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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지리산 피앗골 단풍은 붉게 물들기로 유명합니다. 그곳 단풍이 붉은 이유는 피앗골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일제시대나 6.25사변 등 변란이 일어날 때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피앗골로 숨어 들어갔다가 결국 그곳에서 피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의 피를 빨어먹고 자란 단풍나무의 잎들이 피처럼 붉게 물든다는 것입니다. 김순태 작가의 “피앗골”이라는 소설은 피앗골의 눈물난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해에 친구들과 함께 단풍 구경 차 배낭을 짊어지고 피앗골로 향했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걷는 도중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행 중 한 명이 “비도 오고 그러는데 올라가야 하느냐?”하며 망설이기 시작했자 전체 분위기가 구레 읍내에서 시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피앗골로 계속 진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결정 배후엔 나의 설득 작업이 있었습니다. 내가 펼친 설득 논리는 대충 이러합니다. “붉게 물든 피앗골 단풍은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단풍을 꼭 보아야 한다. 비에 젖는 한이 있더래도. 그리고 우리가 그 단풍을 보게 되면 결코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곳의 붉은 단풍을 그 전 해에도 구경했습니다. 얼마나 멋 있든지. . . 얼마나 붉게 물들었든지. . . 그 단풍을 양손으로 한움큼 따다가 옷에 넣고 쥐어짜면 핏물 같은 액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피앗골 단풍 구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피앗골의 붉게 물든 단풍을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정도 계속 걷다보니 이젠 굴직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붉게 물든 피앗골을 머리 속으로 그리면서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계곡을 오르는 초입구부터 단풍나무의 잎새들이 벌써 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다. 그럴리가 없을 텐데. . .”하는 불안한 생각이 있었으나 속마음을 감추고 친구들에게는 내가 보았던 지난 해의 피앗골 단풍의 아름다움을 극찬했습니다. 혹시나 떨어진 잎들을 보고 친구들이 길을 돌이켜 버릴까 해서. 우여곡절 끝에 피앗골 심장부까지 깊숙이 들어간 우리는 (아니 내 자신은)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현실이란 그 해 피앗골의 절묘한 단풍 풍경을 볼 시간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연일 계속 내리던 비와 함께 찾아온 차가운 날씨가 그곳 단풍을 다른 해보다 10여일 정도 일찍 지게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사전에 국립공원 쪽에 연락해서 정보를 알아보아야 했던 것인데, 지난 해와 같은 시기를 선택했던 게 잘못이었습니다. 피앗골 단풍은 나의 시간대에 맞추어주지 않았습니다. 피앗골 단풍은 자연의 시간대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자연의 시간대에 나의 계획을 조정했어야 했습니다.
나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한동안 벌거벗겨진 단풍나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고집부려서 이곳까지 데려왔는데. 모두들 비에 옷이 흠뻑 젖어가면서도 내 말만 믿고 붉은 단풍을 기대하고 이곳까지 올라왔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땅에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붉은 빛을 자랑하고 있던 단풍잎 몇 개를 주워 들고서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붉지? 이것들이 여전히 단풍나무에 붙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전도서에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1-2).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때에 따라 천하만물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전 3:11). 하나님은 “때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2, 3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계시하셨고, 그 꿈에 동참할 헌신자들을 찾고 계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계시하신 것은 이사야나 말라기 선지자부터 시작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부터 계시된 것이지요 (창세기 3:15).
이사야 선지자로부터는 길게 보면 600년, 말라기 선지자로부터는 4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의공백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때에 헌신할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세례 요한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사장인 사가랴이고, 어머니는 믿음의 여인 엘리사벳입니다. 사회적으로 명성 있는 제사장 가문이요, 당대에 보기 드물게 믿음 좋은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일찍이 부모의 슬하를 벗어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자신의 안일을 위해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때에 동참하는 삶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성경(구약)을 읽으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꿈과 그 꿈이 이루어질 때를 파악하면서 그 때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헤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잘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이르자 광야에서 사역 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And so John came)” 하는 3절 상반절에 담겨 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꿈을 깊게 헤아리면서 자신이 감당할 일은 오실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회개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위선 그리고 수많은 삶의 죄악으로 인해 더럽혀진 심령이 깨끗하게 씻김 받아야 백성들이 오실 메시아께서 들려주시는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강력하게 “회개하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또한 그는 메시아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받아 살아가는 삶의 축복을 알기에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임하실 메시아께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친히 주도하시는 일은 우리가 힘써 노력하여 이루는 일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는 말씀 가운데 “새로운”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이노스인데, 이것은 “(아주 특별히 신선함이 깃들어 있는) 새로운”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피조물로 만들어내고 싶어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 43:19). 하지만 우리 안에서 새 일(새로운 변화)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소원을 깨닫지 못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동참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안타깝게도 지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본문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 한 번 더 첨부했음)” 라고 숱한 세월 동안 안타깝게 외치고 또 외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새 일을 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면, 그 소원에 어떻게 동참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변화, 카이노스 변화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동참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껍질을 벗어내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세례 요한은 “회개”라고 불렀습니다. 회개란 입술로 하는 죄의 고백이 아닙니다. 회개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에 동참하기 위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그런데 삶의 근본적인 변화, 즉 회개를 하려면 현재 우리 자신을 감싸주고 있는 두터운 보호막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두터운 보호막은 새로운 변화로 이동하기 힘들게 우리를 묶어두고 있는 일상생활로써 현재 우리 생활을 보장해주고 있는 삶의 영역(공간)입니다. “꿈을 주시는 분(The Dream Giver)”이라는 책에서 Bruce Wilkinson 목사님은 이것을 “안락한 영역 (공간) (the comfortable zone)” 이라 칭합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현재 삶의 안락한 영역(the comfortable zone)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힘듭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힘들게 수고하여 만든 환경에 큰 변화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로 들어서, 새 가구를 사 들이기 위해 옛날에 장만했던 가구를 내다버린다는 것은 보통 힘든 결단이 아닙니다. 특별히 그 가구가 힘들었던 이민 초기에 장만했던 것이었다고 한다면 더욱 버리기 아깝습니다. 하지만 새로 장만한 가구를 위해 옛 것은 치워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놓아두게 되면 공간만 비좁아지고 바람직한 집안 모양새가 만들어질 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술친구들과 관계를 청산하는 작업은 어렵습니다. 술친구와 오랫 동안 맺은 우정 때문입니다. 하지만 술을 끊으려면, 술친구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에 동참하기 위해 편안한 삶의 영역을 떠났습니다. 그는 편안히 살 수 있는 가문을 떠나 불편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영역(the comfortable zone)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카이노스의 변화)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에 동참하려면 회개, 근본적인 삶의 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아픔과 불편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막상 현재의 안락한 삶의 영역(the comfortable zone)을 벗어나게 되면 곧바로 다가올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행동이 선행 되어야 새로운 단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 (God’s Timing for Your Life)”(출판사: 토기쟁이)는 책에서 더치 쉬츠(Dutch Sheets)는 “바다 가재 예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재는 성장하기 위해서 때로는 껍질을 벗어 버려야만 한다. 껍질은 외부로부터의 상처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지만, 가재는 성장할 때마다 옛 껍질을 포기해야만 한다. 만약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옛 껍질은 곧 가재의 감옥이 되고 마침내는 관이 될 것이다. (p.18-19)
현재 우리가 삶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을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현재 모습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벗어버리길 거부하는 우리의 삶의 영역은 우리 영혼을 매장시키는 무덤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현재 생활의 변화를 시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를 시도해야 할까?” 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변으로 “보고 (See), 느끼며 (Feel), 변화하라 (Change)” 라는 세 가지 변화의 과정을 소개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 세 가지 변화 과정은 “The Heart of Change: Real-Life Stories of How People Change Their Organizations” 라는 책에서 John P. Kotter과 Dan S. Cohen 이라는 분의 아이디어를 내 나름대로 응용한 것입니다.)
첫째, 자신의 현재 생활(육적, 영적상태)을 진단해 보십시오 (See!). “나는 현재 이 모습 이대로가 좋은가?” “나는 정말 행복한가?”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 “무엇 때문에 불만족스러운가?” “나는 완전한가?” “무엇 때문에 불완전한가?” 나는 성령충만한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가?” 떠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노트에 솔직히 적으십시오.
“나는 현재 나의 삶과 영적 상태에 온전히 만족한다. 나는 지금 진실로 행복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면,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육적, 영적상태에 온전히 만족한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어느 인간도 그렇게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완전한 성숙, 완전한 행복, 그리고 완전한 만족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노트에 적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Feel!). 머리로 아는 것과 피부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현재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숙제)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분노가 창자(gut)에서부터 올라와야 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 전에는 치유를 위한 변화의 필요를 느낄 수 없습니다. 머리 속에서만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은 머리 속에서만 현재 모습을 안타까워 하고, 머리 속에서만 변화를 그려볼 뿐입니다. 창자에서부터 문제의 심각성이 느껴지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기도 시간을 가지십시오. 성령의 인도 가운데 자신의 모습, 문제 때문에 몸부림치는 고통의 경험이 있다면, 변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변화를 시도하십시오 (Change!).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머리 속에서 느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변화를 시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래서는 아니 되는데. 변화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만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변화를 당장 시도해야 합니다. Just do it! 변화를 시도할 때 두려움이 들거들랑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든든히 붙잡으십시오.
변화를 시도할 때 한꺼번에 많은 것을 변화시키려는 유혹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주요 요인은 소화할 수 없는 양의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현실 가능한 변화 한 가지씩 시도하십시오. 시도했던 변화를 성공한 이후 성취의 즐거움을 가지십시오. 그래야 다른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변화를 시도하는 예를 소개해 보면 이렇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연초에 한 해 동안 새벽기도회에 참여하겠다고 결단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몇 주일 아니 몇 일 되지 못해 포기합니다. 실현 가능한 3일, 아니면 일주일 새벽기도회를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3일 혹은 일주일 새벽기도회를 성공하면, 그 다음에 2주 혹은 한 달 새벽기도회를 작정하십시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 카이로스의 변화의 때에 동참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바로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결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지리산 피앗골 단풍은 붉게 물들기로 유명합니다. 그곳 단풍이 붉은 이유는 피앗골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일제시대나 6.25사변 등 변란이 일어날 때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피앗골로 숨어 들어갔다가 결국 그곳에서 피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의 피를 빨어먹고 자란 단풍나무의 잎들이 피처럼 붉게 물든다는 것입니다. 김순태 작가의 “피앗골”이라는 소설은 피앗골의 눈물난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해에 친구들과 함께 단풍 구경 차 배낭을 짊어지고 피앗골로 향했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걷는 도중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행 중 한 명이 “비도 오고 그러는데 올라가야 하느냐?”하며 망설이기 시작했자 전체 분위기가 구레 읍내에서 시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피앗골로 계속 진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결정 배후엔 나의 설득 작업이 있었습니다. 내가 펼친 설득 논리는 대충 이러합니다. “붉게 물든 피앗골 단풍은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단풍을 꼭 보아야 한다. 비에 젖는 한이 있더래도. 그리고 우리가 그 단풍을 보게 되면 결코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곳의 붉은 단풍을 그 전 해에도 구경했습니다. 얼마나 멋 있든지. . . 얼마나 붉게 물들었든지. . . 그 단풍을 양손으로 한움큼 따다가 옷에 넣고 쥐어짜면 핏물 같은 액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피앗골 단풍 구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피앗골의 붉게 물든 단풍을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정도 계속 걷다보니 이젠 굴직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붉게 물든 피앗골을 머리 속으로 그리면서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계곡을 오르는 초입구부터 단풍나무의 잎새들이 벌써 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다. 그럴리가 없을 텐데. . .”하는 불안한 생각이 있었으나 속마음을 감추고 친구들에게는 내가 보았던 지난 해의 피앗골 단풍의 아름다움을 극찬했습니다. 혹시나 떨어진 잎들을 보고 친구들이 길을 돌이켜 버릴까 해서. 우여곡절 끝에 피앗골 심장부까지 깊숙이 들어간 우리는 (아니 내 자신은)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현실이란 그 해 피앗골의 절묘한 단풍 풍경을 볼 시간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연일 계속 내리던 비와 함께 찾아온 차가운 날씨가 그곳 단풍을 다른 해보다 10여일 정도 일찍 지게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사전에 국립공원 쪽에 연락해서 정보를 알아보아야 했던 것인데, 지난 해와 같은 시기를 선택했던 게 잘못이었습니다. 피앗골 단풍은 나의 시간대에 맞추어주지 않았습니다. 피앗골 단풍은 자연의 시간대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자연의 시간대에 나의 계획을 조정했어야 했습니다.
나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한동안 벌거벗겨진 단풍나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고집부려서 이곳까지 데려왔는데. 모두들 비에 옷이 흠뻑 젖어가면서도 내 말만 믿고 붉은 단풍을 기대하고 이곳까지 올라왔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땅에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붉은 빛을 자랑하고 있던 단풍잎 몇 개를 주워 들고서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붉지? 이것들이 여전히 단풍나무에 붙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전도서에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1-2).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때에 따라 천하만물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전 3:11). 하나님은 “때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2, 3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계시하셨고, 그 꿈에 동참할 헌신자들을 찾고 계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계시하신 것은 이사야나 말라기 선지자부터 시작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부터 계시된 것이지요 (창세기 3:15).
이사야 선지자로부터는 길게 보면 600년, 말라기 선지자로부터는 4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의공백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때에 헌신할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세례 요한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사장인 사가랴이고, 어머니는 믿음의 여인 엘리사벳입니다. 사회적으로 명성 있는 제사장 가문이요, 당대에 보기 드물게 믿음 좋은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일찍이 부모의 슬하를 벗어나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자신의 안일을 위해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때에 동참하는 삶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성경(구약)을 읽으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꿈과 그 꿈이 이루어질 때를 파악하면서 그 때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헤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잘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이르자 광야에서 사역 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And so John came)” 하는 3절 상반절에 담겨 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꿈을 깊게 헤아리면서 자신이 감당할 일은 오실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회개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위선 그리고 수많은 삶의 죄악으로 인해 더럽혀진 심령이 깨끗하게 씻김 받아야 백성들이 오실 메시아께서 들려주시는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강력하게 “회개하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또한 그는 메시아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받아 살아가는 삶의 축복을 알기에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임하실 메시아께서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친히 주도하시는 일은 우리가 힘써 노력하여 이루는 일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는 말씀 가운데 “새로운”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이노스인데, 이것은 “(아주 특별히 신선함이 깃들어 있는) 새로운”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피조물로 만들어내고 싶어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 43:19). 하지만 우리 안에서 새 일(새로운 변화)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소원을 깨닫지 못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동참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안타깝게도 지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본문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 한 번 더 첨부했음)” 라고 숱한 세월 동안 안타깝게 외치고 또 외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새 일을 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면, 그 소원에 어떻게 동참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변화, 카이노스 변화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동참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껍질을 벗어내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세례 요한은 “회개”라고 불렀습니다. 회개란 입술로 하는 죄의 고백이 아닙니다. 회개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에 동참하기 위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그런데 삶의 근본적인 변화, 즉 회개를 하려면 현재 우리 자신을 감싸주고 있는 두터운 보호막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두터운 보호막은 새로운 변화로 이동하기 힘들게 우리를 묶어두고 있는 일상생활로써 현재 우리 생활을 보장해주고 있는 삶의 영역(공간)입니다. “꿈을 주시는 분(The Dream Giver)”이라는 책에서 Bruce Wilkinson 목사님은 이것을 “안락한 영역 (공간) (the comfortable zone)” 이라 칭합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현재 삶의 안락한 영역(the comfortable zone)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힘듭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힘들게 수고하여 만든 환경에 큰 변화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로 들어서, 새 가구를 사 들이기 위해 옛날에 장만했던 가구를 내다버린다는 것은 보통 힘든 결단이 아닙니다. 특별히 그 가구가 힘들었던 이민 초기에 장만했던 것이었다고 한다면 더욱 버리기 아깝습니다. 하지만 새로 장만한 가구를 위해 옛 것은 치워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놓아두게 되면 공간만 비좁아지고 바람직한 집안 모양새가 만들어질 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술친구들과 관계를 청산하는 작업은 어렵습니다. 술친구와 오랫 동안 맺은 우정 때문입니다. 하지만 술을 끊으려면, 술친구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에 동참하기 위해 편안한 삶의 영역을 떠났습니다. 그는 편안히 살 수 있는 가문을 떠나 불편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영역(the comfortable zone)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카이노스의 변화)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에 동참하려면 회개, 근본적인 삶의 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아픔과 불편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막상 현재의 안락한 삶의 영역(the comfortable zone)을 벗어나게 되면 곧바로 다가올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행동이 선행 되어야 새로운 단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 (God’s Timing for Your Life)”(출판사: 토기쟁이)는 책에서 더치 쉬츠(Dutch Sheets)는 “바다 가재 예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재는 성장하기 위해서 때로는 껍질을 벗어 버려야만 한다. 껍질은 외부로부터의 상처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지만, 가재는 성장할 때마다 옛 껍질을 포기해야만 한다. 만약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옛 껍질은 곧 가재의 감옥이 되고 마침내는 관이 될 것이다. (p.18-19)
현재 우리가 삶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을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현재 모습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벗어버리길 거부하는 우리의 삶의 영역은 우리 영혼을 매장시키는 무덤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현재 생활의 변화를 시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를 시도해야 할까?” 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변으로 “보고 (See), 느끼며 (Feel), 변화하라 (Change)” 라는 세 가지 변화의 과정을 소개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 세 가지 변화 과정은 “The Heart of Change: Real-Life Stories of How People Change Their Organizations” 라는 책에서 John P. Kotter과 Dan S. Cohen 이라는 분의 아이디어를 내 나름대로 응용한 것입니다.)
첫째, 자신의 현재 생활(육적, 영적상태)을 진단해 보십시오 (See!). “나는 현재 이 모습 이대로가 좋은가?” “나는 정말 행복한가?”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 “무엇 때문에 불만족스러운가?” “나는 완전한가?” “무엇 때문에 불완전한가?” 나는 성령충만한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가?” 떠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노트에 솔직히 적으십시오.
“나는 현재 나의 삶과 영적 상태에 온전히 만족한다. 나는 지금 진실로 행복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면,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육적, 영적상태에 온전히 만족한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어느 인간도 그렇게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완전한 성숙, 완전한 행복, 그리고 완전한 만족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노트에 적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Feel!). 머리로 아는 것과 피부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현재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숙제)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분노가 창자(gut)에서부터 올라와야 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기 전에는 치유를 위한 변화의 필요를 느낄 수 없습니다. 머리 속에서만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은 머리 속에서만 현재 모습을 안타까워 하고, 머리 속에서만 변화를 그려볼 뿐입니다. 창자에서부터 문제의 심각성이 느껴지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기도 시간을 가지십시오. 성령의 인도 가운데 자신의 모습, 문제 때문에 몸부림치는 고통의 경험이 있다면, 변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변화를 시도하십시오 (Change!).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머리 속에서 느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변화를 시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래서는 아니 되는데. 변화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만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변화를 당장 시도해야 합니다. Just do it! 변화를 시도할 때 두려움이 들거들랑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든든히 붙잡으십시오.
변화를 시도할 때 한꺼번에 많은 것을 변화시키려는 유혹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주요 요인은 소화할 수 없는 양의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현실 가능한 변화 한 가지씩 시도하십시오. 시도했던 변화를 성공한 이후 성취의 즐거움을 가지십시오. 그래야 다른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변화를 시도하는 예를 소개해 보면 이렇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연초에 한 해 동안 새벽기도회에 참여하겠다고 결단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몇 주일 아니 몇 일 되지 못해 포기합니다. 실현 가능한 3일, 아니면 일주일 새벽기도회를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3일 혹은 일주일 새벽기도회를 성공하면, 그 다음에 2주 혹은 한 달 새벽기도회를 작정하십시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새 일, 카이로스의 변화의 때에 동참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바로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결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