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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고향 사람들이 이럴 수가...
오늘 본문은 짧지만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또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이거나 세리나 창녀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유대 공동체에서 내쳐진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사람들은 주로 정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배척했을 것 같지 않고 또 배척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얘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 중 가장 큰 문제점이 지방색 또는 지역감정이라고 합니다. 선거할 때마다 이른바 ‘묻지 마’ 투표성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심지어 어느 지역에서 어떤 정당은 막대기만 꽂아놔도 당선된다는 우스개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사정에 익숙해서 그런지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가 쉽게 와 닿지 않습니다. 왜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 낸 위대한 인물을 환영하지 않았을까요? 환영은커녕 배척했을까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패이야기를 별로 전하지 않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이 예수께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시는 데 실패한 유일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전 문맥에 비추어 보면 ‘그곳’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후에 예수님 일행은 발길을 고향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고향 마을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회당’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마을회관’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드릴 수 없습니다.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이외에 마을의 모든 종교적이거나 비종교적인 행사들은 모두 회당에서 열렸습니다. 회당은 물론 학교 역할도 했습니다. 거기서는 누구나 회당장의 허락만 얻으면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연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여기서 말하는 ‘기적’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문맥상 예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기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놀랬습니다.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이들의 놀란 감정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하는 궁금증은 예수님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모르는 사람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는데 이들은 반대로 예수님이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궁금해졌습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은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저 친구는 우리 옆집에 살던 바로 그 친구 아냐? 목수의 아들 아냐? 어렸을 때 우리랑 같이 개울에서 빨개 벗고 미역 감던 바로 그 녀석 아냐! 그 친구가 예언자가 됐단 말이야? 그 친구가 기적을 행한단 말이야?”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다음에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친밀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좀처럼 예수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말의 희랍어 원문에는 ‘버리다’ ‘배척하다’ ‘누구에 대해 의심을 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믿지 않았던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척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몇 가지 번역 성경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반응을 보인 고향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 및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이 말이 고향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이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의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누가복음 4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이 말의 뜻을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이 설명 때문에 고향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두 가지 유명한 일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반이나 가뭄이 들어 온 이스라엘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을 때 이스라엘에도 과부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그들에게 보냄 받지 않고 이방인 시돈 지방 사렙다 과부에게 보냄 받았다는 얘기가 그 첫 번째 예입니다. 그리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엘리사는 그들은 한 명도 고쳐주지 않고 역시 이방 사람인 시리아인 나아만만 고쳐줬다는 얘기가 두 번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은 엘리야, 엘리사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과 같다는 뜻입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사실 무턱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양심을 찔러 그를 아프게 합니다. 종교적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아파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합니다! 의당 아파야 하는데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자신에 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듣거나 두루뭉술하게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일화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이 일반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남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그들 자신에 대핸 이야기임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얘기가 바로 네 얘기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언자 나단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함께 저지른 다윗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화를 얘기했을 때 다윗은 그 얘기를 듣고 “저런 죽일 놈!” 하고 흥분했습니다. 다윗은 그 우화가 자기 얘긴지도 모르고 흥분했던 것입니다. 이때 나단은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 세계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한 설교와 못한 설교는 종이 한 장 차이인데, 설교를 들으면서 교인들이 모두 “아, 이건 내 얘기구나!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구나.”라고 생각하면 잘 한 설교이고 “아, 이건 아무개 얘기구나. 아무개 들으라고 하는 얘기구나.”라고 생각하면 잘못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예로 든 일화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야기를 남의 얘기로만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얘기가 바로 ‘자기들’에 대한 얘기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얘기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대들었습니다.
이상은 누가복음이 전하는 얘기이고 오늘 우리의 본문인 마가복음에는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 뿐 다른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전할 뿐입니다. 이 대목이 주목을 끕니다. 본문은 다른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행할 수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기이하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없었고(무능) 그들의 불신앙을 기이하게 여기셨습니다(당황). 예수님이 예측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고, 하려고 의도했던 일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모호한 적대감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이 당신을 배척하리라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들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등 유대교 종교지도자였거나 로마제국의 권력자였다면 예수님은 당신이 배척당할 수 있음을 충분히 예측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어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고 후원했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가만 있자, 이 친구가 누구지? 그 목수 아냐? 바로 그 녀석 아냐? 바로 우리 옆집 살던 그 녀석 아냐?’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분에 대한 친밀함이 놀라움이 됐고 놀라움은 낯섦이 됐으며 결국 낯섦으로 인해 그분을 밀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서기 전 30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삶이 어땠을까요? 아마 모르긴 해도 평범했을 것입니다. 물론 가끔은 비범한 면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대체로는 평범했을 것입니다. 남들이 사는 대로 똑같이 살았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약점도 있었을 것이고 잘못도 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습니다. 사랑스런 눈으로 보면 약점이 감춰지고 미운 눈으로 보면 똑같은 약점이 두드러져 보이는 법입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언자가 되어 자기들 앞에 나타난 이웃의 권위와 넘치는 은총과 거룩함이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에게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적대감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이웃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혼을 파고들어오는 영적인 힘과 은총에 맞부딪치는 순간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그 무엇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도 부끄러워 영혼 저 깊숙이 숨겨두었던 것이고 할 수만 있으면 잊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인이 느낀 바로 그것 말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 저 깊은 밑바닥에 숨겨두었기 때문에 웬만한 자극으로는 그것을 흔들어 깨울 수 없습니다. 물론 깨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같은 분과 만날 때는 그것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은총과 만났을 때 느끼는 모호한 적대감과 분노는 결국은 해결해야 하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인간은 이 문제를 예수님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 속에서는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거나 악령을 내쫓을 때 때로 병자의 믿음을 요구하거나 확인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병자나 악령 들린 자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들을 고치신 적도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데 상대방의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사람들의 불신이 예수님의 기적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적에 대한 강한 열망은 분명 긍정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기적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도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불신은 기적과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 곧 부정적인 에너지는 예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늘 예수님의 기적을 가로막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의 본문은 분명 그런 경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할 것 없이 모든 공동체에는 에너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흐르는 에너지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따뜻한 에너지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차가운 에너지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는 부정적이고 의심에 가득 차 있으며 차갑고 적대적인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는 예수님도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저도 여러분도 모두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말이나 감정이나 생각이 부드럽게 녹아들어가지 않고 튕겨 나오는 경험 말입니다. 반대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녹아들어가고 융화되는 경험도 해보셨을 것입니다. 거기 어떤 에너지가 흐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으로 발휘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발휘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에너지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상집 같이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를 새 생명이 태어는 것 같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분위기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이 어떤 에너지를 갖고 있는가에 좌우됩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소극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 여러분의 신앙과 삶도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소극적이 되지만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감싸주는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 여러분의 신앙과 삶도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에너지로써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적극적이고 감싸주는 에너지를 이웃에게 내뿜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에너지를 갖고 살기를 바라고 또 그런 에너지는 이웃에 퍼뜨리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전도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고향 사람들이 이럴 수가...
오늘 본문은 짧지만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또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이거나 세리나 창녀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유대 공동체에서 내쳐진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사람들은 주로 정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배척했을 것 같지 않고 또 배척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얘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 중 가장 큰 문제점이 지방색 또는 지역감정이라고 합니다. 선거할 때마다 이른바 ‘묻지 마’ 투표성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심지어 어느 지역에서 어떤 정당은 막대기만 꽂아놔도 당선된다는 우스개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사정에 익숙해서 그런지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가 쉽게 와 닿지 않습니다. 왜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 낸 위대한 인물을 환영하지 않았을까요? 환영은커녕 배척했을까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패이야기를 별로 전하지 않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이 예수께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시는 데 실패한 유일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전 문맥에 비추어 보면 ‘그곳’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후에 예수님 일행은 발길을 고향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고향 마을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회당’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마을회관’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드릴 수 없습니다.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이외에 마을의 모든 종교적이거나 비종교적인 행사들은 모두 회당에서 열렸습니다. 회당은 물론 학교 역할도 했습니다. 거기서는 누구나 회당장의 허락만 얻으면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연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여기서 말하는 ‘기적’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문맥상 예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기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놀랬습니다.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이들의 놀란 감정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하는 궁금증은 예수님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모르는 사람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는데 이들은 반대로 예수님이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궁금해졌습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은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저 친구는 우리 옆집에 살던 바로 그 친구 아냐? 목수의 아들 아냐? 어렸을 때 우리랑 같이 개울에서 빨개 벗고 미역 감던 바로 그 녀석 아냐! 그 친구가 예언자가 됐단 말이야? 그 친구가 기적을 행한단 말이야?”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다음에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친밀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좀처럼 예수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말의 희랍어 원문에는 ‘버리다’ ‘배척하다’ ‘누구에 대해 의심을 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믿지 않았던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척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몇 가지 번역 성경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반응을 보인 고향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 및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이 말이 고향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이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의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누가복음 4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이 말의 뜻을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이 설명 때문에 고향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두 가지 유명한 일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반이나 가뭄이 들어 온 이스라엘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을 때 이스라엘에도 과부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그들에게 보냄 받지 않고 이방인 시돈 지방 사렙다 과부에게 보냄 받았다는 얘기가 그 첫 번째 예입니다. 그리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엘리사는 그들은 한 명도 고쳐주지 않고 역시 이방 사람인 시리아인 나아만만 고쳐줬다는 얘기가 두 번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은 엘리야, 엘리사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과 같다는 뜻입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사실 무턱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양심을 찔러 그를 아프게 합니다. 종교적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아파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합니다! 의당 아파야 하는데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자신에 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듣거나 두루뭉술하게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일화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이 일반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남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그들 자신에 대핸 이야기임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얘기가 바로 네 얘기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언자 나단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함께 저지른 다윗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화를 얘기했을 때 다윗은 그 얘기를 듣고 “저런 죽일 놈!” 하고 흥분했습니다. 다윗은 그 우화가 자기 얘긴지도 모르고 흥분했던 것입니다. 이때 나단은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 세계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한 설교와 못한 설교는 종이 한 장 차이인데, 설교를 들으면서 교인들이 모두 “아, 이건 내 얘기구나!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구나.”라고 생각하면 잘 한 설교이고 “아, 이건 아무개 얘기구나. 아무개 들으라고 하는 얘기구나.”라고 생각하면 잘못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예로 든 일화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야기를 남의 얘기로만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얘기가 바로 ‘자기들’에 대한 얘기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얘기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대들었습니다.
이상은 누가복음이 전하는 얘기이고 오늘 우리의 본문인 마가복음에는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 뿐 다른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전할 뿐입니다. 이 대목이 주목을 끕니다. 본문은 다른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행할 수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기이하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없었고(무능) 그들의 불신앙을 기이하게 여기셨습니다(당황). 예수님이 예측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고, 하려고 의도했던 일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모호한 적대감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이 당신을 배척하리라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들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등 유대교 종교지도자였거나 로마제국의 권력자였다면 예수님은 당신이 배척당할 수 있음을 충분히 예측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어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고 후원했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가만 있자, 이 친구가 누구지? 그 목수 아냐? 바로 그 녀석 아냐? 바로 우리 옆집 살던 그 녀석 아냐?’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분에 대한 친밀함이 놀라움이 됐고 놀라움은 낯섦이 됐으며 결국 낯섦으로 인해 그분을 밀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서기 전 30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삶이 어땠을까요? 아마 모르긴 해도 평범했을 것입니다. 물론 가끔은 비범한 면을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대체로는 평범했을 것입니다. 남들이 사는 대로 똑같이 살았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약점도 있었을 것이고 잘못도 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습니다. 사랑스런 눈으로 보면 약점이 감춰지고 미운 눈으로 보면 똑같은 약점이 두드러져 보이는 법입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언자가 되어 자기들 앞에 나타난 이웃의 권위와 넘치는 은총과 거룩함이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에게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적대감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이웃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혼을 파고들어오는 영적인 힘과 은총에 맞부딪치는 순간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그 무엇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도 부끄러워 영혼 저 깊숙이 숨겨두었던 것이고 할 수만 있으면 잊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인이 느낀 바로 그것 말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 저 깊은 밑바닥에 숨겨두었기 때문에 웬만한 자극으로는 그것을 흔들어 깨울 수 없습니다. 물론 깨우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같은 분과 만날 때는 그것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은총과 만났을 때 느끼는 모호한 적대감과 분노는 결국은 해결해야 하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인간은 이 문제를 예수님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 속에서는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거나 악령을 내쫓을 때 때로 병자의 믿음을 요구하거나 확인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병자나 악령 들린 자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들을 고치신 적도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데 상대방의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사람들의 불신이 예수님의 기적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적에 대한 강한 열망은 분명 긍정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기적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도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불신은 기적과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 곧 부정적인 에너지는 예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늘 예수님의 기적을 가로막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의 본문은 분명 그런 경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할 것 없이 모든 공동체에는 에너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흐르는 에너지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따뜻한 에너지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차가운 에너지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는 부정적이고 의심에 가득 차 있으며 차갑고 적대적인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는 예수님도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저도 여러분도 모두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말이나 감정이나 생각이 부드럽게 녹아들어가지 않고 튕겨 나오는 경험 말입니다. 반대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녹아들어가고 융화되는 경험도 해보셨을 것입니다. 거기 어떤 에너지가 흐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으로 발휘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발휘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에너지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상집 같이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를 새 생명이 태어는 것 같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분위기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이 어떤 에너지를 갖고 있는가에 좌우됩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소극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 여러분의 신앙과 삶도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소극적이 되지만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감싸주는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 여러분의 신앙과 삶도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에너지로써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적극적이고 감싸주는 에너지를 이웃에게 내뿜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에너지를 갖고 살기를 바라고 또 그런 에너지는 이웃에 퍼뜨리기를 바랍니다. 이것도 전도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