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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목사 (토랜스 한인연합감리교회)
주전 (B.C) 5-6년 경에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는 로마를 비롯한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모든 식민지역의 백성들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 역시 로마의 식민지역이었기에, 갈릴리 나사렛 두메 산골에서 살던 요셉 역시 호적 등록 차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아내 마리아는 첫 아기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힘들게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한 요셉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은 아내를 위해서 방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여관방을 얻는다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이러저리 헤매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한 요셉은 한 여관 주인에게 진통 중인 아내를 잠시 동안 눕힐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 달라고 통사정해서 마구간이나마 겨우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마구간 밖에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호적 등록을 위해 여행 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구간이라도 요셉에겐 좋았습니다. 오랜 여행으로 인한 피로와 밀려드는 진통으로 인해 고통 중인 아내를 눕힐 공간이 생겼으니까. 가축 사료인 짚을 가져다 바닥에 깔아 푹신하게 자리를 만든 후 요셉은 아내를 그 위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아기를 누일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던 요셉은 말구유 곧 말의 여물을 담는 밥통에 짚을 깔고 그 안에 갓 태어난 아기를 누였습니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이러라” (눅 2:7).
어찌 생각해보면, “천하게 태어나도 그토록 천하게 태어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출생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출생한 그 아기는 천한 아기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천한 곳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는 세상 만민을 죄로부터 구원할 구주시요, 병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할 그리스도시요, 영원히 통치하실 주님이셨습니다.
“어떻게 태어났느냐?,” “어디서 태어났으나?,” “누구의 가문에서 태어났느냐?”는 사람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 어떤 꿈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자라면서 어떤 꿈을 가지고 자랐느냐?,” “성장해서 어떤 꿈을 이루고 살아가느냐?”가 진정 중요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세타령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타령할 신세는 없다고 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화시킬 의지와 수고가 있다면. 사람들은 태어난 환경과 가문을 통해 사람을 평가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환경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가면서 환경을 변화시켜 가도록 도와주십니다.
한편으로, 만민의 구주, 그리스도, 주님께서 마구간에서 탄생했다는 소식이 외부로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1절).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누구에게?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통하여 한밤 중에 들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에게 그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위대한 아기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듣고 그 탄생 현장에 초대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 밖에서 밖에 달리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던 하나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또한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한결같이 크게 외치고 계십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나는 우리 모두가 이 소식을 들을 수 있기 원하고, 그 소식으로 인해 큰 기쁨을 갖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내게도 목자들처럼 천군천사들로부터 구주 예수의 탄생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특별한 방법으로 구주 탄생 소식을 들으면 나 역시 구주 탄생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신비한 표적을 동반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는 우리 모두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매우 크고 특별한 현상(very big and special phenomena)을 동반하고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체험도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충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령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요소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알리고 싶으신 내용을 계시해 주십니다. 목자들에게는 그들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구간 말구유에 누어 있는 아기와 관련된 표적을 주셨고, 별을 연구하면서 돌아가는 세상 만사를 이해하는 동방 박사들에게는 크고 밝은 별을 통해 구주 탄생의 소식을 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2:1-12).
우리는 “sign=message, no sign=no message”라는 공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적이 없으면 메시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표적은 표적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 표적을 받는 자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표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표적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은 표적을 보지 않고도 소유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믿을 수 있는 믿음.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지 않고도 그분의 능력을 믿을 수 있는 믿음.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직접 듣지 않았어도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 그분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지 않았어도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얻는 죄사함과 영생을 믿는 믿음. 천국을 보지 않았음에도 천국의 삶을 위해 헌신하는 믿음. 바로 이러한 믿음이 큰 믿음이요, 복된 믿음입니다. 표적을 보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복된 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 20:29).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표적을 보여달라고 간구하기 보다는 표적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주변을 하나하나 살펴보노라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표적 덩어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요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에도 천군천사는 한결같이 외치고 계십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군천사의 음성이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소식을 듣고자 하는 우리의 기대와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보다는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될 소식을 찾기 열중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요즘 “’Twas the Night before Christmas”라는 캐롤을 TV에서 듣고 있노라면 너무 서글퍼집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러한 최근 TV 광고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한 젊은 부부가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캐롤를 듣고 있는 광고 말입니다. 그 젊은 부부가 처음에는 행복한 모습으로 캐롤을 듣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연출되면서, 캐롤을 부르는 아이들이 클로즈업 되면서 나타나지요. 그 아이들은 허밍으로 캐롤을 부르고 있는데, 그들의 눈은 집안에서 캐롤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게임보이(gameboy)에 시선이 쏠려 있지요. 그 광고가 전달하고 하는 메시지는 예수 탄생 소식이 아니라 밤에도 즐길 수 있는 게임보이 소식이지요. 그 광고는 밤에도 즐길 수 있는 게임보이가 구주 탄생보다 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왜곡해서 전달하면서 그 게임보이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장 큰 선물이라는 메시지를 청중의 뇌리에 심어놓으려고 하지요. 현대 사회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의미 왜곡과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너무나 서글프게도 잘 반영해 주는 광고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우리 모두가 듣고 기뻐해야 할 소식은 캄캄한 저녁에도 환희 밝은 화면을 통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보이가 아니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소식이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짧게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천군천사들이 전해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B.C. 6년 어느날 밤 들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만 전해진 소식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온 인류에게 전해진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난 아기는 목자들만을 위한 구주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탄생 소식을 전해 듣고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주, 그리스도,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이라는 소식 중 “오늘날”을 “바로 오늘”로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동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베들레헴을 의미하지만, 본질상으로는 온 인류의 구주시요, 그리스도시며, 주님께서 구약성서에 예언된대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구간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언약의 성취라는 말입니다.
또한 “너희를 위하여” 라는 구절을 우리는 의미심장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라는 구절을 유명한 영어 번역본들(KJV, NIV, NRSV)은 “너희에게 (to you)”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For un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r, which is Christ the Lord (KJV).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Christ the Lord (NIV). 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r, who is the messiah, the Lord (NRSV). 물론 한글번역처럼 “너희를 위하여 (for you)”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천군천사들이 전해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좀더 깊게 받아들이려면 “너희에게 (to you)” 라는 번역이 더욱 좋습니다.
“너희에게 (for you)”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있어 보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기분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to you)”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친히 우리들 사이에 혹은 내 자신 안에 임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우리를 위하여 임하셨다”는 말보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우리 가운데 혹은 내 안에 임하셨다”는 말이 더욱 친화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또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가운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바로 오늘 성경의 약속대로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주님이신 아기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천군천사들처럼 기뻐하며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목자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전해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아직까지 전해듣지 못한 자들이나 전해들었으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자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주전 (B.C) 5-6년 경에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는 로마를 비롯한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모든 식민지역의 백성들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 역시 로마의 식민지역이었기에, 갈릴리 나사렛 두메 산골에서 살던 요셉 역시 호적 등록 차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아내 마리아는 첫 아기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힘들게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한 요셉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은 아내를 위해서 방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여관방을 얻는다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이러저리 헤매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한 요셉은 한 여관 주인에게 진통 중인 아내를 잠시 동안 눕힐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 달라고 통사정해서 마구간이나마 겨우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마구간 밖에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호적 등록을 위해 여행 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구간이라도 요셉에겐 좋았습니다. 오랜 여행으로 인한 피로와 밀려드는 진통으로 인해 고통 중인 아내를 눕힐 공간이 생겼으니까. 가축 사료인 짚을 가져다 바닥에 깔아 푹신하게 자리를 만든 후 요셉은 아내를 그 위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아기를 누일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던 요셉은 말구유 곧 말의 여물을 담는 밥통에 짚을 깔고 그 안에 갓 태어난 아기를 누였습니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이러라” (눅 2:7).
어찌 생각해보면, “천하게 태어나도 그토록 천하게 태어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출생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출생한 그 아기는 천한 아기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천한 곳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는 세상 만민을 죄로부터 구원할 구주시요, 병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할 그리스도시요, 영원히 통치하실 주님이셨습니다.
“어떻게 태어났느냐?,” “어디서 태어났으나?,” “누구의 가문에서 태어났느냐?”는 사람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 어떤 꿈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자라면서 어떤 꿈을 가지고 자랐느냐?,” “성장해서 어떤 꿈을 이루고 살아가느냐?”가 진정 중요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세타령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타령할 신세는 없다고 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화시킬 의지와 수고가 있다면. 사람들은 태어난 환경과 가문을 통해 사람을 평가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환경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가면서 환경을 변화시켜 가도록 도와주십니다.
한편으로, 만민의 구주, 그리스도, 주님께서 마구간에서 탄생했다는 소식이 외부로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1절).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누구에게?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통하여 한밤 중에 들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에게 그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위대한 아기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듣고 그 탄생 현장에 초대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 밖에서 밖에 달리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던 하나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또한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한결같이 크게 외치고 계십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나는 우리 모두가 이 소식을 들을 수 있기 원하고, 그 소식으로 인해 큰 기쁨을 갖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내게도 목자들처럼 천군천사들로부터 구주 예수의 탄생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특별한 방법으로 구주 탄생 소식을 들으면 나 역시 구주 탄생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신비한 표적을 동반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는 우리 모두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매우 크고 특별한 현상(very big and special phenomena)을 동반하고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체험도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충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령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요소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알리고 싶으신 내용을 계시해 주십니다. 목자들에게는 그들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구간 말구유에 누어 있는 아기와 관련된 표적을 주셨고, 별을 연구하면서 돌아가는 세상 만사를 이해하는 동방 박사들에게는 크고 밝은 별을 통해 구주 탄생의 소식을 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2:1-12).
우리는 “sign=message, no sign=no message”라는 공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적이 없으면 메시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표적은 표적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 표적을 받는 자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표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표적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내가 성경을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은 표적을 보지 않고도 소유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분을 믿을 수 있는 믿음.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지 않고도 그분의 능력을 믿을 수 있는 믿음.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직접 듣지 않았어도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 그분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지 않았어도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얻는 죄사함과 영생을 믿는 믿음. 천국을 보지 않았음에도 천국의 삶을 위해 헌신하는 믿음. 바로 이러한 믿음이 큰 믿음이요, 복된 믿음입니다. 표적을 보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복된 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 20:29).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표적을 보여달라고 간구하기 보다는 표적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주변을 하나하나 살펴보노라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표적 덩어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요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에도 천군천사는 한결같이 외치고 계십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군천사의 음성이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소식을 듣고자 하는 우리의 기대와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보다는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될 소식을 찾기 열중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요즘 “’Twas the Night before Christmas”라는 캐롤을 TV에서 듣고 있노라면 너무 서글퍼집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러한 최근 TV 광고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한 젊은 부부가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캐롤를 듣고 있는 광고 말입니다. 그 젊은 부부가 처음에는 행복한 모습으로 캐롤을 듣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연출되면서, 캐롤을 부르는 아이들이 클로즈업 되면서 나타나지요. 그 아이들은 허밍으로 캐롤을 부르고 있는데, 그들의 눈은 집안에서 캐롤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게임보이(gameboy)에 시선이 쏠려 있지요. 그 광고가 전달하고 하는 메시지는 예수 탄생 소식이 아니라 밤에도 즐길 수 있는 게임보이 소식이지요. 그 광고는 밤에도 즐길 수 있는 게임보이가 구주 탄생보다 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왜곡해서 전달하면서 그 게임보이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장 큰 선물이라는 메시지를 청중의 뇌리에 심어놓으려고 하지요. 현대 사회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의미 왜곡과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너무나 서글프게도 잘 반영해 주는 광고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우리 모두가 듣고 기뻐해야 할 소식은 캄캄한 저녁에도 환희 밝은 화면을 통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보이가 아니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소식이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짧게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천군천사들이 전해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B.C. 6년 어느날 밤 들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만 전해진 소식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온 인류에게 전해진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난 아기는 목자들만을 위한 구주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탄생 소식을 전해 듣고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주, 그리스도,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이라는 소식 중 “오늘날”을 “바로 오늘”로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동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베들레헴을 의미하지만, 본질상으로는 온 인류의 구주시요, 그리스도시며, 주님께서 구약성서에 예언된대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구간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언약의 성취라는 말입니다.
또한 “너희를 위하여” 라는 구절을 우리는 의미심장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라는 구절을 유명한 영어 번역본들(KJV, NIV, NRSV)은 “너희에게 (to you)”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For un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r, which is Christ the Lord (KJV).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Christ the Lord (NIV). 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r, who is the messiah, the Lord (NRSV). 물론 한글번역처럼 “너희를 위하여 (for you)”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천군천사들이 전해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좀더 깊게 받아들이려면 “너희에게 (to you)” 라는 번역이 더욱 좋습니다.
“너희에게 (for you)”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있어 보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기분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희에게 (to you)”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친히 우리들 사이에 혹은 내 자신 안에 임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우리를 위하여 임하셨다”는 말보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구주 그리스도)이 우리 가운데 혹은 내 안에 임하셨다”는 말이 더욱 친화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또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가운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바로 오늘 성경의 약속대로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주님이신 아기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천군천사들처럼 기뻐하며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목자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전해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아직까지 전해듣지 못한 자들이나 전해들었으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자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