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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하나님의 모습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습’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두고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추상적인 속성을 가리킨다는 주장에서부터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모습을 가리킨다는 주장까지 매우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그 어떤 주장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출애굽기 20장 4절에는 우상을 금지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본 따서 만든 우상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야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의 형상뿐 아니라 야훼 하나님 자신의 형상까지도 포함합니다. 야훼 하나님이든 그 밖에 다른 신이든 그 어떤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은 역사성을 갖습니다. 종교적인 가르침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입니다. 물론 어떤 종교적 가르침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하지만 그런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역시 역사적입니다.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하는 명령 역시 우선은 그 계명이 주어졌던 시대의 환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이 주어졌던 시대에 모든 중동지역 사람들은 신을 거대한 형상으로 만들어 거기 절하며 섬겼습니다. 신의 형상이 크고 화려할수록 위대한 신이라고 믿었고 신을 거대하고 화려하게 만들수록 사람의 신에 대한 경외감과 충성심이 잘 표현된다고 믿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런 시대에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은 본래 형상이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주셨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그것이 옳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바닥으로 모세의 얼굴을 가리다
출애굽기 33장 18절 이하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모세가 시내 산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서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여러 날이 지나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을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갖고 있던 금붙이를 다 모아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신이라면서 광란하며 그것을 예배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이 광경을 본 모세는 레위 인들을 시켜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했던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집단살육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모세가 얼마나 큰 좌절에 빠졌을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아 거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백성들에게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마 자신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나를 보고 살아남을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모세도 이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뒷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너는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너는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을 볼 수 있으리라(출애굽기 33:21-23).
하나님은 모세의 얼굴을 모세의 손바닥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손바닥으로 모세의 얼굴을 가렸다가 모세 앞을 지나가시고 나면 그 손바닥을 모세의 얼굴에서 떼어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도 있고 손바닥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뒷모습은 볼 수 있지만 얼굴만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많은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크게 다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상에서 읽은 일련의 구약성경 이야기는 결국 나사렛 예수의 탄생 이야기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나사렛 예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단지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는 한 특정한 때에 특정한 공간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있고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몸을 빌려서 30여 년 동안 사람이 되셨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한 시점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인간이 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 이후로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나사렛 예수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볼 터인데 바로 그것이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여기서 '표'라는 말은 희랍어 원문으로는 ‘세메이온’으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용어로는 ‘표징’이고 영어로는 ‘sign’입니다. 우리는 두 주일 전에 세례자 요한에 대한 설교에서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전하라.” 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물음에는 ‘그렇다’ ‘아니다’는 식의 대답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표징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볼 터인데 바로 그것이 그분을 알아보는 표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관에 갓 태어난 아기가 많았기 때문에 목자들이 예수를 제대로 찾지 못할까봐 한 얘기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였으되 다른 모습이 아니라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의 모습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가난했지만 곧 부자가 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을 사람이 되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일’이 되는 셈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세상으로 향하는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역사 속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리모컨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현혹하려고 잠시 사람의 몸을 빌려 인간 세상에 머물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람과 똑같이 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웃고 울면서, 우리와 같이 기뻐하고 아파하면서 우리 삶속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사람을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삶속에 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고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 날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힘들어 하시고 괴로워하시며 함께 우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과 더불어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하나님의 모습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습’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두고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추상적인 속성을 가리킨다는 주장에서부터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모습을 가리킨다는 주장까지 매우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그 어떤 주장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출애굽기 20장 4절에는 우상을 금지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본 따서 만든 우상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야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의 형상뿐 아니라 야훼 하나님 자신의 형상까지도 포함합니다. 야훼 하나님이든 그 밖에 다른 신이든 그 어떤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은 역사성을 갖습니다. 종교적인 가르침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입니다. 물론 어떤 종교적 가르침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되기도 하지만 그런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역시 역사적입니다.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하는 명령 역시 우선은 그 계명이 주어졌던 시대의 환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이 주어졌던 시대에 모든 중동지역 사람들은 신을 거대한 형상으로 만들어 거기 절하며 섬겼습니다. 신의 형상이 크고 화려할수록 위대한 신이라고 믿었고 신을 거대하고 화려하게 만들수록 사람의 신에 대한 경외감과 충성심이 잘 표현된다고 믿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런 시대에 당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은 본래 형상이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주셨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그것이 옳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바닥으로 모세의 얼굴을 가리다
출애굽기 33장 18절 이하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모세가 시내 산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러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서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여러 날이 지나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을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갖고 있던 금붙이를 다 모아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신이라면서 광란하며 그것을 예배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이 광경을 본 모세는 레위 인들을 시켜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했던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집단살육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모세가 얼마나 큰 좌절에 빠졌을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아 거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백성들에게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마 자신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나를 보고 살아남을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모세도 이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뒷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너는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너는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을 볼 수 있으리라(출애굽기 33:21-23).
하나님은 모세의 얼굴을 모세의 손바닥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손바닥으로 모세의 얼굴을 가렸다가 모세 앞을 지나가시고 나면 그 손바닥을 모세의 얼굴에서 떼어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도 있고 손바닥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뒷모습은 볼 수 있지만 얼굴만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많은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크게 다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상에서 읽은 일련의 구약성경 이야기는 결국 나사렛 예수의 탄생 이야기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나사렛 예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단지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는 한 특정한 때에 특정한 공간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있고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몸을 빌려서 30여 년 동안 사람이 되셨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한 시점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인간이 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 이후로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나사렛 예수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볼 터인데 바로 그것이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
여기서 '표'라는 말은 희랍어 원문으로는 ‘세메이온’으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용어로는 ‘표징’이고 영어로는 ‘sign’입니다. 우리는 두 주일 전에 세례자 요한에 대한 설교에서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전하라.” 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물음에는 ‘그렇다’ ‘아니다’는 식의 대답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표징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볼 터인데 바로 그것이 그분을 알아보는 표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관에 갓 태어난 아기가 많았기 때문에 목자들이 예수를 제대로 찾지 못할까봐 한 얘기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였으되 다른 모습이 아니라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의 모습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가난했지만 곧 부자가 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을 사람이 되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일’이 되는 셈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세상으로 향하는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역사 속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리모컨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현혹하려고 잠시 사람의 몸을 빌려 인간 세상에 머물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람과 똑같이 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웃고 울면서, 우리와 같이 기뻐하고 아파하면서 우리 삶속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사람을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삶속에 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고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 날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힘들어 하시고 괴로워하시며 함께 우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과 더불어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