니다. 훈육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훈계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또 신앙전수권이 뭡니까?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을 자녀에게 유산으로 넘겨주는 권세, 이것이 신앙전수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노아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효자 셈과 야벳을 노아가 축복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들춰낸 함을 노아가 저주했습니다. 그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장자 축복 기도를 가로챈 야곱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얹고 기도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많이 받고, 자녀들을 위해서 더 많이 축복을 빌어주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그래요.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했다면, 공부 못 할 놈 한 놈도 없을 거다. 아마. 그런데 여러분,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그래도 공부가 되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이 뭐냐? 하루에 한번이라도 그 자녀의 머리에 엄마가, 아빠가 손을 얹고 축복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도 있고, 건강도 있고, 순종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는 믿음의 아들로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믿음의 딸로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부모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보다 하나님이 키우실 때, 더 잘 성장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말과 부모의 사랑의 눈물과 부모의 사랑의 기도로 그것 먹고, 그 사랑 먹고, 사랑의 말, 사랑의 눈물, 사랑의 기도 먹고 자녀가 잘 성장하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고,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부모의 축복으로 미래를 만들어 간다, 그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목으로, 하나님 나라의 재목감으로, 하나님 나라의 큰 일꾼으로 키웁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피와 땀과 눈물을 아시고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틀림없이 모든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대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 끼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잘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은 5월 첫 주 성찬주일입니다. 또 오늘은 2003년도 예수님 부활주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더 귀한 것은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이제 내일은 5월 5일, 2003년도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 어린이는 부모들에게 큰 기쁨, 또 즐거움이요, 행복이요, 보람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3살 때까지 그 삶이 부모에게 일평생 할 효는 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가정의 기쁨입니다. 또 어린이는 나라의 희망이요, 또 가정의 기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화를 낸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를 잘 내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언제 화를 내셨느냐? 마가복음 10장 13절로 14절 상반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이를 만져주기를 바라고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좀 피곤하시다고, 힘드시다고 그들을 꾸짖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되게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신할 때도 화를 내지 아니하셨습니다(막 10:26-52).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는 소경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을 때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화를 내지 아니하셨습니다(막 10:13-14). 또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죽이자고 사람들이 선동할 때도 화내지 아니하셨습니다(요 8:1-11). 그런데 예수님은 화를 내신 것입니다. 언제?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을 때 그것을 보고 분히 여겼다, 그랬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가 제자들처럼 어린이가 예수께 가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린이도 천하보다 귀한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 하반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오늘 귀한 날, 이 시간 성경적인 어린이 양육법에 대해 알아봄으로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가정의 어린이뿐이 아니라, 예수 안 믿는 가정의 어린 아이도, 우리가 사는 인천의 어린 아이뿐 아니라 이 대한민국 어린 아이, 또 대한민국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저 북한 땅 어린 아이, 이라크 땅 어린 아이, 전 세계의 모든 족속, 모든 나라의 어린 아이가 다 예수께로 가게 해주고, 그래서 그들이 모두가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예수 아이로 키워주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사랑하자
첫째로, 어린이를 “사랑하자.”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자.”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사랑으로 태어났습니다. 또 어린이는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어린 아이에게 먹는 것은 젖뿐이 아닙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사랑,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사랑 없는 젖은 어린 아이에게 배탈이 납니다. 몸이 병듭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먹이는 엄마의 젖은 그 어린 아기에게 영양입니다. 힘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럴 겁니다. “아이고, 목사님, 나는 우리 자녀 사랑하는데요.” 네, 사랑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사랑할 줄을 모른다, 그 말입니다. 과잉보호가 사랑인 줄 압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물질을 많이 주는 것이 사랑이냐?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과잉보호만 사랑이냐? 아니다, 그 말입니다. 물질만 해도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엄마의 사랑이 뭘까? 부모의 사랑이 뭘까? 부모의 손길, 손길. 어린 아이에게는 뭐가 필요합니까? 엄마의 손이 자주 가야 합니다. 손이 자주 가야 합니다. 이 손은 사랑입니다. 손은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손은 참 아주 어떻게 보면 신기한 것입니다. 고무장갑 끼고 만든 반찬보다 고무장갑 안 끼고 만든 반찬이 맛있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그 손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랑 맛, 있습니다. 사랑 맛, 있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엄마의 손이 많이 가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녀의 이름을 부르고, 함께 놀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이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돈 벌어서 자녀들 학원비 내준다는 핑계로, 여러 가지 핑계로, 자녀 이름 불러주지 못하고, 함께 놀아주지 못하고,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다면,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부르고, 가까이 하고, 안아줘야 할 것입니다. 바쁜 엄마들, 바쁜 아빠들, 정말로 하루에 몇 번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불러 주냐, 그 말입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가까이 해 주냐, 그 말입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안아 주냐,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바쁘세요? 우리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누가복음 18장 16절 상반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그랬습니다. 또 마가복음 10장 16절 상반절에 보니까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랬습니다.
또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 자녀를 어떻게 키우느냐?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할 때, 그 자녀에게 물질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과잉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줘야 한다, 그 말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무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그, 말이 잘 안 통하는 떠듬떠듬하는 말도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두가 다 명령입니다. 절대자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우리 함께 감사하자.” 효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효도하라”, “부모 공경하라”, 그 말만이 아니라, “우리 함께 효도하자”, “우리 함께 부모와 어른들을 공경하자”, “우리 함께 해보자.” 열 번 하라는 것보다 한번 함께 하자 그럴 때, 어린 아이들이, 학생들이 더 많이 따라오고 실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보세요. 현대인의 성경, 번역성경을 보면 마태복음 18장 10절 상반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업신여기는 게 아니다. 명령만 하는 게 아니다. 인격적으로 대해줘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가져온 소년을 작다고 무시하지 아니했습니다. 먹여야 할 사람들은 남자만 5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입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가져온 소년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받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귀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지고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 그 많은 사람, 먹을 사람에 비교하면 아주 작지만 그것을 작다고 무시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께 축사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가 늙고 병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 하나만 들려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눈을 감은 채 말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테네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말라. 그것을 물려받을 어린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으라.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고귀한 교훈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사랑해야 합니다.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둘째, 가르치자
두 번째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가르치자”, “가르치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성경 66권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핵심적인 것 6가지가 뭡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라.”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또 두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효를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가정을 사랑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천국 나라가 있고 조국 나라가 있습니다. 자기 조국 나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을 사랑할 것을, 애국할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연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사람을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할 것을 가르쳐줘야 돼요.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과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라. 봉사를 가르쳐줘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죄악 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지를 너무나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남북한 다 합쳐봐야 그 면적이 22만 평방 km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한에 4천 6백만 국민이 삽니다. 북한에 2천 3백만 동포가 삽니다. 미국이나, 뭐 중국이나, 저 독일이나 큰 나라에 비교하면, 그 면적이나 인구가 너무나 작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 음란, 자살, 도박 등 인터넷 유해 사이트 수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두 번째로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음란 메일은 무작위로 발송되어서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된 것을 끊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이냐? 오직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그 길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아무리 걱정한다고 되겠습니까? 그게 되지 않아요. 어떻게 되느냐? 예수를 믿게 하고, 성령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말씀대로 살 것을 가르쳐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물리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되되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면, 누구처럼? 요셉처럼 유혹이 와도 유혹을 뿌리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면 인생을 실패 당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함께 이 세상을 물리치며 능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착각하는 것입니다. 벌써 엄마가, 산모가 아기를 잉태했을 때부터 태교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려주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 제일 좋은 교육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젖 먹을 때, 엄마 품에 안고 젖을 먹으면서 자장가 불러주는 대신에 찬송가를 불러주고, 그리고 흥얼대기 전에 기도하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서양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빌어먹게 하려면 재산을 남겨주고 자식을 성공시키려면 신앙과 신념을 넣어 주라.”
자녀는 부모의 말로 자라는 것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새벽기도, 철야예배, 주일예배에 틀림없이 주일성수 하는 것으로, 그 뿐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감사헌금도, 선교헌금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배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전도도 가르치고, 기도도 가르치고,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 중에 무엇도 가르쳐야 합니까? 헌금을 바르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꼭 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운 자녀들은 주일성수를 잘 합니다. 새벽기도 잘 합니다. 철야기도 잘 합니다. 가정예배 드립니다. 구역예배 드립니다. 틀림없이 헌금도 합니다. 십일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본 자녀는 반드시 신앙으로 자랍니다. 틀림없이 부모 속 썩이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성경적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성 어거스틴은, 20대까지는 허랑방탕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모니카가 기도했습니다. 그 어거스틴이 자기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 어머니는 눈물 흘리며 기도를 합니다.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내 아들 어거스틴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내 아들 어거스틴을 불쌍히 보아주옵소서.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해주시옵소서.” 어머니 그 모니카가 울며 기도합니다. 통회하며 기도합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를 합니다. 그 어거스틴이 본 어머니는 항상 기도합니다. 결정적일 때, 그가 회심할 때, 무엇을 보고 회심했습니까? 어머니의 기도한 모습을 보고 “가자. 우리 어머니가 나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이렇게 살 게 아니다. 나 이제 가자.” 그리고 회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가정의 품으로, 어머니 품으로 돌아와서 결국은 기독교를 세계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많은 저서와 많은 기록으로, 그래서 그 한 일이 너무 귀하니까 어거스틴을 말할 때, 그냥 “어거스틴” 그러지 않습니다. “성 어거스틴”, 성자의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한 일을 맡았던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겨야만 자기 자녀들을 매우 뛰어나게 기르게 된다” 그랬습니다. 또 어느 교육자, 심리학자의 말입니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다만 문제 있는 부모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문제 있는 자녀가 많다. 문제 있는 어린 아이가 많다. 청소년이 문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합니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문제 있는 청소년은 없다. 다만 문제 있는 부모만 있을 뿐이다.” 부모가 문제일 때, 자녀가 문제인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문제일 때, 청소년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셋째, 축복하자
세 번째, 어린이를 “축복하자.”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축복하자”, “어린이를 축복하자.” 그렇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축복하신 예는 딱 두 군데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어린이를 축복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6절에 보니까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나는 성경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우리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안았다, 그랬습니다. 그들 위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안수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자녀들을 안아줘야 합니다. 그들 머리에 손을 얹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많이 자녀를 안아주셨습니까? 얼마나 많이 자녀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주셨습니까? 오늘 깊이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나는 바쁘잖아요. 직장이 바쁘잖아요. 사업이 바쁘잖아요. 돈 벌기 바쁘잖아요.” 엄마들도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럴 시간 없어요. 쟤들 학원비 대려고 파출부 가야 돼요.” “나도 공장에 가서 일해요. 너무 바빠요.” “나도 식당에 가서 일해요. 너무 피곤해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 다 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자녀를 안아주는 것입니다. 손을 얹어주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위인들은 자녀의 미래를 항상 축복했습니다.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20절로 2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아브라함은 이삭을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장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세워졌느냐? 그 부모가 자녀들에게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선민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부모가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렇습니다. 어떤 대리자이냐? 축복권 대리자, 말씀권 대리자, 훈육권 대리자, 신앙전수권 대리자입니다. 축복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축복하는 권세입니다. 말씀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권세입니다. 훈육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훈계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또 신앙전수권이 뭡니까?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을 자녀에게 유산으로 넘겨주는 권세, 이것이 신앙전수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노아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효자 셈과 야벳을 노아가 축복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들춰낸 함을 노아가 저주했습니다. 그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장자 축복 기도를 가로챈 야곱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얹고 기도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많이 받고, 자녀들을 위해서 더 많이 축복을 빌어주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그래요.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했다면, 공부 못 할 놈 한 놈도 없을 거다. 아마. 그런데 여러분,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그래도 공부가 되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이 뭐냐? 하루에 한번이라도 그 자녀의 머리에 엄마가, 아빠가 손을 얹고 축복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도 있고, 건강도 있고, 순종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는 믿음의 아들로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믿음의 딸로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부모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보다 하나님이 키우실 때, 더 잘 성장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말과 부모의 사랑의 눈물과 부모의 사랑의 기도로 그것 먹고, 그 사랑 먹고, 사랑의 말, 사랑의 눈물, 사랑의 기도 먹고 자녀가 잘 성장하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고,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부모의 축복으로 미래를 만들어 간다, 그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목으로, 하나님 나라의 재목감으로, 하나님 나라의 큰 일꾼으로 키웁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피와 땀과 눈물을 아시고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틀림없이 모든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대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 끼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잘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