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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 목사 (와싱톤 한인교회)
1.
오늘은 여러분에게 그림을 하나 보여 드림으로 말씀의 문을 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공학박사이신 박선우 권사님께서 지난 중보기도 모임에서 보여 주신 것인데, 오늘 말씀과 연관되는 바가 있어서 제가 빌렸습니다. 박권사님께서 직접 설명해 드려야 더 좋을텐데, 그 정도로 깊은, 전문적인(technical) 설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 제가 상식(common sense)선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상식선에 계신 분들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그림은 'electromagnetic spectrum' (전자기파 스펙트럼)이라고 하는 것인데, 1862년 James Clerk Maxwell이라는 학자가 발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전자기파 스펙트럼'인데, 실은 빛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elements)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태양빛은 왼쪽끝에서 오른쪽끝까지 펼쳐져 있는,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가운데 'visible'이라고 쓰여있는, 진한 막대 표시로 되어 있는 작은 부분뿐입니다. 즉, 지금 예배당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고 있는 저 빛,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빛은 전체의 빛 중에서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적외선(the infrared) 밖에 있는 많은 종류의 빛과 자외선(the ultra-violet) 밖에 있는 많은 종류의 빛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빛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고 계시는 이 마이크로폰도 실은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송으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분들도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하는 라디오 방송 기술의 덕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우리 눈에 빛이 보인다고 해서 다 믿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 보면, 수 많은 별들이 반짝입니다. 그 별빛을 보고 우리는 "아, 저 멀리에 어떤 행성(planet)이 있겠구나!"라고 추측합니다만, 천문학자들(astronomers)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별들 중 적지 않은 별들이 이미 수 백만년 전에 사라졌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행성으로부터 우리 지구까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행성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올 때가 되면 이미 그 행성은 소멸되어(destroyed) 사라졌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우리 눈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허상(phantom)이고 무엇이 실상(reality)입니까?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입니까? 우리 눈의 능력이 이렇게 제한된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실상과 허상을 가려낼 수 있단 말입니까?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까?
2.
저는 지난 3 주 동안,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을 붙들고, 여러 각도에서 '아픔의 문제'(the question of pain)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요한복음 9장이 '아픔의 장'(the chapter of pain)인 것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은 '빛의 장'(the chapter of light)입니다. 아픔 속에 비추인 빛, 어둠 속에 비추인 빛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는 아픔에 관한 질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빛에 관한 증언(witness to the Light)으로 나아갑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아픔을 두고 제자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1장 4절 이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3장 19절에서는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3:21)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비유'(metaphor)로 혹은 '상징'(symbol)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시는 일이, 빛이 생물(living beings)에게 하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비유로만 혹은 상징으로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는 빛과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시 "에이, 태양 빛 말고 다른 빛이 어디 있다고 그래?"하고 반문(question)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앞에서 보지 않았나요? 태양 빛 안에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은 일부뿐이라고!
그렇다면 태양빛과 전혀 다른 빛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너무 비약(leap)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과학은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겠지만, 적어도 성경은 태양빛이 아닌 다른 빛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태양이 언제 지어졌습니까? 첫째 날에 "빛이 생겨라!"( Let there be light!)라고 말씀하심으로 태양이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태양은 넷째 날에 지어졌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첫째 날에 지어진 '태초의 빛'에 대해서는 히브리어 '오르'를 썼고, 16절에 나오는 태양빛에 대해서는 '메오르'를 썼습니다. 같은 빛이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지어지기 전에,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이 생겨랴"는 명령으로 생겨난 그 '빛'은 무엇입니까? 그 빛은 온 우주를 뒤덮고 있던 어둠(darkness)과 혼돈(chaos)을 걷어내고, 무질서(disorder)를 질서(order)로 바꿔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등빛이 태양빛을 모방한(imitate) 작은 빛이라면, 아마도 태양빛은 이 태초의 빛을 모방한 작은 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태초의 빛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실재(real thing)입니다. 태양빛만도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체(entity)인데, 이 원초적인 빛은 얼마나 더 심오(profound)하고 광대한(vast) 것이겠으며, 또한 얼마나 큰 능력(powerful)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그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그 빛이 세상에 환히 비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양빛을 전부라고 여기지 말고, 더 근원적인 빛이 있음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만유(all beings)의 창조의 원리요 능력이 되었던 그 빛, 영원한 오늘(eternal now), 영원한 낮(eternal daylight)을 있게 하는 그 빛, 모든 혼돈과 혼란과 무질서와 어둠을 걷어내고 광명한 삶 (life in light)을 가져 오는 그 빛. 그 빛이 자신을 통해 비치고 있으니, 그 빛에 눈을 뜨라는 것이고, 그 빛으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3.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빛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태양빛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둠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빛을 갈구(longing)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9장의 본문이 전형적인 예(a typical example)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생이 곤고해지거나 (when life is in trouble) 나라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비추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갈구하는 그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1절)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 이사야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 보면서, 마치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의 정복(invasion)과 압제(oppression)로 인해 절망과 좌절의 어둠 속에 시들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원초적인 빛(the prime light)이 뚫고 들어와, 그들의 삶의 조건들을 바꾸어 희망과 기쁨이 넘치게 해 주리라는 예언입니다. 태양 광선을 아무리 오래 비춰준다 해도, 아무리 태양 광선을 집약(concentrate)시켜 쪼여준다 해도, 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식물이라면 태양 광선을 조절함으로 죽어가던 것을 살려낼 수는 있지만, 인간은 태양광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필요합니다. 식물들이 태양광선을 받아 '광합성'(photosynthesis)을 하여 생명을 지속하듯, 인간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 좀 더 근원적인, '영적 광합성'(spiritual photosynthesis)을 해야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누구를 통해 비칩니까? 이사야서 9장 6절 이하에 보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참된 생명의 빛이 장차 보냄받을 메시야를 통해,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환히 비춰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 메시야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바로 이 본문을 인용하여, 나사렛에 살았던 요셉의 아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춰줄 그 사람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가시어, 자기의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이어서 저자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9장 1절과 2절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시어 공생애(public ministry)를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을 이룬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원초적인 빛(the prime light), 창조의 빛(the creating light), 참된 생명의 빛 (the light of true life)이 예수님을 통해 인류에게 다시 비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4.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십니다 (openly declared). 실상, 따지고 보면, 이처럼 대담한 발언(bold statement)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두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이 하도 대담해 보이니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예수님이 한 말이 아니라, 후대 교회에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만든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였는지를 제대로 생각해 본다면, 그분이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해 보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과대망상증 환자(megalomaniac)의 헛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같은 분이 원초적인 빛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태초의 참된 빛이 따로 있음을 알면서 그 사실에 대해 침묵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빛을 받고 그 빛의 능력으로 변화받아 빛으로 살아가는 길을 알고 있으면서 그 빛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데나 가서 "내가 메시야다!"라고 선전하고 다녔을 리야 없지만, 중요한 시점에서, 꼭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료하게 밝혔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저는 앞에서, 그분이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실체의 빛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빛 안에서 살아갈 때, 그 빛의 능력으로 우리의 본성(nature)이 변화하고 우리의 성품(character)이 변화하고 우리의 기질(temper)이 변화하는, 그런 실제적인 빛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결국 우리의 주변 상황까지도 변화시키도록 이끄는 초강력 빛(super-power light)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빛을 받으면, 마치 행성이 태양빛을 받아 빛을 발산(reflect)하듯, 우리도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 게 발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사 60:1)고 말하고는, 이어서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3절) 라고 말씀했습니다. 빛을 받아 빛으로 변하여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되리라는 예언입니다.
태양빛은 육신의 생명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태양빛이 사라지면 지상의 모든 생명은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빛은 '생령'(living soul)으로 지어진 우리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빛을 받고 그 빛의 광합성 작용을 통해 참된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은 다만 '생물'(living thing)일뿐입니다. 다만 생물로만 살아 육체가 원하는 것만 공급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낮에 살아도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생명이 없습니다. 반면, 참된 빛을 받아 생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두운 밤 길을 걷고 있다 해도 실은 빛 가운데 걷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이 성탄절기를 형형 색색의 전구들 (various shapes and colors of lights)로 장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진리요 실재입니다. 오히려, 태양빛과 전구빛이 참된 빛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유요 상징입니다. 태양빛과 전구빛을 잘 관찰해 보면, 참된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잘 관찰하면, 예수빛을 받을 때 일어나는 '영적 광합성'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에 대한 비유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In a real sense, all visible and tangible things are metaphors for those things that are invisible but real).
5.
닉슨(Richard Nixon) 시절에 백악관 참모였다가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감옥으로 추락했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의 회심기 '백악관에서 감옥까지'Born Again)에 보면, 그의 절친했던 친구 탐 필립스(Tom Phillips)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탐 필립스는 '레이시온'(Raytheon)이라는 항공회사에서 37세에 부사장이 되고, 40세에 사장(CEO)이 된 신화적 인물이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여 '경영과 윤리와 신앙' 문제에 대해 고문(consult)해 주는 일 을 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기업 경영(ethical business administration) 혹은 신앙적 기업 경영(Christian business administration) 분야에 있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 혼미스러울 때, 콜슨에게는 갖자기 얼마 전에 만났던 필립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콜슨은 이렇게 술회합니다(recall). "이 격동의 시기에 나는 탐을 종종 떠올렸다. 뭔가 빛이 나고, 평화롭고, 전혀 가장되지 않은 그의 표정이 더 자주 떠올랐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가 부러웠다."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심하게 지쳐 있던 콜슨은 필립스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가 살던 집 가까이에 갈 기회가 닿아, 그에게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필립스의 집으로 찾아간 콜슨은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탐, 자네에게 변화가 생긴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네."
그러자 탐은 약관 40세에 거대(mega) 기업의 사장으로 승진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끔찍한 공허감(emptiness)을 느꼈지. 어떤 때는 한밤중에 일어나서 침실을 왔다 갔다 하거나, 몇 시간씩 창밖의 어둠을 뚫어지게 쳐다 보기도 했어." 그러자 콜슨이 반문합니다. "이해할 수 없군. 그 당시에도 나는 자네를 알고 있었네, 탐. 자네는 정직한 사람이었어. 가정 생활도 원만했고, 성공했고, 모든 게 자네 뜻대로 되고 있었지 않은가?"
탐 필립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게 다 사실일지도 모르지, 척. 하지만 내 인생은 완벽하지 않았어. 매일같이 사무실에 나가서 회사를 성공시키려고 애를 쓰면서 일을 했지만, 내 인생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네.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어. 모든 것이 빈껍데기였지. 인생에서 물질적인 것들은 그 이면(the other side)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 답을 찾으려고 말이야.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무엇인가가 나를 깨닫게 해 주었고, 나에게 찾게 만들었지." 탐은 이러한 영적 갈증(spiritual longing)을 붙들고 씨름하던 중, 뉴욕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전도 집회가 있음을 알고 찾아갔다고 합니다. 필립스의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지. 호기심에서였겠지, 아마. 어쩌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그날 밤 그레이엄 목사가 한 말이 내 의문을 다 해결해 주었어. 내 인생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 알게 되었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말이야. 내가 한 번도 그분을 내 인생에 영접하지 못했다는 사실, 내 인생을 그분께 맡기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지. 바로 그날 밤 집회에서 말이야."
그는 말을 계속합니다. "그리스도께 내 인생에 들어와 달라고 했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그분의 평화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말일세. 그분의 영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그러고 나서 혼자 뉴욕의 거리를 산책했어. 전에는 한 번도 뉴욕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 밤은 정말 아름다웠네. 나는 몇 구역이고 계속해서 걸었던 것 같아. 모든 것이 달라 보였지.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도시의 가로등은 금빛을 내뿜고 있었어. 나에게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네."
찰스 콜슨은 어리둥절해서 묻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게 그런 거란 말인가? 그냥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자 탐 필립스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네.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네. 물론 예수님이 자네 삶 속에 들어오시길 원해야지. 간절하게 말이야. 시작은 그렇다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하고 나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지. 그때 이후로 나는 사는 것에 대해서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네." ('백악관에서 감옥까지', 185쪽 이하).
6.
탐 필립스에게 일어난 변화는 곧 참된 빛, 태초의 그 빛이 그의 삶 속에 비춰짐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는 제 말씀이 이제 수긍(acknowledge)이 되십니까? 예수의 빛은 실재입니다. 지금 이 예배실 공간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태양빛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듯, 우리 안에 예수님의 참빛이 비치고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X선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빛은 우리 몸 구석 구석을 비추어 줍니다. 그렇듯 예수빛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그 빛을 우리 마음 안에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미 받아들이신 분들은 그 빛이 더욱 환히 비치도록 더 순종하고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빛이 일으키는 변화와 새로운 창조가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 대화로 인해 찰스 콜슨은 충격을 받습니다. 태양빛만 알고 살아온 자신과 탐 필립스가 너무도 달라보였습니다. 아니, 콜슨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그냥 비유적인 의미로 '빛'이라고 생각했고, 그 빛이 없이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탐 필립스의 말을 통해 그리고 그의 달라진 표정과 몸짓과 사는 모습을 통해, 콜슨은 그 빛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마침내 C. 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 (The Mere Christianity)를 읽고 질문하고 씨름하면서, 그 빛을 만나고 그 빛에 의해 변화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콜슨은 현재 미국의 양심적 기독교(conscientious Christianity)를 대변(represent)하는 평신도 영적 지도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여러분, 이 말을 허투루(heedlessly)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유로 혹은 상징으로 오해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태양빛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빛입니다. 태양빛보다 더 근본적으로(fundamentally), 더 철저히(thoroughly), 더 광범위(comprehensively)하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것이 '예수빛'입니다. 예수빛이 비칠 때, 불치병이 치료되는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 빛이 비칠 때, 칠흑같던 절망이 걷힙니다. 그 빛이 비칠 때,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그 빛이 비칠 때, 원인을 모르던 무력감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들어찹니다. 그 빛이 비칠 때, 얼굴에 생기가 피어납니다. 그 빛이 비칠 때, 발걸음이 달라집니다. 그 빛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실제'로 바꿔놓습니다. 그러니 누가 반박하겠습니까? 예수빛은 태양빛만큼이나 실재라는 사실을!
1.
오늘은 여러분에게 그림을 하나 보여 드림으로 말씀의 문을 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공학박사이신 박선우 권사님께서 지난 중보기도 모임에서 보여 주신 것인데, 오늘 말씀과 연관되는 바가 있어서 제가 빌렸습니다. 박권사님께서 직접 설명해 드려야 더 좋을텐데, 그 정도로 깊은, 전문적인(technical) 설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 제가 상식(common sense)선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상식선에 계신 분들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그림은 'electromagnetic spectrum' (전자기파 스펙트럼)이라고 하는 것인데, 1862년 James Clerk Maxwell이라는 학자가 발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전자기파 스펙트럼'인데, 실은 빛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elements)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태양빛은 왼쪽끝에서 오른쪽끝까지 펼쳐져 있는,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가운데 'visible'이라고 쓰여있는, 진한 막대 표시로 되어 있는 작은 부분뿐입니다. 즉, 지금 예배당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고 있는 저 빛,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빛은 전체의 빛 중에서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적외선(the infrared) 밖에 있는 많은 종류의 빛과 자외선(the ultra-violet) 밖에 있는 많은 종류의 빛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빛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고 계시는 이 마이크로폰도 실은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송으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분들도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하는 라디오 방송 기술의 덕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우리 눈에 빛이 보인다고 해서 다 믿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 보면, 수 많은 별들이 반짝입니다. 그 별빛을 보고 우리는 "아, 저 멀리에 어떤 행성(planet)이 있겠구나!"라고 추측합니다만, 천문학자들(astronomers)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별들 중 적지 않은 별들이 이미 수 백만년 전에 사라졌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행성으로부터 우리 지구까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행성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올 때가 되면 이미 그 행성은 소멸되어(destroyed) 사라졌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우리 눈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허상(phantom)이고 무엇이 실상(reality)입니까?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입니까? 우리 눈의 능력이 이렇게 제한된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실상과 허상을 가려낼 수 있단 말입니까?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까?
2.
저는 지난 3 주 동안,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을 붙들고, 여러 각도에서 '아픔의 문제'(the question of pain)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요한복음 9장이 '아픔의 장'(the chapter of pain)인 것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은 '빛의 장'(the chapter of light)입니다. 아픔 속에 비추인 빛, 어둠 속에 비추인 빛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는 아픔에 관한 질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빛에 관한 증언(witness to the Light)으로 나아갑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아픔을 두고 제자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1장 4절 이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3장 19절에서는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3:21)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비유'(metaphor)로 혹은 '상징'(symbol)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시는 일이, 빛이 생물(living beings)에게 하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비유로만 혹은 상징으로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는 빛과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시 "에이, 태양 빛 말고 다른 빛이 어디 있다고 그래?"하고 반문(question)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앞에서 보지 않았나요? 태양 빛 안에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은 일부뿐이라고!
그렇다면 태양빛과 전혀 다른 빛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너무 비약(leap)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과학은 이 문제에 대해 아직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겠지만, 적어도 성경은 태양빛이 아닌 다른 빛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태양이 언제 지어졌습니까? 첫째 날에 "빛이 생겨라!"( Let there be light!)라고 말씀하심으로 태양이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태양은 넷째 날에 지어졌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첫째 날에 지어진 '태초의 빛'에 대해서는 히브리어 '오르'를 썼고, 16절에 나오는 태양빛에 대해서는 '메오르'를 썼습니다. 같은 빛이 아닙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지어지기 전에,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이 생겨랴"는 명령으로 생겨난 그 '빛'은 무엇입니까? 그 빛은 온 우주를 뒤덮고 있던 어둠(darkness)과 혼돈(chaos)을 걷어내고, 무질서(disorder)를 질서(order)로 바꿔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등빛이 태양빛을 모방한(imitate) 작은 빛이라면, 아마도 태양빛은 이 태초의 빛을 모방한 작은 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태초의 빛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실재(real thing)입니다. 태양빛만도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체(entity)인데, 이 원초적인 빛은 얼마나 더 심오(profound)하고 광대한(vast) 것이겠으며, 또한 얼마나 큰 능력(powerful)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그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그 빛이 세상에 환히 비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양빛을 전부라고 여기지 말고, 더 근원적인 빛이 있음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만유(all beings)의 창조의 원리요 능력이 되었던 그 빛, 영원한 오늘(eternal now), 영원한 낮(eternal daylight)을 있게 하는 그 빛, 모든 혼돈과 혼란과 무질서와 어둠을 걷어내고 광명한 삶 (life in light)을 가져 오는 그 빛. 그 빛이 자신을 통해 비치고 있으니, 그 빛에 눈을 뜨라는 것이고, 그 빛으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3.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빛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태양빛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둠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빛을 갈구(longing)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9장의 본문이 전형적인 예(a typical example)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생이 곤고해지거나 (when life is in trouble) 나라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비추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갈구하는 그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1절)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 이사야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 보면서, 마치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의 정복(invasion)과 압제(oppression)로 인해 절망과 좌절의 어둠 속에 시들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원초적인 빛(the prime light)이 뚫고 들어와, 그들의 삶의 조건들을 바꾸어 희망과 기쁨이 넘치게 해 주리라는 예언입니다. 태양 광선을 아무리 오래 비춰준다 해도, 아무리 태양 광선을 집약(concentrate)시켜 쪼여준다 해도, 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식물이라면 태양 광선을 조절함으로 죽어가던 것을 살려낼 수는 있지만, 인간은 태양광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필요합니다. 식물들이 태양광선을 받아 '광합성'(photosynthesis)을 하여 생명을 지속하듯, 인간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 좀 더 근원적인, '영적 광합성'(spiritual photosynthesis)을 해야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누구를 통해 비칩니까? 이사야서 9장 6절 이하에 보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참된 생명의 빛이 장차 보냄받을 메시야를 통해,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환히 비춰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 메시야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바로 이 본문을 인용하여, 나사렛에 살았던 요셉의 아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춰줄 그 사람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로 돌아가시어, 자기의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이어서 저자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9장 1절과 2절을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시어 공생애(public ministry)를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을 이룬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원초적인 빛(the prime light), 창조의 빛(the creating light), 참된 생명의 빛 (the light of true life)이 예수님을 통해 인류에게 다시 비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4.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십니다 (openly declared). 실상, 따지고 보면, 이처럼 대담한 발언(bold statement)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두고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이 하도 대담해 보이니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예수님이 한 말이 아니라, 후대 교회에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만든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였는지를 제대로 생각해 본다면, 그분이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해 보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과대망상증 환자(megalomaniac)의 헛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같은 분이 원초적인 빛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태초의 참된 빛이 따로 있음을 알면서 그 사실에 대해 침묵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빛을 받고 그 빛의 능력으로 변화받아 빛으로 살아가는 길을 알고 있으면서 그 빛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데나 가서 "내가 메시야다!"라고 선전하고 다녔을 리야 없지만, 중요한 시점에서, 꼭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료하게 밝혔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저는 앞에서, 그분이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실체의 빛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빛 안에서 살아갈 때, 그 빛의 능력으로 우리의 본성(nature)이 변화하고 우리의 성품(character)이 변화하고 우리의 기질(temper)이 변화하는, 그런 실제적인 빛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결국 우리의 주변 상황까지도 변화시키도록 이끄는 초강력 빛(super-power light)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빛을 받으면, 마치 행성이 태양빛을 받아 빛을 발산(reflect)하듯, 우리도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 게 발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사 60:1)고 말하고는, 이어서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3절) 라고 말씀했습니다. 빛을 받아 빛으로 변하여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되리라는 예언입니다.
태양빛은 육신의 생명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태양빛이 사라지면 지상의 모든 생명은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빛은 '생령'(living soul)으로 지어진 우리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빛을 받고 그 빛의 광합성 작용을 통해 참된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은 다만 '생물'(living thing)일뿐입니다. 다만 생물로만 살아 육체가 원하는 것만 공급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낮에 살아도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생명이 없습니다. 반면, 참된 빛을 받아 생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두운 밤 길을 걷고 있다 해도 실은 빛 가운데 걷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이 성탄절기를 형형 색색의 전구들 (various shapes and colors of lights)로 장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진리요 실재입니다. 오히려, 태양빛과 전구빛이 참된 빛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유요 상징입니다. 태양빛과 전구빛을 잘 관찰해 보면, 참된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잘 관찰하면, 예수빛을 받을 때 일어나는 '영적 광합성'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에 대한 비유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In a real sense, all visible and tangible things are metaphors for those things that are invisible but real).
5.
닉슨(Richard Nixon) 시절에 백악관 참모였다가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감옥으로 추락했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의 회심기 '백악관에서 감옥까지'Born Again)에 보면, 그의 절친했던 친구 탐 필립스(Tom Phillips)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탐 필립스는 '레이시온'(Raytheon)이라는 항공회사에서 37세에 부사장이 되고, 40세에 사장(CEO)이 된 신화적 인물이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여 '경영과 윤리와 신앙' 문제에 대해 고문(consult)해 주는 일 을 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기업 경영(ethical business administration) 혹은 신앙적 기업 경영(Christian business administration) 분야에 있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 혼미스러울 때, 콜슨에게는 갖자기 얼마 전에 만났던 필립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콜슨은 이렇게 술회합니다(recall). "이 격동의 시기에 나는 탐을 종종 떠올렸다. 뭔가 빛이 나고, 평화롭고, 전혀 가장되지 않은 그의 표정이 더 자주 떠올랐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가 부러웠다."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심하게 지쳐 있던 콜슨은 필립스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가 살던 집 가까이에 갈 기회가 닿아, 그에게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필립스의 집으로 찾아간 콜슨은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탐, 자네에게 변화가 생긴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네."
그러자 탐은 약관 40세에 거대(mega) 기업의 사장으로 승진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끔찍한 공허감(emptiness)을 느꼈지. 어떤 때는 한밤중에 일어나서 침실을 왔다 갔다 하거나, 몇 시간씩 창밖의 어둠을 뚫어지게 쳐다 보기도 했어." 그러자 콜슨이 반문합니다. "이해할 수 없군. 그 당시에도 나는 자네를 알고 있었네, 탐. 자네는 정직한 사람이었어. 가정 생활도 원만했고, 성공했고, 모든 게 자네 뜻대로 되고 있었지 않은가?"
탐 필립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게 다 사실일지도 모르지, 척. 하지만 내 인생은 완벽하지 않았어. 매일같이 사무실에 나가서 회사를 성공시키려고 애를 쓰면서 일을 했지만, 내 인생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네.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어. 모든 것이 빈껍데기였지. 인생에서 물질적인 것들은 그 이면(the other side)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 답을 찾으려고 말이야.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무엇인가가 나를 깨닫게 해 주었고, 나에게 찾게 만들었지." 탐은 이러한 영적 갈증(spiritual longing)을 붙들고 씨름하던 중, 뉴욕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전도 집회가 있음을 알고 찾아갔다고 합니다. 필립스의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지. 호기심에서였겠지, 아마. 어쩌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그날 밤 그레이엄 목사가 한 말이 내 의문을 다 해결해 주었어. 내 인생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 알게 되었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말이야. 내가 한 번도 그분을 내 인생에 영접하지 못했다는 사실, 내 인생을 그분께 맡기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지. 바로 그날 밤 집회에서 말이야."
그는 말을 계속합니다. "그리스도께 내 인생에 들어와 달라고 했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그분의 평화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말일세. 그분의 영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그러고 나서 혼자 뉴욕의 거리를 산책했어. 전에는 한 번도 뉴욕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 밤은 정말 아름다웠네. 나는 몇 구역이고 계속해서 걸었던 것 같아. 모든 것이 달라 보였지.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도시의 가로등은 금빛을 내뿜고 있었어. 나에게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네."
찰스 콜슨은 어리둥절해서 묻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게 그런 거란 말인가? 그냥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자 탐 필립스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네.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네. 물론 예수님이 자네 삶 속에 들어오시길 원해야지. 간절하게 말이야. 시작은 그렇다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하고 나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지. 그때 이후로 나는 사는 것에 대해서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네." ('백악관에서 감옥까지', 185쪽 이하).
6.
탐 필립스에게 일어난 변화는 곧 참된 빛, 태초의 그 빛이 그의 삶 속에 비춰짐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는 제 말씀이 이제 수긍(acknowledge)이 되십니까? 예수의 빛은 실재입니다. 지금 이 예배실 공간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태양빛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듯, 우리 안에 예수님의 참빛이 비치고 있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X선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빛은 우리 몸 구석 구석을 비추어 줍니다. 그렇듯 예수빛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그 빛을 우리 마음 안에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미 받아들이신 분들은 그 빛이 더욱 환히 비치도록 더 순종하고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빛이 일으키는 변화와 새로운 창조가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 대화로 인해 찰스 콜슨은 충격을 받습니다. 태양빛만 알고 살아온 자신과 탐 필립스가 너무도 달라보였습니다. 아니, 콜슨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그냥 비유적인 의미로 '빛'이라고 생각했고, 그 빛이 없이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탐 필립스의 말을 통해 그리고 그의 달라진 표정과 몸짓과 사는 모습을 통해, 콜슨은 그 빛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마침내 C. 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 (The Mere Christianity)를 읽고 질문하고 씨름하면서, 그 빛을 만나고 그 빛에 의해 변화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콜슨은 현재 미국의 양심적 기독교(conscientious Christianity)를 대변(represent)하는 평신도 영적 지도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여러분, 이 말을 허투루(heedlessly)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유로 혹은 상징으로 오해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태양빛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빛입니다. 태양빛보다 더 근본적으로(fundamentally), 더 철저히(thoroughly), 더 광범위(comprehensively)하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것이 '예수빛'입니다. 예수빛이 비칠 때, 불치병이 치료되는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 빛이 비칠 때, 칠흑같던 절망이 걷힙니다. 그 빛이 비칠 때,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그 빛이 비칠 때, 원인을 모르던 무력감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들어찹니다. 그 빛이 비칠 때, 얼굴에 생기가 피어납니다. 그 빛이 비칠 때, 발걸음이 달라집니다. 그 빛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실제'로 바꿔놓습니다. 그러니 누가 반박하겠습니까? 예수빛은 태양빛만큼이나 실재라는 사실을!