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2
분류 |
---|
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인간에 대한 최고의 찬사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7-11).
이 말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개인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신 것은 세례자 요한의 경우가 유일합니다. 그 내용도 ‘극찬’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라는 말은 사람을 두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이런 평가를 하신 분이 다른 분도 아니고 예수님이었으니 그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대림절은 네 주간 동안 지키게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주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복음서 말씀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대림절 때가 아니면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요한의 비중을 생각해보면 그는 교회에서 적지 않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자'라고 부르는데 정작 교회는 그 선구자를 경시하는 셈입니다. 선구자인 요한을 모르면 예수님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덧셈을 할 줄 모르면 곱셈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하나의 연극이라고 보면 요한의 역할은 전반부에만 등장하고 사라져버리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조연이 아닙니다. 그는 극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연입니다. 그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극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중요한 조연의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주간에 걸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그는 어떤 분이었는지 그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그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선구자였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뿐입니다. 복음서는 그의 생애가 어땠는지, 그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체계적으로 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적어도 그의 삶이 어디를 지향했는지, 그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비교적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삶과 그가 선포한 메시지가 매우 투명하고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의 선구자, 또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인식을 뚜렷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곧 자신은 주연배우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요.
그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가로 나왔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요한이 어떤 권위를 갖고 있었기에 그 단순한 메시지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왔는가 말입니다. 그들도 뭔가 자기들이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그런데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해야 잘못을 고칠 수 있는지를 몰랐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가 그들의 영혼을 울렸을까요? 어찌됐든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가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수많은 무리를 보고 추상같이 외쳤습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라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사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까?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방향을 전환하다'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오물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서 '내 탓이요' 하며 가슴 치며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물 구덩이에서 벌떡 일어나 거기서 빠져나와서 옷에 묻은 오물을 털어낸 다음에 마음을 다잡아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내 탓이요' 하고 가슴 치는 데서 회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족속'이라고 욕을 퍼붓고서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죄 사함의 세례는 회개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 불에 던져지리라는 요한의 추상같은 외침을 들은 군중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군중들의 태도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사의 족속'이라는 극심한 욕을 먹고도 요한에게 머리 숙이고 나와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말입니다. 요즘 이런 교인들이 있습니까? 목사들도 교인을 꾸중하지 않습니다. 꾸중을 들으면서 교회 나오려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을 잘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교인이 교회 안 나올까봐 두려워 잘못해도 잘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세례자 요한의 군중이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요한은 군중들에게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세리는 정해진 대로만 세금을 거두고, 군인은 협박이나 속임수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 살아 있다면...
저는 세례자 요한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우리에게도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욕을 했을까요? 꾸중이나 비판 듣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꾸중이나 비판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들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 듣기 싫은 것이 바로 꾸중이나 비판입니다. 요즘은 꾸중이나 비판을 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은 꾸중과 비판이 사라진 시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스승이 제자를 꾸중하지 않고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을 꾸중하지도 않습니다. 어른이 아이들 눈치를 보고 스승이 제자의 눈치를 보며 부모가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큰 이유는 요즘은 '무엇이 올바른가?'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무엇이 득이 되는가?'가 유일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나 스승 제자 간에 '무엇이 옳은가?'는 상관하지 않고 '무엇이 득이 되는가?'만 따집니다. 그러니 꾸중이나 비판을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꾸중이나 비판만이 옳은 교육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이것들이 우리 교육에서 사라졌는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방법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치지 않으니 꾸중이나 비판이 사라졌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옳음이라는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군중들을 꾸짖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에는 세례 받는 사람을 저절로 바르게 만들어줄만한 신비한 힘은 없습니다. 세례라는 배를 타면 저절로 거친 대양을 건너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 또는 그것을 받은 사람은 행실로써 회개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죄 사람의 세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행실로써 옳음이라는 가치를 실천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요한의 메시지에서 제 귀를 번쩍 뜨이게 한 대목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라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사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아직까지 그 오랜 시간동안 요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 이 구절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을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자처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습니다. 어떻게 핏줄로 유대인이라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선민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새 이스라엘'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나 기독교인들의 선민의식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핏줄'에 근거하고 기독교인들의 선민의식은 '믿음'에 근거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둘은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선민임을 자주 확인하도록 교육받았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늘 확인하도록 교육받아왔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려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확신이 없는 아이들은 의심한다고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비판하면서도 스스로 갖고 있는 선민의식은 정당하다고 여겨왔습니다. 과연 기독교인의 선민의식을 정당합니까?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구원의 확신은 정당합니까? 믿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옳으냐 말입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나만 옳다는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효과를 갖습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이 갖는 부정적인 효과에 더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신앙인의 적극적인 태도는 다른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독선과 아집은 치료하기가 매우 어려운 병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작정 구원의 확신을 갖기 보다는 늘 긴장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탐구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갖는 편이 신앙에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구세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 와서 유대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세상에 정당한 선민의식이란 없습니다)을 비판했습니다. 선민의식은 나만 옳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옳음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 나만 옳다는 의식은 절대로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전한 두 가지 메시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옳음을 추구하되 나만 절대적으로 옳다는 의식을 버리는 것,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에 관한 설교는 다음 주일로 이어집니다. ♣
인간에 대한 최고의 찬사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7-11).
이 말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개인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신 것은 세례자 요한의 경우가 유일합니다. 그 내용도 ‘극찬’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라는 말은 사람을 두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이런 평가를 하신 분이 다른 분도 아니고 예수님이었으니 그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대림절은 네 주간 동안 지키게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주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복음서 말씀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대림절 때가 아니면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요한의 비중을 생각해보면 그는 교회에서 적지 않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자'라고 부르는데 정작 교회는 그 선구자를 경시하는 셈입니다. 선구자인 요한을 모르면 예수님도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덧셈을 할 줄 모르면 곱셈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하나의 연극이라고 보면 요한의 역할은 전반부에만 등장하고 사라져버리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조연이 아닙니다. 그는 극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연입니다. 그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극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중요한 조연의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주간에 걸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그는 어떤 분이었는지 그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그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선구자였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뿐입니다. 복음서는 그의 생애가 어땠는지, 그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체계적으로 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적어도 그의 삶이 어디를 지향했는지, 그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비교적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삶과 그가 선포한 메시지가 매우 투명하고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의 선구자, 또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인식을 뚜렷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곧 자신은 주연배우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요.
그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가로 나왔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요한이 어떤 권위를 갖고 있었기에 그 단순한 메시지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왔는가 말입니다. 그들도 뭔가 자기들이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그런데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해야 잘못을 고칠 수 있는지를 몰랐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가 그들의 영혼을 울렸을까요? 어찌됐든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가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수많은 무리를 보고 추상같이 외쳤습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라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사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까?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방향을 전환하다'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오물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서 '내 탓이요' 하며 가슴 치며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물 구덩이에서 벌떡 일어나 거기서 빠져나와서 옷에 묻은 오물을 털어낸 다음에 마음을 다잡아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내 탓이요' 하고 가슴 치는 데서 회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족속'이라고 욕을 퍼붓고서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죄 사함의 세례는 회개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 불에 던져지리라는 요한의 추상같은 외침을 들은 군중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군중들의 태도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사의 족속'이라는 극심한 욕을 먹고도 요한에게 머리 숙이고 나와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말입니다. 요즘 이런 교인들이 있습니까? 목사들도 교인을 꾸중하지 않습니다. 꾸중을 들으면서 교회 나오려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을 잘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교인이 교회 안 나올까봐 두려워 잘못해도 잘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세례자 요한의 군중이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요한은 군중들에게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세리는 정해진 대로만 세금을 거두고, 군인은 협박이나 속임수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 살아 있다면...
저는 세례자 요한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우리에게도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욕을 했을까요? 꾸중이나 비판 듣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꾸중이나 비판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들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 듣기 싫은 것이 바로 꾸중이나 비판입니다. 요즘은 꾸중이나 비판을 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은 꾸중과 비판이 사라진 시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스승이 제자를 꾸중하지 않고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을 꾸중하지도 않습니다. 어른이 아이들 눈치를 보고 스승이 제자의 눈치를 보며 부모가 자식의 눈치를 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큰 이유는 요즘은 '무엇이 올바른가?'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무엇이 득이 되는가?'가 유일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나 스승 제자 간에 '무엇이 옳은가?'는 상관하지 않고 '무엇이 득이 되는가?'만 따집니다. 그러니 꾸중이나 비판을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꾸중이나 비판만이 옳은 교육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이것들이 우리 교육에서 사라졌는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방법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치지 않으니 꾸중이나 비판이 사라졌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옳음이라는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군중들을 꾸짖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에는 세례 받는 사람을 저절로 바르게 만들어줄만한 신비한 힘은 없습니다. 세례라는 배를 타면 저절로 거친 대양을 건너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 또는 그것을 받은 사람은 행실로써 회개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죄 사람의 세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행실로써 옳음이라는 가치를 실천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요한의 메시지에서 제 귀를 번쩍 뜨이게 한 대목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라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사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아직까지 그 오랜 시간동안 요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 이 구절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을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자처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습니다. 어떻게 핏줄로 유대인이라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선민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새 이스라엘'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나 기독교인들의 선민의식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핏줄'에 근거하고 기독교인들의 선민의식은 '믿음'에 근거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둘은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선민임을 자주 확인하도록 교육받았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늘 확인하도록 교육받아왔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려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확신이 없는 아이들은 의심한다고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비판하면서도 스스로 갖고 있는 선민의식은 정당하다고 여겨왔습니다. 과연 기독교인의 선민의식을 정당합니까?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구원의 확신은 정당합니까? 믿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옳으냐 말입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나만 옳다는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효과를 갖습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이 갖는 부정적인 효과에 더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신앙인의 적극적인 태도는 다른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독선과 아집은 치료하기가 매우 어려운 병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작정 구원의 확신을 갖기 보다는 늘 긴장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탐구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갖는 편이 신앙에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구세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 와서 유대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세상에 정당한 선민의식이란 없습니다)을 비판했습니다. 선민의식은 나만 옳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옳음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 나만 옳다는 의식은 절대로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전한 두 가지 메시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옳음을 추구하되 나만 절대적으로 옳다는 의식을 버리는 것,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에 관한 설교는 다음 주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